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육지에서 가장 높은 곳은 지리산 천왕봉이다.
그럼 남한 육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샘터는? 당연히 천왕샘이다. 천왕봉 남쪽을 지탱하는 거대한 암괴 아래 이 천왕샘이 있다.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으로 오르는 이들에게 정상 등정 마지막 한 고비를 남겨놓고 감로수를 제공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이 턱에 닿은 채 오르던 등산객에게 천왕샘이란 '하늘의 샘'처럼 고마운 존재이다.
겨울철에는 얼어붙고, 가뭄이 심할 때는 물이 나오지 않는 이 천왕샘을 진짜 샘으로 볼 수 있느냐는 이론이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사시사철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것은 아니지만, 봄~가을철에 걸쳐 달고 시원한 석간수를 제공해주는 것만은 틀림없다.
이 천왕샘이 생겨난 것은 지난 1977년 8월2일이다. 남명 조식선생의 13대손인 조재영(曺在英)이 석공을 동원, 사흘 동안 작업한 끝에 천왕샘을 탄생시킨 것이다.
조재영은 77년 7월에 착공하여 78년 10월26일 완공한 지리산 유일의 민간산장인 로타리산장을 건립 당시부터 관리인으로 지켜온 인물로 유명하다.
그보다 지리산 주능선, 특히 천왕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그이이다. 그의 선조 남명선생은 "하늘이 울어도 천왕봉은 울리지 않는다"고 했거니와, 덕산 두류산악회 창립부회장 조재영도 지난 73년부터 매년 천왕봉에서 '천왕제(天王祭)'를 열어오고 있다.
주능선 서쪽 영봉 노고단이 있는 구례 쪽에선 우종수란 걸출한 산악인이 지리산에서 선구자적 업적을 쌓게 된다. 그이는 연하반산악회(이후 지리산산악회로 개칭)를 창립, 주능선 등산로 개척, 등산지도 제작, 지리산 국립공원 지정운동 등 많은 일을 했다.
주능선 동쪽 천왕봉이 있는 산청 쪽에서는 조재영이 초기 지리산 산악운동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로타리산장 건립의 산파역을 맡은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우종수는 산악회를 결성하여 단체로 산악운동을 했다.
하지만 조재영은 72년 덕산에서 면단위 두류산악회를 창립했지만, 그는 천왕봉 평화제를 제외하고는 주로 개인적으로 활동했다.
그것은 그가 국립공원 관리공단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지리산관리사무소 직원으로 일한 때문이기도 하다.
조재영은 남명 13대 손이라는 긍지와 선비 기질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래서 그의 지리산 사랑도 학구적인 접근이 특징이다.
지리산은 우종수의 연하반산악회와 이화여대 김현규교수(한국산악회) 등의 노력으로 1967년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됐다.
당시에는 관할 도별로 지리산관리사무소를 두고 운영했다. 조재영은 경남 관할 구역 지리산관리사무소 직원으로 근무했다.
그가 처음으로 맡게 된 일은 지리산의 산림자원 보호였다. 그것은 곧 당시 제석봉 일원과 대성골 일대에 극심했던 도벌꾼들을 단속하는 아주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도벌 현장을 급습하고 단속하려면 도벌꾼들이 도끼와 톱, 칼로 공격을 해오기 일쑤였다. 자칫하면 귀신도 모르게 죽을 판이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창(槍)을 휴대하고 다녔다. 도벌 단속이 아니라 마치 전투하는 것 같았다."
조재영은 60년대 후반 지리산의 마지막 도벌꾼들을 몰아내는 일에 신명을 바쳤다.
71년 세석산장이 처음으로 건립되자 그는 관리인으로 3년 동안 근무하며 우천 등과 깊은 교분을 쌓았다.
그 이후 조재영은 주로 법계사 복원 불사를 벌이던 손청화(孫淸華) 보살의 초막에 머물렀다.
당시 이 초막은 천왕봉 토굴산장 김순용노인과 우천 허만수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법계사 초막에는 또한 부산의 산악선구자들인 신업재, 김재문, 김용기, 김규태, 오점량, 한형석, 김택진, 이영도 등이 천왕봉 등정길에 자주 찾았다.
조재영은 이들과 초막에서 교분을 쌓은 것이 인연이 되어 로타리산장 건립 꿈을 이뤘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조재영은 천왕봉 초기 등반사에 큰 업적을 쌓게 된다. 천왕봉이 올려다보이는 덕산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지리산에 안겨 자란 그에게는 천직과도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단지 산을 낭만으로만 찾지는 않았다. 한학에 정통한 그는 문창대 등 잘못 알려진 곳들을 바로잡고, 우종수의 연하반산악회가 봉우리와 샘터 이름을 나름대로 명명한 것에 대해 이론을 제기하는 등 많은 일에 열정을 보였다.
우종수의 연하반산악회는 명선봉 샘터를 '연하천'으로 지은데 이어 장터목~촛대봉 사이의 삼신봉을 '연하봉'이란 이름으로 명명하고, '연하선경'을 지리산 8경의 하나로 선정했다.
하지만 조재영은 연하봉의 원래 이름은 삼신봉이므로 잘못된 이름이라고 했다. 또한 연하반산악회 대원이 딸을 낳은 것을 기려 붙인 장터목의 '산희(山姬)샘'도 '장터목샘'이란 원래 이름이 있었으므로 본명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리산의 일부 봉우리나 샘터, 폭포, 징담 등의 명칭은 처음 등산로를 개척한 산악회에서 명명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원래 있었던 이름은 살려야 한다는 것이 조재영의 지론이다.
그의 신념을 뒷받침해준 것이 그의 밝은 한학이었다.
또한 그의 혈관에 13대 선조 남명선생의 선비정신이 흐르고 있는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조재영이 늘 가까이 했던 거대한 암괴의 천왕봉은 언제나 근엄하고 엄격한 모습이다.
(2001년 9월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