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끔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역류하고 싶을 때가 있다. 세월을 거슬러 옛날로 돌아가는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옛날의 자취가 어린 곳들을 찾는다.
이런 마음으로 지리산을 찾아보고 싶다면 '단구성(丹丘城)'의 땅 산청군 단성면 깊숙이 숨겨져 있는 청계(淸溪)계곡의 단속사(斷俗寺) 터 일원이 안성맞춤일 것이다.
청계계곡 일원을 찾아보는 것은 천왕봉에 오르는 것보다 더욱 값진 시간일 수 있다.
단성에 자리한 면화시배지에서 덕산으로 이어진 20번 국도를 따라 3킬로미터만 가면 40채의 기와집들이 고졸한 멋을 풍기는 남사(南沙)마을을 만난다.
청계계곡 들머리에 자리하면서 고려 때는 왕비를, 조선시대는 영의정과 의병장을, 그리고 일제 때는 독립투사 등을 배출했고, 향약(鄕約)인 '남사동안(南沙洞案)'과 조선 태조 교서(敎書)를 간직하고 있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다소 과장이 심한 솟을 대문 등 기와집들과 흙돌담길의 정취가 시간여행의 분위기를 띄워준다.
이 남사마을을 지나 1킬로미터 가량 가면 바른편으로 호암교란 작은 교량이 있는데, 2차선 포장도로가 이어져 있다.
20번 국도에서 보면 야트막한 산이 가로막고 있어 그 쪽으로 도로를 낸 것이 이해가 안 갈 정도다. 근년에 이곳의 도로를 확장하기까지는 그 안에 마을이 있으리라고 생각조차 되지 않았다. 지리산의 전형적인 지형 특징인 '병 주둥이' 입구이기 때문이다.
지난날에는 어쩌다 소달구지나 한가롭게 드나들고는 하던 그 안쪽 깊숙이 청계계곡이 길게 열려 있다.
'병 주둥이' 안으로 들어서면 꽤 넓은 들판이 열리고 큰 마을이 자리한다.
입석(立石)리, 곧 선사시대에 이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말해주는 마을이다. 입석초등학교 교정에 서있는 높이 2미터의 선돌이 청계계곡에서의 오랜 삶의 역사를 말해준다.
웅석봉에서 흘러내린 지맥이 좁다란 들판을 사이에 두고 평행선을 그릴 뿐 계곡은 아직도 그 들판 사이로 낮게 잠겨 있을 뿐이다.
자동차로 내달리면 청계계곡의 입구를 놓쳐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니까 답사는 걸어서 다녀야 한다.
입석마을 다음으로 마주치는 마을, 용두리에서는 정말 자동차에서 내려야 한다.
이 마을에서부터 한동안 계곡을 따라 걸어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용두리에서 만나는 계곡은 처음에는 너무 평범하여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1킬로미터 가량 거슬러 오르면 계곡 옆 암벽들이 심상찮은(?) 느낌을 안겨준다.
도로가 나기 전에는 이 계곡을 따라 길이 열려 있었을 것이고, 옛 선인들은 갑자기 나타난 좌우의 거대한 직벽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았을 터이다.
'계곡에 들어서니 바위를 깎은 면에 '廣齊암門'(광제암문, 주=암자는 品자 아래 山자를 받쳐쓴 글자임)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글자의 획이 힘차고 예스러웠다. 세상에서는 최고운(최치원)의 글씨라 한다'
-1489년 김일손이 '속두류록'에 기록한 이 대목이 바로 이곳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 '광제암문' 각자를 꼭 찾아보아야 한다.
바로 단속사(斷俗寺) 산문(山門)인 때문이다.
이 석벽은 단속사로 들어가는 천연 석문으로 절의 규모를 이해하려면 필수 코스로 찾아야 한다.
그런데 필자는 '광제암문' 각자를 지난 1월6일 처음으로 찾아냈다.
그 사이 단속사지를 여러 차례 드나들었지만 절터만 밟았을 뿐이었다. 고작 절터에 남아있는 동, 서탑과 당간지주, 정당매를 돌아보고 단속사 어쩌고 하는 글을 썼으니 부끄러웠다.
사찰의 면모를 이해하려면 산문부터 제대로 찾아보는 것이 순서다.
그런데 늦게 찾은 벌을 내린 것일까. 필자는 직벽 일대를 샅샅이 살펴보고도 찾지 못해 용두리로 되돌아갔다. 마을사람에게 확인한 뒤 두번째만에 찾아냈다.
단속사는 신도들이 이 광제암문에서 짚신을 갈아신고 절을 한바퀴 돌아나오면 짚신이 다 닳았을 정도로 규모가 장대했다고 한다.
또 아침 저녁으로 쌀을 씻은 물이 10리 밖 냇물에까지 뿌옇게 미쳤다 할 정도로 수많은 민초들이 찾아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치원이 썼다는 '광제암문'이란 글자체가 그이의 다른 글씨와 전혀 닮지 않았다.
'광제암문' 각자가 최고운 글씨라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은 잘 못인 듯하다.
고려 성종 14년(905년) 단속사 스님이 썼다는 설이 맞을 듯하다.
광제암문에서 2킬로미터를 더 가면 단속사다.
웅석봉에서 흘러나온 옥녀봉 아래 청계계곡을 끼고 자리한 방대한 규모의 대사찰 단속사, 이 사찰이 어쩌다 탑과 당간지주만 남긴 채 사라진 것일까?
아니, 절터마저 '탑동'이란 마을로 변해버린 것일까?
그보다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단속사(斷俗寺)란 절 이름이다.
산문(山門)에 드는 것 자체가 속세와 인연을 끊은 것을 뜻하는데, 절 이름까지 그렇게 지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 옛날의 단속사로 시간여행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2002년 1월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