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지리산

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통신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조회 수 1314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우천 허만수가 지리산에 입산한 것은 전란 직후인 1950년대 중반으로 짐작된다.
빨치산과 군경토벌대의 격전이 벌어졌던 시기에 그는 경남 의령의 자굴산에서 보냈다. 산정 가까운 곳에 땅굴을 파고 풀을 바닥에 깔고 원시인(?)처럼 살았다.
그가 세석고원에 처음 정착했을 때도 자굴산에서처럼 원시인으로 살았다고 한다. 훨씬 뒤에 그는 이 잔돌평전에서 그래도 사람이 묵을 수 있는 움막을 한 채 마련했다.

'세석산장이 없을 때는 그 자리에 움막같은 토담집 한 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시골집의 헛간 같았던 그곳이 허만수의 보금자리였다. 그는 그 토담집에서 흘러가는 구름, 피고 지는 고산식물들의 꽃, 속삭이는 솔바람을 벗삼아 살았다. 인정 많은 등산객이라도 찾아들지 않으면 나무열매와 산나물로 배를 채우며 살았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서 이 생활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말했었다.' (이종길 지음 <지리 영봉>)

산짐승처럼 야생했다는 그의 초막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961년 여름방학 때 광주 조선대학교 약학과 1학년 학생 13명이 지도교수 안학수 박사 인솔로 약초 채집을 위해 세석고원에 올랐다.
이들이 묵은 곳이 우천의 그 초막이었다.
당시 조선대 학생으로 이 약초 채집에 참석했던 부산의 노금모는 그 초막의 모습을 찍은 흑백사진을 간직해오다 필자에게 제공했다. 풀과 나무와 흙으로 지은 초라한 움막이다. 하지만 이 집이 대피소 역할도 했다.

1961년 8월1일 지리산 일원에 태풍 '너러'호가 강습했다. 부산의 산악인 김경렬 등 일행 24명은 산중에서 탈출을 시도했으나 예닐곱 명이 낙오돼 수색대가 출동한 소동 끝에 가까스로 우천의 초막으로 대피시켰다.
그들은 사흘 밤낮을 그곳에 갇혀 있는 동안 2명의 환자가 발생했다.
환자 후송이 불가피하여 그들은 왼쪽 능선을 타고 내려오다 계곡을 만나 우천의 도움으로 자일을 설치하고 간신히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우천은 지리산에서 100명이 넘는 조난자 생명을 구조했고, 사체를 지고 산을 내려오는 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또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칠선계곡과 한신계곡 등 6개 비경 코스를 열었으며, 등산로 곳곳에 샘을 파고 보수 관리를 했다. 폭우로 유실된 산길은 나무와 흙, 돌로 더 좋게 고쳤다. 그는 통천문(通天門)에 해마다 낡은 사다리를 치우고 다시 새로운 나무다리를 만들어 놓았다.'(성락건 지음 <남녘의 산>)

우천은 1,000번도 넘게 천왕봉에 올라 지리산 정기에 흠뻑 취했으며, 지리산의 고요와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그는 지리산과 친구의 관계를 넘어 지리산의 일부로서 조화를 이루었으며, 끝내는 지리산과 합일됨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타고난 체력으로 산길을 날아다니다시피 했고, 아침에 세석고원을 출발하여 걸어서 진주로 나가 볼일을 본 뒤 그날 자정 안에 걸어서 세석의 움막에 돌아오고는 했다.

하지만 우천의 이런 신화적인 원시인 생활에 대해서는 일부의 이론도 없지 않다.
그는 의령 자굴산에서 곧장 세석고원으로 올라 나무열매와 산나물로 산중생활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세석고원에 오르기 전에 의신마을 쪽에서 상당 기간 벌목을 하는 일을 품삯을 받고 했다고 한다.
또한 우천은 의식주를 법계사 초막 손보살과 곡점리 주막집 안주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해결했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중산리 못 미처 거림골과 갈림길목에 위치한 곡점리는 당시 지리산 통로의 요충이었다.
이곳에 지성적인 용모와 인정이 넘치는 한 중년여성이 국밥집을 열고 있었는데, 홀로 산중생활을 하는 잘생긴 남자 우천에게 호의를 가지고 밥과 술을 한껏 제공했다고 한다.
손보살의 법계사 초막 또한 세석고원의 우천과 천왕봉 토굴산장의 김순용노인이 자기집처럼 먹고 잠자며 이용했다는 것이 부산 산악인들의 증언이기도 하다.

우천은 자기가 좋아하는 칠선계곡에서 아무도 모르게 증발할 것이라고 버릇처럼 말해왔다.
하지만 그의 만년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은 상당한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다.
"말년에는 밥은 입에도 대지 않고 술만 마셨지. 하루 종일 술에 취해 있는 모습이 폐인과 다름없어 안타까웠어. 그가 나중에는 일부 난폭한 등산객에게 구타를 당하는 일도 있었다니까."
노고단에서 곧잘 세석의 우천을 찾았던 함태식의 말이다.

지리산 일대에서 도벌꾼 단속활동을 벌였던 로타리산장 조재영 또한 같은 맥락에서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 당시엔 지리산이 아주 거칠었다. 도벌꾼들이 사람들에게 도끼를 휘두르는가 하면, 산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오른 젊은이들이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다. 세석고원에선 근래까지 칼부림 사건이 발생하고는 하지 않은가. 우천의 증발에 대한 미스터리도 그런 의문에서 추적돼야 제대로 풀릴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근래 '지리산의 달인' 성락건이 칠선계곡이 아닌, 영신대 일원을 샅샅이 뒤지며 우천의 흔적을 찾았던 것은 우천의 지고한 정신세계가 지리산과의 영원한 합일을 이루었을 것으로 믿는 데서 비롯된 듯하다.
하지만 분명한 하나의 사실은 우천이 영원히 증발한 미스터리, 그 진실은 아직도 베일에 가려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천의 신화'는 지리산과 함께 영생할 것이다.
(2001년 9월13일)

  1. No Image

    영신대(靈神臺)는 어디에?(2)

    지리산 최고의 경승지이자 기도처인 영신대를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널리 알린 사람은 '지리산 박사' 김경렬옹이다. 그이는 만주에서 통신사 기자로 지내다 해방 이후 부산에서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한학에 밝은 그이는 특히 옛 문헌을 바탕으로 지리산의 인...
    Date2004.05.19 By최화수 Reply0 Views1905
    Read More
  2. No Image

    영신대(靈神臺)는 어디에?(1)

    대성계곡 등산로의 산행 기점은 의신마을과 그 2킬로미터 아래 있는 대성교(大成橋) 두 곳이다. 따로 시작된 두 길이 얼마 뒤 하나로 마주치는데, 바로 그곳에 옛 능인사(能仁寺) 터가 있다. 당장이라도 집을 세울 수 있을 만큼 넓고 편편한 터에 샘도 있다. ...
    Date2004.05.19 By최화수 Reply0 Views1940
    Read More
  3. No Image

    주능선의 그리운 얼굴들(10)

    지리산에 대한 기행록은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등 옛날의 관리나 선비들에 의해 상당수 전해온다. 그런데 6.25를 전후하여 동족상쟁의 처절한 상채기를 남긴 이후의 지리산 이야기는 누가 가장 먼저, 또 가장 많이 집중적으로 기록했을까? 그 주인공은 ...
    Date2004.05.12 By최화수 Reply2 Views1618
    Read More
  4. No Image

    주능선의 그리운 얼굴들(9)

    남한 육지에서 가장 높은 곳은 지리산 천왕봉이다. 그럼 남한 육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샘터는? 당연히 천왕샘이다. 천왕봉 남쪽을 지탱하는 거대한 암괴 아래 이 천왕샘이 있다.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으로 오르는 이들에게 정상 등...
    Date2004.05.12 By최화수 Reply0 Views1503
    Read More
  5. No Image

    주능선의 그리운 얼굴들(8)

    해발 1,750미터 장터목(場基頂)은 주능선 가운데 가장 번잡한 곳의 하나이다. 지난날 산청군 시천 사람들과 함양군 마천 사람들이 이곳까지 올라 물물교환을 했던 장터가 섰다고 하여 '장터목'으로 불리고 있다. 등산객들이 이곳까지 걸어서 오르는 데도 힘들...
    Date2004.05.12 By최화수 Reply1 Views1304
    Read More
  6. No Image

    주능선의 그리운 얼굴들(7)

    우천 허만수가 지리산에 입산한 것은 전란 직후인 1950년대 중반으로 짐작된다. 빨치산과 군경토벌대의 격전이 벌어졌던 시기에 그는 경남 의령의 자굴산에서 보냈다. 산정 가까운 곳에 땅굴을 파고 풀을 바닥에 깔고 원시인(?)처럼 살았다. 그가 세석고원에 ...
    Date2004.05.12 By최화수 Reply0 Views1314
    Read More
  7. No Image

    주능선의 그리운 얼굴들(6)

    지난 8월31일 필자는 'parksk2017'이란 아이디만을 밝힌 한 '산악선배'로부터 아주 반가운 e메일 한 통을 받았다. 지난 70년대 지리산 주능선을 답파했던 이 분은 당시의 산행 상황을 알려주는 글을 보내온 것이다. 그 때의 등산장비와 산꾼들의 편모가 여간 ...
    Date2004.05.12 By최화수 Reply0 Views1436
    Read More
  8. No Image

    주능선의 그리운 얼굴들(5)

    덕평봉(1521미터) 정상 조금 아래편에 사철 달고 시원한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다. 옛날에 선비들이 이 샘물을 마시면서 공부를 했다고 하여 '선비샘'으로 불린다. 이 샘에는 거짓말 같은 전설도 있다. 샘 아래편의 상덕평(上德平)마을에서 평생 가난에 눌려 ...
    Date2004.05.12 By최화수 Reply2 Views1273
    Read More
  9. No Image

    주능선의 그리운 얼굴들(4)

    9월2일 의신마을에서 빗점골~명선봉~벽소령을 돌아오는 '지리산 통신' 9월 정기산행이 있었다. 8월 정기산행 때 발목을 접질렀던 필자는 '탐승조'로 산행에는 참가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어찌어찌하다 산행팀을 끝까지 따라가게 됐다. 벽소령에 도착했...
    Date2004.05.12 By최화수 Reply0 Views1196
    Read More
  10. No Image

    주능선의 그리운 얼굴들(3)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주능선상의 노점은 1424봉, 노루목, 토끼봉, 화개벽소령, 마천벽소령, 선비샘, 천왕봉에 있었다. 이 가운데 천왕봉은 등정 기념메달에 이름을 새겨주는 것만 했고, 나머지는 커피와 약차 등 음료를 팔았다. 이들 노점상은 일...
    Date2004.05.12 By최화수 Reply1 Views1481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 30 Next
/ 30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