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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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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의병을 소집하고 '창의격문'을 지었던 양대박(梁大樸)은 지리산을 자주 찾았던 인물이다.
그는 그 까닭을 '아마도 그 산이 바다를 삼킬 듯이 웅장하고 천지간에 우뚝 서 있어서 신선들과 고승들이 모여 살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그는 44세 때인 선조 19년(1586년) 천왕봉으로 오르면서 '마치 천만 겹의 수묵화를 그려놓은 병풍 같기도 하고, 300리나 펼쳐진 비단 휘장 같기도 하다'고 감탄한다. 신선과 득도한 이들이 병풍과 비단 휘장을 두르고 사는 곳이 지리산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리산 으뜸 봉우리인 천왕봉은 오로지 거대한 암괴일 뿐이다. '천만 겹의 수묵화를 그려놓은 병풍이나 비단 휘장'도 신선 고승의 차지이니, 그런 천상의 누각도 일반인은 관념으로만 그려볼 따름이다.
실제 이곳에 오른 사람들의 현실은 냉엄하기 짝이 없다. 당장 강한 바람과 추위를 막아줄 한 평의 공간이 아쉬운 것이다.
국립공원 지리산 관리사무소는 천왕봉 반경 2킬로미터 안에는 막영을 일절 금지하고 있다. 천왕봉에서 하룻밤을 새우려면 천하 없는 사람도 꼼짝없이 바위 틈에서 비박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지난날에는 현실의 집이 있었다. 성모석상(聖母石像)을 모신 사당, 곧 성모사(聖母祠)가 그것이다. 지리산 기행록을 남긴 조선시대의 선비나 관리들은 한결같이 이 성모사에서 묵거나 가까운 제석봉의 향적사를 이용하기도 했다.
성모사가 언제 누구에 의해 세워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사당의 주인공인 성모상은 고려 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라는 등의 여러 설이 있다(성모석상 얘기는 앞으로 따로 하게 된다). 성모상의 역사가 1.000년이니 사당 또한 그러할 듯하다.

이 사당의 규모는 한 칸 판잣집으로 비좁고 초라했다고 한다.
1472년 이곳을 찾은 함양 태수 김종직은 '네 사람이 함께 사당 안에서 서로 베고 누웠는데, 찬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고 했다.
그의 제자 김일손이 12년 뒤 찾았을 때도 '돌무더기를 두른 안에 비좁은 한 칸 판짓집'이었다.
그런데 김종직보다 9년 먼저 이곳에 올랐던 이륙의 산행기에는 성모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김일손보다 100년 뒤에 오른 양대박은 성모사를 '매우 좁고 누추한 판잣집'이라고 하였다.

광해군 2년(1610년)에 천왕봉을 찾은 박여량 일행은 사당 안에서 이불을 끌어안고 두 줄로 마주앉아 등불을 매달고 향을 피운 뒤 술잔을 돌린다.
'다시 악기를 연주하고, 데리고 온 승려와 종들에게 번갈아 일어나서 함께 춤을 추게 하였다'고 했다. 또 '승려의 춤사위가 뛰어나 온 좌중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한바탕 크게 웃었다.'고 하니, 이 때는 성모사의 공간이 다소 넓어진 듯하다.
그런데 바로 한 해 뒤 이곳을 찾은 유몽인(柳夢寅)의 '유두류산록'은 이곳의 아주 흥미로운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원근의 무당들이 이 성모에 의지해 먹고 산다. 이들은 산꼭대기에 올라 유생이나 관원들이 오는지를 살피다가, 그들이 오면 토끼나 꿩처럼 흩어져 솦 속에 몸을 숨겼다가 그들이 하산하면 다시 모인다.
봉우리 밑에 벌집 같은 판잣집을 빙 둘러 지어놓았는데, 이는 기도하러 오는 자들을 맞이하여 묵게 하려는 것이다.
기도객이 가축을 산 밑의 사당에 매어놓고 가는데, 무당들이 불가에선 짐승을 잡는 것을 금한다는 것을 핑계로 내세워 그것을 취하여 생계의 밑천을 삼는다.'

유몽인은 또 '천왕봉의 성모사와 백모당(白母堂), 용류담이 무당들의 3대 소굴이 되었으니 참으로 분개할 일이다' 라고 했다.
백모당이란 백무동(白武洞)의 옛 이름인데, 언제나 100명의 무당이 진을 치고 있다고 하여 백무(百巫)동, 안개가 많다고 하여 백무(白霧)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 높은 천왕봉의 암괴 위에 집을 지은 것은 무속신앙의 힘이었다. 더구나 기도객을 묵게 하기 위한 벌집 판잣집을 빙 둘러 지어놓았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옛시절 천왕봉의 '벌집 여인숙'이었던 셈이다.

인근 고을 태수와 관리 등이 행차를 하여 하룻밤 묵었던 성모사는 성모석상을 모셨던 사당으로 당국의 암묵적인 허가를 받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 그곳은 선비와 관리들의 천왕봉 나들이 때 유용하게 이용됐다.
하지만 '벌집 판잣집'들은 어떻게 들어설 수 있었을까? '천만 겹 수묵화를 그려놓은 병풍과 300리나 펼쳐진 비단 휘장'을 두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무서운 욕망의 결과다.
지리산에서 기도하면 득도하여 신선이 된다는 광적 집념은 새천년 디지털 시대인 지금도 변함이 없다. 지리산 구석구석에는 그것을 열망하는 기도객들이 오늘도 넘쳐나고 있으니...!
(2001년 1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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