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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통신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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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1월3일, 필자는 아마 오랫동안 이 날을 잊지 못할 것이다. 오후 4시를 조금 지난 시각, 구례구역에서 구례읍으로 들어오는 고개를 막 넘어설 때였다. 거세게 쏟아지던 빗줄기가 멎는 것과 함께 코발트빛 하늘에 햇살이 부채살처럼 퍼져올랐다. 바로 그 순간, 노고단과 왕시루봉이 흰눈을 머리에 인 채 마치 필자의 눈앞으로 돌진해 오는 듯했다. 화엄사 뒤편 중턱부터 흰눈을 덮어쓰고 있고, 노고단 중계탑이 반짝거린다. 아, 지리산의 이 청정한 감동의 그림, 그것은 전혀 예기치 못한 뜻밖의 선물이었다.

필자는 원래 이날 집에서 휴식을 할 참이었다. 지난번 답사 이후 감기몸살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때문이었다. 그래서 태안사 봉두산 번개산행 계획도 참가 신청자에게 양해를 구해 취소시켰다. 그런데 토요일 저녁 광주에서 한 분이 전화를 걸어왔다. 봉두산 번개산행에 나오겠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이와 태안사에서 만나 봉두산을 오른 뒤 헤어져 돌아오는 길이었다. 태안사 경내에서 빗줄기가 쏟아졌고, 봉두산 정상에서 하산길은 함박눈, 다시 태안사에선 억센 빗줄기...그것이 되풀이됐다.

이 날은 뭔가 좀 이상했다. 아침 7시에 집을 나서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소통되는데도 휴게소마다 차를 세울 곳이 없을 만큼 만원이었다. 그래서 구례까지 넌스톱으로 쉬지도 않고 갔다. 태안사와 봉두산의 빗줄기와 함박눈과 강풍의 기상변덕...그 때문에 광주에서 온 분과 얘기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아쉽게 헤어졌다. 그런 뒤 구례구역에서 고개 하나를 넘어서던 순간 햇살 속에 노고단과 왕시루봉이 너무나 청명하게 드러났다. "담뱃불 끄고 들어와!" 그 하얀 노고단에서 문득 그 호통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1982년인가, 83년에 필자는 부산일보 김정태 사진기자와 함께 노고단산장을 찾았다. 산장 휴게실로 막 들어서려는데 벼락치는 소리가 날아왔다. "담뱃불 끄고 들어와!" 필자가 지리산에서 가장 크게 놀랐던 게 바로 이 순간이었다. 늘상 담배를 입에 물고다니다시피 하는 필자는 분명코 그 호통이 나를 향해 날아든 것으로 알았다. 깜짝 놀라 손을 입으로 가져가니 담배가 물려 있지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담배를 물고 있다 호통을 들은 것은 필자 뒤의 다른 사람이었다. 함태식님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이 됐다.

"여기 담배, 소주 그거 안 팔아요. 산에 올라 맑은 공기 담배연기로 오염시키고, 소주 마시고 정신이 풀어지고...그래서 여기 담배와 소주 없앴다구요!" 당시 노고단산장을 지키던 함태식님은 '조용히, 그리고 깨끗이'를 부르짖을 만큼 그 자신도 모범을 보였다. 담배를 피우지 않은 것은 물론, 담배를 아주 싫어했다. 산장 휴게소에 담배를 물고 들어서다간 양철통 깨지는 듯한 호통이 날아들기 십상이었다. 그이는 소주까지 아주 끊은 것은 아니다. 왕시루봉 '왕증장'에선 소주를 '무애주(無碍酒)'라 칭송하기도 했다.

담배를 싫어하는 것은 불일오두막의 변규화님도 마찬가지였다. 요즘은 변규화님도 함태식님도 술마저 거의 절주상태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즐거울 수가 있을까? 변규화님은 아무도 없는 달밝은 밤 벌거숭이로 달빛을 쐴 때 가장 즐겁다고 했다. 거추장스런 허위허식마저 벗어던진, 가장 깨끗한 순수의 육신이 나신(裸身)이 아니겠는가. 요즘은 피아골의 함태식님도 처음 피아골대피소에 내려왔을 때와 너무 다르다. 그 사이 왕시루봉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내면의 고요와 청정에 더 천착하는 듯하다.

그렇다. 지리산을 찾는 사람에게 떠들지 말고 조용히 하라,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지 말고 깨끗이 하라...이런 호통은 사실 이제는 초등학교 어린이에게나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지리산에서 30년 이상 산중생활을 해온 함태식님과 변규화님이 말하는 "조용히, 그리고 깨끗이!"는 지리산이 좋아 지리산을 찾는 우리들의 내면세계에 대한 가르침으로 보아야 한다. 깨끗한 몸가짐과 맑고 청정한 마음가짐을 하라는 것이리라. 그러니 "담뱃불 끄고 들어와!"라던 노고단산장의 그 호통도 유효한 것이 물론이다.

필자는 아직도 망막에 선연하게 남아있는 맑고 청정한 노고단과 왕시루봉의 그림을 안은 채 섬진강을 따라 집으로 오는 길을 재촉한다.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담배를 한 개피도 피지 않은 사실에 가슴 뿌듯해한다. 그래서 왕시루봉 자락이 섬진강에 닿는 '두레네집' 앞을 지나가면서 홀로 소리쳤다. "최화수가 오늘부터 담배를 끊습니다! 술도 고기도 커피도 빠이빠이입니다!" 최화수가 담배를 끊고, 술과 고기와 커피와도 담을 쌓을 수 있을 것인가!? 최화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할 것이다.
(2002년 11월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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