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31일 필자는 'parksk2017'이란 아이디만을 밝힌 한 '산악선배'로부터 아주 반가운 e메일 한 통을 받았다. 지난 70년대 지리산 주능선을 답파했던 이 분은 당시의 산행 상황을 알려주는 글을 보내온 것이다.
그 때의 등산장비와 산꾼들의 편모가 여간 흥미롭지 않다. 또한 무엇보다 노고단에서 함태식을, 세석고원에선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를 만났던 얘기가 씌어 있었다.
지난날의 지리산 주능선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그 메일 전문을 여기에 옮겨본다.
[선생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저의 젊은 시절(70년대 초반) 추억이 떠오릅니다.
등산장비가 엄청 귀했던 시절이었죠.
산에 가기 위해서는 아랫동네, 윗동네 군대 갔다온 선배들을 모조리 찾아다니며 막걸리를 대접하고 군용장비 빌리러 다니고, 어떻게 하다 운이 좋아 A형 군용텐트 한 동 빌릴라치면 지리산은 저의 곁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지금의 배낭과 비교해보면 배낭이라고 할 수도 없는 뻣뻣한 광목천의 뚜껑 없는 배낭, 등산화 대신 군용워커, 탄띠에 수통, 거기에다 대검까지 한 자루 떡하니 차고 나면 눈에 뵈는 게 없었지요.
겁도 없이 싸돌아다니다 역전 TMO 헌병들에게 연행되어 장비 압수당하고 빠따 맞은 일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습니다.
당시 지리산 종주를 하면서도 젊은이들 사이에 통기타는 필수품이었습니다.
노고단에서 야영하며 술에 취해 고성방가하다 산장지기에게 야단맞고 쪽팔려서 새벽녘 도망치다시피 노고단을 떠났던 생각, 세석에서도 그 버릇은 변하지 않고 재발하여 산장지기와 늦은밤까지 싸웠던 생각이 납니다.
지금에 와서 보니 그 분이 우천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천왕봉 등정 후 도착한 중산리는 지금의 중산리와는 상상을 할 수도 없고, 진주까지 나오는 시외버스는 왜 그렇게 털털거리는지...!
버스 안 창가에 펼쳐지는 풍경이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정겹습니다.
그 당시에도 물레방아간은 반촌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물품이었죠... 쉽게 잊혀지지 않는 추억입니다.]
이 메일에서 '세석산장에서 그 버릇은 변하지 않고 재발하여 산장지기와 함께 늦은 밤까지 싸웠던 생각이 납니다. 지금에 와서 보니 그 분이 우천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데요' 라는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석고원에서 30년 가까이 정착했던 우천이 신화적인 업적을 남기고 홀연히 종적을 감춘 것은 76년 6월이었다.
노고단산장과 함께 세석산장이 들어선 것은 71년이었다. 그 때까지는 그 자리에 우천의 작은 토담집이 있었다.
이 분이 세석에서 만난 그이가 우천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는 지난 8월 초순 삼신봉 자락인 원묵계리에 '나무 달마 살래'를 지어 거처를 옮긴 '지리산의 달인' 성락건으로부터 뜻밖의 얘기를 듣고 다소 얼떨떨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우천 허만수의 시신을 찾기 위해 세석고원 옆 '영신대'에 텐트를 쳐놓고 1주일 동안 자일 등에 의지하여 주변을 마치 빗금을 긋듯이 샅샅이 뒤졌다고 하지 않겠는가.
암벽 아래의 여러 암굴들을 찾아내 그 안을 남김없이 살펴보았다고 했다.
그것은 우천이 칠선계곡에서 증발했을 것이란 지금까지의 통설을 뒤엎는 것이어서 놀랍기도 했다.
사실 우천에 대한 미스터리는 너무나 많다. 하지만 그보다 지리산 주능선에서 증발한 그이만큼 신화적인 인물이 없을 것이다.
그는 일찍 일본에 유학, '동정클럽'이란 등산반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등산활동을 했다. 동정클럽이란 이름은 산을 즐기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산에 미쳐 있는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부친이 그를 일시 귀국시켜 강제결혼을 시켰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해방을 맞아 부인과 딸 셋을 데리고 귀국했다.
그는 진주에서 서점을 냈지만, 곧 그 서점도 가족도 팽개치고 자굴산을 거쳐 세석고원에 올라 움막을 짓고 원시인처럼 생활한다. 그의 나이 33세 때였다.
우천 허만수는 어떤 사람이며, 지리산에서 무엇을 했는가? 그의 얘기는 여러 책 등에 이미 잘 소개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이를 잊지 못하는 진주의 산악인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추모비 비문에 그 모두가 가장 잘 담겨 있다. 중산리 두류교 옆 천왕봉 등산구의 '우천 허만수 추모비' 뒷면에 새겨놓은 글은 다음과 같다. 이해하기 쉽도록 필요한 부분만 옮기면 다음과 같다.
[산을 사랑했기에 산에 들어와 산을 가꾸며 산에 오르는 이의 길잡이가 되어 살다 산의 품에 안긴 이가 있다. 사람들이 일러 산사람이라 했던 그 분 우천 허만수님은 1916년 진주시 옥봉동 태생으로 일본 교또전문학교를 졸업했으며, 재학시절 이미 산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열정이 유달랐던 분이다.
님은 산살이의 꿈을 이루고자 30여세에 지리산에 들어와 가없는 신비에 기대 지내며 산을 찾는 이를 위해 등산지도를 만들어 나눠주기도 하고, 대피소나 이정표시판을 세우기도 하고, 인명구조에 필요한 데는 다리를 놓는 등 자연을 진실로 알고 사랑하는 이 만이 해낼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의 길을 개척해 보였다.
조난자를 찾아헤매기 20여년, 조난 직전에 사람들을 구출하거나 목숨을 잃은 이의 시신을 찾아 집으로 돌려보내고, 부상당한 사람들을 안전하게 옮겨 치료한 일 헤아릴 수 없으며, 지리산 발치의 고아들에게 식량을 대어주고, 걸인들에게는 노자를 보태어준 일 또한 헤아릴 수 없으니, 위대한 자연에 위대한 품성 있음을 미루어 알게 되지 않는가.
님은 평소에 "변함없는 산의 존엄성은 우리로 하여금 바른 인생관을 낳게 해준다"고 말한대로 몸에 밴 산악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니, 풀 한포기 돌 하나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워한 일이나, 산짐승을 잡아가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되돌려받아 방생 또는 매장한 일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이랴. 님은 1976년 6월 홀연히 산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으니, 지리 영봉 그 천고의 신비에 하나로 통했음인가. 가까운 이들과 따님 덕임의 말을 들으면 숨을 거둔 곳이 칠선계곡일 것이라는 바, 마지막 님의 모습이 6월 계곡의 철쭉빛으로 피어오르는 듯하다. 이에 님의 정신과 행적을 잊지 않고 본받고자 이 자리 돌 하나 세워 그 뜻을 이어가려 하는 바이다.]
어느 하루 없이 수많은 등산객들이 우천 허만수의 추모비 앞을 지나가고 있다. 그 가운데 과연 몇 사람이 그의 숭고한 지리산 사랑의 참뜻을 생각이라도 해보는 것일까?
또 돌 하나, 풀 한 포기조차 아끼고 사랑할 것인가?
우천은 생전에 자신이 좋아하는 칠선계곡에서 바람처럼 이끼처럼 물처럼 모습을 감출 테니 찾지 말란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것은 곧 그이의 영혼이 지리산에서 영생한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성락건은 '지리산의 심장'이란 영신대에서 우천의 사체 흔적을 찾는 작업을 벌였다. 그것은 '우천의 미스터리'에 대한 추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음을 뜻한다.
(2001년 9월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