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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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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능선 만복대와 고리봉 사이에 위치한 정령치는 달궁에 피란도성(避亂都城)을 열었던 마한(馬韓) 한 왕조의 정(鄭)장군이 쌓았던 수비성터다. 서산대사의 '황령암기(黃嶺庵記)'에 그렇게 씌어 있다.
지금은 성삼재 횡단도로와 함께 남원 구룡계곡과 달궁, 또는 성삼재를 잇는 2차선 관광도로가 뚫려 있다.
정령치는 지리산 반야봉과 주능선을 조망하기에 좋아 차량으로 오른 이들은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지리산 구경 하기를 즐긴다. 정령치는 지리산 조망의 한 전망대로서 톡톡히 한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산대사의 '황령암기'는 '정령치' 대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한(漢)나라 소제(昭帝) 3년(BC 78)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난을 피하여 지리산 달궁으로 들어와 도성을 열고 수비성을 쌓을 때 황, 정 두 장수에게 일을 맡겨 감독케 하였다. 도성이 완성된 뒤 고개마루 이름을 두 장수의 성(姓)을 따서 각각 황령과 정령으로 불렀다. 도성은 그로부터 72년을 보전하였다.'
이 기록을 근거로 달궁을 '지리산 개산(開山)'의 역사적인 현장으로 보고 옛 역사를 추적해온 이가 언론인이자 향토사학자인 김경렬님이다.

그이는 달궁을 자주 찾아가 노인들을 만나 옛날부터 전해오는 많은 이야기들을 수집했다.
"1928년 7월, 심원계곡에서 쏟아져 내린 물이 달궁마을을 덮었다. 마을 앞 정자나무 위쪽에서 농가 세 채가 떠내려가고 논밭이 유실돼 피해가 컸다. 다음날 사람들은 200미터 아래의 왕궁터에서 냇물에 휩쓸려 패인 왕궁터를 보고 모두 놀랐다. 거기서 나온 다섯 아름의 귀목나무 그루터기와 새까맣게 변한 감나무는 둘레가 네 아름이 넘는데 썩지 않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다량의 동경(銅鏡)과 숟가락 등 청동제 유물들이었다.

"직경 1.5미터 정도의 질그릇 시루 한 개, 수십 개의 질그릇과 접시, 형태만 남은 매우 커보이는 숟가락 수십 개, 동경 두 개, 활촉같은 쇠붙이가 땅속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 가운데 완전한 것은 질그릇 접시 몇개 뿐이고, 쇠붙이는 녹이 슬고 삭아 있었다. 그 때 접시 등 완전한 것은 산내 주재소 일본인 순사부장이 가지고 갔다."
김경렬님은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와 주민들의 입으로 전래되는 얘기들을 취합한 끝에 달궁에 마한 피란도성인 '달의 궁전(월궁, 月宮)'이 있었고, 이것이 지리산 개산의 역사라고 단정했다.

달궁에 대한 김경렬님의 역사 추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87년 11월6일 그이는 달궁마을 김수곤 이장 부부와 함께 은장골을 따라 정령치로 오른다. 더 정확하게는 달궁마을에서 정령치 동쪽 고리봉(1304.5미터)으로 직등한 것이다.
은장골은 여순반군의 저 유명한 김지회(金智會)와 그의 처 조경순(趙庚順)이 다리에 총상을 입고 숨어있다 잡힌 곳이다.
7순 나이의 그이는 험한 골짜기의 잡목숲을 헤치고 네 시간을 땀을 쏟은 끝에 고리봉 능선 바로 아래 다다랐다.
그이는 어째서 이런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을까?

김경렬님은 정령치와 가까운 곳에 마애조각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마한시대 피난도성의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 그이는 마을 이장을 졸라 힘든 산행을 자청한 것이다.
그이는 마침내 그 조각상 앞에 섰다.
'조각상은 둥글넓적한 얼굴, 두툼한 입술, 알맞게 큰 기, 펑퍼짐하면서 우뚝한 주먹코로 하여 얼굴의 전체 윤곽이 선명한 데다 작달막한 키에 아래로 흘러내린 선이 굵은 의상이 또한 외모의 짜임새를 돕고 있었다...(중략) 우리나라 사람들의 얼굴과 체격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자화상(自畵像) 그대로이다.'

"이 조각상 아래에는 연대가 훨씬 내려와서 조각된 것으로 짐작되는 선이 가늘고 세련되지 못한, 앉은 자세의 불상도 있고, 서투른 솜씨로 집을 그린 조각도 있다. 조각상은 아마도 열 곳이 더 넘을 것 같다....(중략) 마애석상의 표정에서는 석가불의 초연함, 자비로움, 지혜로움, 후덕함, 또한 천년을 변치 않은 은은한 미소도 느낄 수 없다. 여기서는 오로지 인고와 의지, 어떤 통한(痛恨)의 비장감이 서려 있을 뿐이다. 다 떨어져 나가고 의지로 달려 있는 우람한 주먹코를 쳐다보면 차라리 처절감이 들 뿐이다."

김경렬님은 정령치 마애석상 주인공을 '마한의 얼굴'로 보았다.
그이는 달궁마을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온 정종근씨(당시 83세)로부터 "이 조각상이 정장군과 황장군의 석상이다"는 말도 들었다. 그래서 그이는 나머지 불상은 후대에 그려진 것으로 단정했다.

필자는 김경렬님을 따라 달궁마을을 곧잘 찾았다.
그러다 그이는 그만 타계하고 말았다.
지리산 개산 역사에 대한 비밀(?)을 추적하던 그이의 집념이 나에게 큰 부담으로 남았다.
하지만 나는 정령의 그 마애석상을 이번 답사길에 처음으로 찾게 됐다. 그런데...!
(2002년 8월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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