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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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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들은 지리산을 어떻게 찾았던가?
1586년 9월, 10박11일로 천왕봉을 찾았던 양대박은 말을 타고 하인과 기생을 데리고 탐승길에 올랐다. 그는 '두류산 기행록'에 이렇게 썼다.
'노래 부르는 애춘, 아쟁 타는 수개, 피리 부는 생이를 데리고 갔는데, 이들은 모두 유람할 때 흥을 돋우는 자들이다.'
그가 말을 타고 가면 고을의 수령이 나와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주었는데, 함께 활을 쏘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했단다.

옛날 사람들은 무작정 길을 재촉하지 않았다. 용유담과 같이 경승이 빼어난 곳에선 말을 세워놓고 질펀하게 놀았다.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노래를 부르게 하여 무수히 술잔을 주고받으며 한껏 즐기다 파하였다'고 했다.
그들은 또 선비답게 그냥 유흥만 즐긴 것이 아니라 '신령들의 천년 묵은 자취, 푸른 벼랑에 남은 흔적 있네'와 같은 시를 짓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가파른 산길은 하인의 등에 업혀 오르기도 했다.

1610년 9월, 6박7일의 일정으로 천왕봉을 찾았던 박여량 역시 피리꾼 두 사람이 말 머리에서 피리를 불고 해금을 타면서 길을 떠났다.
그의 일행은 천왕봉 성모사당에 들어가 등불을 매달고 향을 피운 뒤 술잔을 돌렸다.
'악기를 연주하고, 따라온 하인과 승려에게 번갈아 일어나서 함께 춤을 추게 했다. 안국사 승려 처암과 운일의 춤사위가 가장 빼어났다.'
이런 그의 기행록을 보면 등산인지 유람인지 구분이 모호할 정도이다.

하지만 그런 호사는 기행록을 남길 정도의 관리나 선비들이 누렸을 뿐이다.
일반 민초들의 지리산 산행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천왕봉 성모사를 찾은 백성들이 해가 떨어지면 추위를 이겨내려고 낯선 사람과도 부둥켜 안았다는 것에서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지리산 주민들은 단지 지리산 자락에 산다는 이유로 엄청난 고초를 감내한 경우가 다반사였다.
보라매(海東靑)와 차소(茶所)의 존재가 그 증거가 된다.

1611년 천왕봉에 오른 유몽인은 이렇게 썼다.
'성모사당 밑에 작은 움막이 있었는데, 잣나무 잎을 엮어 비바람을 가리게 해놓았다. 승려가 이는 매를 잡는 사람들이 사는 움막이라고 했다.'
천왕봉까지 오르는 매는 힘이 좋고 재주가 빼어나다. 따라서 원근의 관청에서 쓰는 매가 대부분 여기서 잡은 것이다.
1472년 천왕봉을 찾았던 김종직도 칼날봉우리마다 설치된 매틀을 보고 사냥꾼들의 비참하고 어려운 처지를 탄식한 일이 있다.

보라매로 불리는 우리나라 매는 꿩을 사냥하는데 영악하고 날쌨다. 권력층은 잘 길들여진 보라매를 날려 꿩사냥을 하고는 했다.
그들이 꿩사냥을 즐기기 위해 지리산 자락의 주민들에게 천왕봉 등에 올라 보라매를 사로잡게 한 것이다.
<고려사>에는 원나라에 공물로 보내는 매가 매년 2천~3천마리였다고 씌어 있다.
조선시대에도 명나라에 매를 보냈다. 매를 날려 꿩을 잡는 귀족 풍습은 조선조 말기까지 이어졌다.

귀족과 권력층의 한가한 취미를 충족시키고, 심지어 대국(중국)에 바치는 진상품으로 매를 잡아야 했던 지리산 사람들이다.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은 매 사냥꾼의 천왕봉 참상을 지켜보고 다음과 같이 글을 썼다.
'그들은 눈보라를 무릅쓰고 추위와 굶주림을 참으며 이곳에서 생을 마치니, 어찌 단지 관청의 위엄이 두려워서 그러는 것일 뿐이랴. 아, 소반 위의 진귀한 음식 한 입도 안 되지만, 백성의 온갖 고통 이와 같은 줄 누가 알겠는가?"

지리산 화개동천은 신라 흥덕왕 3년(828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김대렴이 차를 처음 가져와 심은 차 시배지다.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화개동천은 차의 최고 명소가 됐다.
하지만 화개동천에 차밭이 많았기 때문에 이곳에 차소(茶所)가 설치돼 주민들은 차를 따서 조정에 공물을 바쳐야 하는 곤욕을 치렀다.
공물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주민들은 추위와 굶주림을 이겨내며 산비탈을 훑어나가야 했었다.

'하늘과 신선과 사람과 귀신이 모두 사랑하고 아끼며 신선의 살결같이 깨끗하고 황금같이 예쁜 열매를 맺으며 아름다운 덕(德)을 지닌 차나무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이곳 지리산록에 심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나무 때문에 화개 사람들은 잡초같이 짓밟히며 살았습니다.
이름 없는 화개 사람들의 애끊는 고혈과 피땀이 어린 것이 오늘의 하개차입니다.
화개가 차의 고향으로 차의 성지가 되기에는 박해받은 화개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83년 화개녹차회가 펴낸 책 '차의 성지-화개동 향기' 머랏말의 일부이다.

차소란 차를 만들어 나라에 바치는 곳으로 화개 주민의 오랜 고통의 역사를 말해준다.
천왕봉의 매 사냥꾼 움막, 그리고 화개동천의 차소는 추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매잡이나 찻잎을 따러 주민들을 이른 봄부터 산위로 내몰았다.
그들에게 비참한 고통을 안긴 대가로 특권층은 꿩사냥이며 찻잔을 잡고 희희낙락했으니, 참으로 가증스런 노릇이 아닐 수 없다.
(2001년 1월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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