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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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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등정한 에드먼드 힐러리는 "거기에 산이 있어 오른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하지만 영국 국민들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영국인이 섰다'며 '정치적인 감격'을 했다. 남극은 노르웨이의 아문젠에게, 북극은 미국의 피어리에게 뺏겼던 영국은 세계 최고봉 등정으로 손상된 자존심을 회복했다.
힐러리와 함께 올랐던 세르파 텐징도 네팔의 국민적 영웅이 됐다. 네팔인이 인도인에 지지 않는 우수성을 텐징이 입증해 준 것이라며 국민적인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지리산 천왕봉에 새해 첫날 인간 피라미드가 형성되는 것도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 만은 아닐 것이다. 천왕 일출이 특별해서라기보다 남한 육지에서 가장 높은 곳이므로 사람들이 기를 쓰고 몰려드는 것이 아닐까.
새해 첫날 일출 만이 아니다. 사시사철 천왕봉의 거대한 암괴는 사람들의 발길에 뒤덮인다.
에베레스트가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눈이 녹아 높이가 낮아지면서 매년 북동쪽으로 6~7센티미터 이동하듯이, 천왕봉도 사람들의 등쌀에 바위가 닳아 그 높이가 낮아지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다.

부산의 원로산악인 성산(成山)은 1955년 천왕봉에 처음 오른 뒤 81년 천왕봉 등정 200회 기록을 세웠다. 그의 첫 등정은 등산로도 없고, 된장독을 메고 갔을 만큼 원시장비로 나섰기 때문에 15박16일의 일정이 소요됐다.
하지만 그는 중산리까지 도로가 뚫리면서 부산에서 최초로 천왕봉 당일 시민안내등반을 해내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런데 그는 200회 등정 소감을 '감격'이 아닌 '통곡'으로 대신했다.
"천왕봉으로 사람들을 줄줄이 안내하다니, 내가 미쳤지! 죽을 죄를 저질러놓고 무릎 꿇고 사죄한들 무슨 소용인가!"

성산은 다니던 직장도 팽개치고 지리산을 찾았다. 그래서 지리산을 얼마 만큼 알았던가?
"지리산을 스무번 쯤 찾으면 이 산을 다 아는 것처럼 우쭐거린다. 그러나 지리산을 100번 또는 200번 찾는 것이 늘어나면 ' 이 산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실토하게 된다."고 했다.
2001년 1월5일자 동아일보 '인물 포커스'는 지리산을 700번 오른 정지섬(일명 정털보) 이야기를 대문짝 만큼 크게 실었다. 그 역시 누가 지리산이 어떻더냐고 물으면 "할 말은 갈수록 없어진다"고 고백했다.

(필자의 졸저 <지리산 1994년>에는 지리산 의신골에서 정털보와 필자 일행이 지리산 호랑이 문제로 격론을 벌인 얘기가 실려 있다. 필자는 그와 지리산에서 두 차례 만났는데, 여러가지 관련 얘기는 앞으로 또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천왕봉에 많은 사람들이 오르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남한 육지에서 가장 높기는 하지만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산악회마다 천왕봉을 찾는 것는 물론, 개인이나 친구, 가족 단위로 오르는 이들도 많다.
여름방학 때는 순두류의 경남자연학습원이나 장터목에서 수련대회를 하는 각급 학교 학생들까지 떼지어 오른다. 기관 단체 직장마다 단체로 오르기도 하고, 노조며 운동단체가 투쟁의지를 다진다며 무리지어 올라 천왕봉을 온통 요란한 함성과 붉은 깃발로 덮어씌우기도 한다.

여순반란의 패잔병들이 '이현상(李鉉相)부대'가 되어 지리산 문수골에 첫 발을 들여놓은 것이 1948년 10월25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5개월 앞인 48년 5월7일 남도부(南道富)의 함양군 야산대가 천왕봉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7년 동안에 걸친 기나긴 빨치산 투쟁의 서막을 장식했다.
함양 산청 하동의 경찰과 우익청년단체들이 무장봉기를 제압하고자 천왕봉을 에워쌌다. 하지만 쌍방은 싸우는 시늉만 한 채 일과성 해프닝으로 끝냈다.
단지 천왕봉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또 제압했다는 '상징물'만 거둔 것이다.

"천왕봉에 다녀왔노라"는 말을 하고픈 그 이유로 천왕봉을 찾는 이들도 많다.
천왕봉의 인파 홍수 현상은 옛날도 마찬가지였다.
1610년 9월 천왕봉에 올랐던 박여량(朴汝樑)은 '노역을 피해 숨어든 무리와 복을 비는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봉우리와 골짜기에 낟알이 어지리이 널려 있는데도, 나라에서 금할 수 없으니 탄식할 일이다'고 썼다.
또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에서 '천왕봉에는 늦봄부터 가을까지 6~7개월 동안 영호남과 경기지방에서 농부 등 남녀 무리가 얼마나 많이 몰려드는지, 풍기문란과 실농위기를 맞을 만큼 심각하다'고 개탄했다.

천왕봉은 하루에도 기상변화가 죽끓듯 하지만, 해가 지면 한여름에도 칼날같이 매서운 추위를 안긴다.
남녀 기도객들은 해가 지면 잠잘 곳이 없어 바위틈에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당시엔 지금처럼 텐트나 질 좋은 방한복도 없던 터라 추위를 못 이겨 생면부지의 남녀도 서로 부둥켜안고 몸을 부벼야 했다.
자연히 남녀간의 풍기문란이 극성일 수밖에 없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은 농사일까지 버려두고 왜 그처럼 천왕봉에 기를 쓰며 올라갔을까?
모르는 남녀가 서로 껴안는 그 황홀한 순간을 즐기려고 눈 딱 감고 천왕봉으로, 천왕봉으로 갔을지도 모르겠다.
(2001년 1월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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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허바다 2004.05.02 20:37
    전 그러죠... 동남쪽을 바라보면서 "나 여기에 다시 왔다..."
    고향 떠나 맘에도 없는 곳에서 아둥바둥 살면서
    먼 우주로 떠나가고 있는 그 시절 그때의 그 모든 빛들을
    뒤따라 가고파 그곳에 올라 그러죠...
  • ?
    다감 2004.05.04 12:50
    전 이렇쵸.. 누군가 갔다와보니 좋더라..
    그러니 얼마나 좋은가 싶어 나도 한번 가보자..
    그러기를 수차례.. 이제는 일상이 되어 버려 오르는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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