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전령 화신(花信)이 찾아오는 것과 함께 가장 먼저 붐비기 시작하는 곳이 '하동포구(河東浦口) 팔십리'다.
지리산 10경의 하나인 섬진청류에 청아한 매화꽃에 이어 화사한 벚꽃이 분홍색 물감을 들인다.
이 땅의 봄의 환호를 섬진강변에서 신호탄처럼 펼쳐보이는 것에서도 지리산의 무한한 세계 그 하나의 단면을 읽게 된다.
"하동포구 팔십리의 굽도리배야, 하동포구 팔십리에 봄을 실어라"는 우리 가요가 있다.
하지만 하동포구의 아름다움은 어디 봄만이랴.
사철 어느 때 찾아도 시정(詩情)이 넘쳐난다.
'하동포구 팔십리'란 어디서 어디까지인가?
섬진강 강물이 남해와 합류하는 하구에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 화개장터에 이르는 곳까지를 일컫는다.
남해안고속도로 하동 나들목에서 하동읍에 이르는 19번 국도는 얼마 전까지도 너무 꼬불꼬불하여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진강을 따라 거의 직선 형태나 다름없은 도로가 넓게 열려 바람처럼 시원하게 달릴 수 있다.
무엇보다 섬진청류를 계속 껴안고 가는 것이 구례까지 가능하게 됐다. 최고의 멋진 드라이브 코스로 사랑받을만하다.
하지만 '하동포구 팔십리'는 도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것을 말한다.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섬진강은 수운(水運)의 주요한 뱃길이었다.
화개장터가 유명한 것도 남해에서 황포돛배가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소금, 미역, 새우, 조기, 명태 등을 배로 실어왔고, 주능선 넘어 마천 사람들은 등짐으로 산나물, 약초, 곶감, 한지, 벌꿀 박바가지 등을 메고 왔었다.
대하소설 '토지'의 용이와 월선이의 찐덕한 사랑도 하동에서 거룻배가 평사리까지 오갔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섬진강은 서정시이고 지리산은 서사시라는 말도 있다.
특히 하동포구 팔십리 풍광은 너무나 아름다워 '한 폭의 동양화 속으로 흐르는 장강(長江)'이라고 하고, '굽이굽이 살아있는 도원(桃園)의 세계'라고도 한다.
이 때문에 '하동포구 팔십리'란 말도 실제의 릿수가 아닌, 정감의 거리로서 일컬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하동포구 팔십리도 지금은 지난날과 너무 달라졌다.
꼬불꼬불 산자락을 어지럽게 따라들던 도로가 직선으로 뚫린 반면 강바닥이 거의 메워져 황포돛대의 그 뱃길은 이미 끊어지고 말았다.
섬진강변을 따라가는 직선 도로가 개통돼 섬진강을 계속해서 더욱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게 된 것은 좋은 일이다.
특히 하동읍의 복잡한 길을 통과하는 대신 백사청송의 유명한 하동송림을 끼고 달릴 수 있는 것도 새로운 선물이다.
조선조 영조 21년(1745년) 당시 도호부사였던 전천상이 방풍과 방사를 목적으로 식재했던 것이 지금은 노송숲을 이뤄 섬진청류와 더불어 시정이 아름답게 넘치는 명소가 됐다.
2만6천㎡에 노송 1천여 그루가 어우러져 있고, 숲속에 궁도장인 하상정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하동포구 팔십리'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들 한다. 강물과 주변 풍광이 어울린 그림같은 모습은 황포돛대가 오르내리던 옛날에는 못 미치겠지만, 지금도 여전히 아름답다.
섬진강 양안(兩岸)의 이런저런 명소들이 어울려 나그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섬진강에는 아름다운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고려 우왕 11년(1385년) 왜구가 쳐들어왔지만, 사람들이 맞서지 않아 두꺼비들이 대신 들고 일어났다고 하여 두꺼비 섬(蟾)자를 붙여 섬진강(蟾津江)이라 이름한다지 않은가.
하동포구 팔십리 길은 지금도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지만, 일찍부터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역으로 크고 작은 전투를 치러왔다.
무엇보다 두번에 걸쳐 왜구의 침입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렀는데, 정유재란 때 고전장 석주관에서의 구례 사람들의 처절한 옥쇄는 지울 수 없는 역사적인 아픔이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동학농민전쟁과 빨치산과 군경토벌대의 격전으로 섬진강은 또 한 차례 홍역을 치러야 했다.
섬진강이 아름답다고 하여 지난날의 이런 비극들을 잊어버려도 좋을지는 의문이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하동포구 팔십리'!
이 섬진 강변길은 자동차가 아니라 걸어서 가는 길이면 더 좋을 것이다. 쉬엄쉬엄 걸어가며 하동포구 팔십리를 돌아보면 황포돛배로 유유자적 오르내리던 옛시절의 그 서정을 온 몸으로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직선도로를 내는 그 몇 백분의 일의 비용으로 자전거 도로나 보행로를 열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2002년 3월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