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서회(韓國山書會)'의 회지 <山書> 통권 제12호(2001년 11월10일 발행)에 실린 손경석님의 '지리산의 터줏대감' 내용 일부를 여기에 옮겨 싣는다. 지리산 초기 등반사와 역대 터줏대감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글이다.
필자의 졸저 <지리산 365일>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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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산에는 내노라 하는 터줏대감이 있게 마련이다.
스스로가 자칭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그 산의 그 사람'이란 한 산에 대해 독특한 임자가 있기 마련이다.
무슨 산의 주인이라는 것은 아니고, 유독 그 산에 매료되어 한눈 팔지 않고 한 산에 몰입한 전문가 산악인이 있게 마련이다.
가까운 예로 서울 북한산 인수봉은 작고한 변완철 뺑코가 터줏대감이고, 또 어떤 산은 누구 하듯 산악계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산의 터줏대감을 말하는 거다.
지리산에도 분명 터줏대감이 있었는데, 이것은 50여년 전 광복 직후로 거슬러 올라가서 따져보아야 할 형편이다...
1945년 한국산악회가 설립되고 다음 해에는 스키협회도 창설되었다.
당시엔 십상 산악인이 스키인이었고, 스키는 전문적인 경기 스키가 아닌 겨울등산의 수단으로,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스키를 할 수 있어야 했던 시절이다.
산악회, 스키협회 중심인물은 겹치기였고, 스키 알피니즘은 당연한 것이고, 겨울산에서 스키 활용은 기본이었다.
1947년 겨울, 1946년 12월에서 1947년 1월에 이어지는 시기에 적설기 등산의 이름으로 행사가 마련되었다.
대상은 지리산 노고단, 이름하여 광복후의 첫 겨울산행겸 스키대회. 참가선수는 모두가 내노라하는 산악인들...
노고단 사면엔 큰 눈이 없었다. 선수 임원 무두가 경기장을 정비하고 대회를 치렀지만, 이것은 대회라기 보다 친목행사 같았다.
대회가 끝나자 지리산 종주에 목적이 있던 회원들이 모였다.
김정태, 신업재, 이재수, 고희성 외 2명이었다.
이 때만 해도 노고단에서 임걸령 가는 길은 숲속을 헤쳐가는 스키등반이었다. 이 일대는 옛 경성제대 연습림이었고, 설화 핀 수목의 원시림이었다.
3박4일 일정으로 천왕봉 지리산 정수리에 올랐을 때 동태같이 언 천막과 장비들이 키스링 색 위에서 온몸을 짓누르고,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기 힘든 배낭 무게에 비명을 지를 형편이었다.
지리산 등반은 광복후 스키 알피니즘의 첫 무대였고, 장엄한 산릉에 압도되어 남한의 명산이 지리산으로 압축되었다.
이로부터 한국산악회 초대 부산지부장 신업재(고인)씨는 지리산 터줏대감으로 정착한다.
그는 주말이면 지리산에 있었고, 지리산을 올라가기 위해 진주에서, 남원에서, 구례에서 동서남북에서 시발하는 여러 등산코스를 섭렵했다.
그래서 부산 경남지부의 산은 지리산이었고, 신업재씨는 지리산 산자락에 잊지 못할 체취를 남겼다.
(필자 주=신업재씨는 부산에서 의사로 활동하며 지리산 초기등반운동을 이끌고, 로타리산장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6.25전쟁 때 스키협회장을 맡으면서 지리산은 남행수씨가 터줏대감 자리를 이어받는다.
남씨는 부산지부 회원이기보다 본부회원으로 적설기 한라산 등반에서 생환한 알피니스트였다 (후에 경남지부장 역임).
심한 동상을 입고 발을 절단하게 된 그는 서울을 떠나 마산에 정착한다...
유난히 피아골과 뱀사골을 사랑한 그는 지리산 남부능선 초등을 이루고 60년말 하이킹 시리즈 <지리산>편 저자로 집필한다.
마산 무학산과 지리산이 남행수씨의 전부였다.
70년대에 와서 구례의 우종수씨가 거주지를 중심으로 지리산에 몰두한다. 특히 만복대를 비롯한 지리산 서부지역에는 그의 발자취가 곳곳에 있다.
우종수하면 지리산이요, 지리산의 제일인자로서 터줏대감 3대를 세습(?)하는 격이 되었다.
이 무렵 지리산에 산장 건립이 시작되고, 함태식씨는 노고단산장의 대감이 되어 산상 터줏대감임을 과시했다.
각급 학교 산악부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지방에도 각종 산악클럽이 창설되어 지리산은 이들의 메카가 된다.
지리산은 부산 마산 진주 등지의 산악인들의 무대일 뿐아니라 전국 산악인들이 여러 형태의 등반 대상으로 찾는 산중의 산으로 부각되어 갔다.
이 때 부산의 최화수('우리들의 산' 발행인)씨가 <지리산 365일>의 명저를 발간했다. 그것은 지리산에 관한 문화인물과 자연, 사람, 민속과 과학의 총체적인 학술서요 산악서였다.
이제 지리산은 터줏대감의 독무대에서, 온 국민이 터줏대감이 되는 산이 되었고, 365일의 산이 된 것이다.(필자 주=<지리산 365일>은 국제신문에 매일 연재, 225회까지 계속됐던 것 그대로를 1990년부터 도서출판 다나에서 1~4권에 담아 것임)
<지리산 365일>은 2권, 3권, 4권으로 이어지면서 속속들이 지리산의 구석구석까지 규명해 나갔다.
속곳 속에서 더욱 나아가 오장육부의 치부까지도 밝혀갔다.
그것은 또한 반작용으로 개발의 미명하에 발기발기 찢기는 지리산이 되어 갔다.
원시림과 대낮에도 무섭던 숲이 사라져 가고, 비경의 지리산은 정수리까지 노출되는 알몸의 지리산으로...변해갔다.
터줏대감 용자들의 옛 이야기는 보부상 짐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낭만 깃든 노스탈지아로만 남는다.
(후략)]
(2002년 1월8일)
만나서 구증을하신 자료들이기에 더욱고맙고 감사드리며
읽고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