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그리고 깨끗이!"는 함태식님의 '지리산 전매특허'라고도 말할 수가 있겠다. 하지만 함태식님에 못지 않게 "조용히, 그리고 깨끗이"를 어김없이 실천에 옮기고 있는 이가 또 있다. 지리산의 또다른 털보인 불일평전 오두막의 변규화님이다. 불일평전 오두막은 소설가 정비석님이 일찌기 이곳을 찾아와 '鳳鳴山房(봉명산방)'이란 이름을 지어주었고, 도올 김용옥님이 국사암에 은거하고 있을 때 한 달만 기거하자고 졸랐던 곳이기도 하다. 이 오두막의 주인이 이십수년째 불일평전을 지켜오고 있는 변규화님이다.
불일폭포를 찾는 이들은 반드시 이 봉명산방 앞을 지나가게 된다. 달리 길이 없기 때문이다. 불일폭포는 365일 개방돼 있고,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하지만 배낭을 메고는 불일오두막에서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못한다. 배낭을 멘 채 들어가는 사람이 있을 경우 어김없이 불일오두막 봉창문이 덜컥 열리며 "그 배낭 벗어놓고 가시오!" 하고 불호령이 떨어지는 것이다. 불일폭포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배낭을 메고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불문률이다. 그 누구라도 배낭은 오두막에 벗어둔 채 다녀와야 한다.
변규화님은 경남 거창 출신으로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이다. 또한 불일폭포 위의 상불에서 오랜 기간 토굴생활을 하여 득도의 경지에 이른 특출한 인물이다. 그이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한다. 독특한 산중 수련생활과 해박한 지식, 여유와 해학으로 무슨 이야기이든 청산유수처럼 막힘이 없다. 불일평전 전매특허인 갈근차나 불로주라도 한 잔 나누며 얘기를 나누다보면 그이의 생각이 어찌나 투명한지 아직도 동심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해준다. 하지만 배낭 하나만은 절대로 어림없다.
필자는 불일오두막을 찾을 때마다 뜨락의 돌탁자에서 불로주를 나누며 그이와 얘기를 나누는 것을 즐긴다. '봉명선인(鳳鳴仙人)'의 탄생에서부터 서울로 간 손주아이에 이르기까지 그이가 신명을 내며 들려주는 얘기들이 너무너무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년같은 헤맑은 웃음을 흘리며 신명나게 얘기하던 그이가 갑자기 얼굴 근육이 굳어지며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를 때가 있다. "배낭 거기 벗어놓고 가라구!" 오직 하나 그 놈의 배낭인 것이다. 그 배낭은 그이의 다른 어떤 행위도 중단을 시켜버리는 것이다.
변규화님이 이처럼 배낭을 불일폭포로부터 철저하게 차단시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이가 불일폭포에 처음 정착했을 때는 물론 등산객이나 유산객의 배낭을 간섭하지 않았다. 등산객, 유산객들이 불일폭포에서 취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꾸역꾸역 몰려 올라오는 사람들이 제마다 폭포 일대에서 한바탕 놀다가 돌아가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빈병과 캔, 음식 찌꺼기며 포장지 등 온갖 쓰레기가 산더미를 이루다시피 하는 것이었다. 물론 폭포 주변의 쓰레기 치우기는 그이의 몫이었다.
"쓰레기를 버리지 맙시다!"는 안내판도 세워보고, "음주가무를 삼가해달라"는 호소도 해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술에 취한 젊은이들이 절벽을 오르는 만용을 부리다 추락, 시신을 옮기는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아무리 입간판을 세우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자 변규화님은 마침내 극단의 대책을 생각해냈다. 그것이 곧 배낭을 폭포로부터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었다. 먹을 것, 마실 것이 들어있는 배낭을 불일오두막에서 '강제 보관'을 하니까 폭포에서는 자연히 먹거나 마시거나 하는 일이 없어졌다.
국립공원 관리공단은 변규화님의 지리산 환경보존 활동에 감명, 불일평전에 많은 예산을 들여 야영장을 설치해 주었다. 취수대와 취사대, 소각장과 화장실에 전기시설까지 가설한 것이다. 하지만 야영장이 열린데 따른 소란행위와 쓰레기 문제는 정말 몸살을 앓게 하는 것이었다. 그이 역시 함태식님처럼 "조용히, 그리고 깨끗이"를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용히, 그리고 깨끗이"를 위해서 그이 또한 함태식님처럼 수염을 길렀다. "이 수염으로 야영장을 조용히, 그리고 깨끗이 관리할 수 있었다"고 털어놓을 정도이다.
함태식님과 변규화님은 지리산 털보로 각별한 사이이다. 함태식님이 왕시루봉 왕증장에 있을 때는 변규화님이 그곳까지 가서 서로 해포를 풀기도 했다. 피아골대피소의 함태식님과 불일평전의 변규화님은 지리산에선 특별한 비중을 차지하는 주인공들이다. 지리산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사람이면서, 또한 지리산 보존을 위해 "조용히, 그리고 깨끗이"를 외치고 있다. 또한 그 누구도 감히 그것을 거역하지 못한다. 지리산에서 "조용히, 그리고 깨끗이"를 외칠 수 있는 이들 어른이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2002년 10월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