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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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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평화의 산, 그리고 마을, 안심하고 오십시오. 지리산 공비는 완전 섬멸되었습니다.'
1955년 5월 지리산 서남지구전투경찰사령부가 지리산 주요 들목에 내건 안내문이다. 48년 10월 여순반란 이래 7년 동안 빨치산과 군경토벌군의 처절한 살육전이 벌어졌던 지리산이 마침내 평화를 찾은 것이다.
7년 동안 살벌한 전쟁터로 총성과 화염에 휩싸였던 지리산의 평화를 온 국민은 학수고대했다. 전쟁 바람에 등산이란 꿈도 꿀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안심하고 오십시오' 라는 말 이상 큰 기쁨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순덕 이홍희의 '망실공비 2인부대' 등은 그로부터 8년이나 더 지리산을 누비며 인명살상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리산 최후의 총성은 63년 11월18일 새벽 정순덕이 살았던 국사봉 자락 안내원부락에서 일어났다.)

지리산이 개방되자 이 땅의 몇 안 되는 등산 선구자들이 당장 구두끈을 고쳐맨 것은 물론이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부산의 성산(成山)이다.
서울 배제중학 등산클럽 출신으로 부산에 피란와 있던 김아무개로부터 등산을 배운 그는 그 해 창설된 삼천리탐승회 회원이 되었다.
1955년 7월 성산은 삼천리탐승회 회원들과 함께 대망의 지리산 천왕봉 등정길에 나서게 됐다.
진주의 김순용씨가 천왕봉의 반지하식 토굴산장을 찾아내 그 주인이 된 것이 1957년이니까 이들이 천왕봉 등정을 얼마나 서둘러 감행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삼천리탐승회 회원들은 15박16일의 엄청난 일정으로 천왕봉 등정길에 올랐다.
부산에서 진주까지 기차를 타고 가는데 하루가 걸렸고, 진주에서 다시 덕산(산청군 시천면 면사무소 소재지)까지 하루 1편 뿐인 버스를 타고 가는데 또 하루가 걸렸다.
거기서부터 이들은 한 사람이 40~50킬로그램의 무거운 등짐을 지고 중산리까지 걸어가야 했다. 지금으로 치면 3시간이 채 안 걸리는 부산~중산리가 당시엔 사흘이나 걸렸던 것이다.

중산리에서 시작되는 산길도 지금처럼 일사천리로 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등산로가 제대로 열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등짐을 벗어놓고 1~2킬로미터 전진, 등산로를 확인한 다음에 다시 돌아와 짐을 메고 올라가는 형식이었다.
당시는 등산장비도 아주 원시적인 것으로 된장단지며 간장단지에다 소금통 석유통까지 들어 있었다.
지금과 같은 인스턴트 식품이 없었으므로 장기간의 주부식과 취사도구를 모두 포함하면 짐이 많고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삼천리탐승회 회원들은 대부분 서울 사람들이어서 그들이 하나 둘 서울로 되돌아가는 바람에 곧 해체됐다.
그래서 성산은 58년 부산 산악인들로 대륙산악회를 창립했다. 그해 9월19일 대륙산악회는 성산이 리더가 되어 창립기념으로 천왕봉을 등정했는데, 10박11일의 일정이 소요됐다.
대륙산악회는 62년 제1차 지리산학술조사에 이어 64년 제2차 학술조사대에 참여, 칠선계곡과 중봉골 국골 등의 전인미답지역을 답사했다.
칠선계곡의 '대륙폭포'란 이름은 대륙산악회의 학술조사 참여 기념으로 명명돼 오늘에 이른 것이다.

성산은 61년부터 시작된 일반산악회의 지리산 등정 리더에 이어 66년에는 2박3일의 지리산 시민안내등반을 주재했고, 79년 10월12일에는 부산에서 최초로 '천왕봉 당일 등정'을 시도하여 성공했다.
이 때부터 부산에서 천왕봉 당일 등정이 일반화 된 것이다.
성산의 얘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그가 전란 이후의 지리산 천왕봉 등반사의 산 증인인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지리산 천왕봉으로 안내했고, 그래서 천왕봉이 뭇사람의 발길에 뒤덮이게 되자 그는 땅을 치며 사람들을 마구 끌어들였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통탄했다.

성산은 언제나 사람들을 이끌고 지리산을 찾은 것은 물론 아니다.
지리산에 미치다시피한 그는 직장도 팽개치고 곧잘 단독으로 찾아가고는 했다. 교통이 불편했던 64년에 그는 한번 가기에도 힘든 천왕봉을 12번이나 단독등정을 했다.
혼자 지리산을 헤매고 다니다가 도벌꾼들과 조우하여 위기일발의 아찔한 고비를 넘겼는가 하면, 63년 어느날 밤에는 순두류에서 호랑이를 만나 기절초풍한 일도 있다.

성산은 지리산을 자주 찾은 덕분으로 '지리산 산신령' 우천 허만수와 친해졌고, 전란으로 불탄 법계사 복원에 나선 손청화 보살의 총애를 받아 양아들처럼 지냈다.
57년에 세워진 법계사 초막(草幕)은 20여년 동안 지리산 등반사를 장식한 무대와도 같았다.
이 초막에서 신세를 졌던 등산 선구자들이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초막을 대신할 산장을 지었으니 그것이 곧 지금의 로타리산장이다.
(2001년 2월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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