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신대에서 영신봉 주능선으로 오른 우리 일행은 곧 세석산장에 도착했다.
대원사주차장 대원상회 주성호의 친형 주성근님이 이곳의 관리소장으로 부임해 있었다. 그가 내준 커피를 마시니 사람 사는 세상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꽤 많은 등산객들이 활기차게 움직이는 모습도 보기에 좋았다.
하지만 필자의 뇌리에는 옛날 스님들은 어째서 이 넓고 편안한 세석평원을 두고 그 좁고 가파른 영신대에 사찰도량을 세웠을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영신대에는 영신사(영신암)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1487년 영신대를 찾았던 남효온은 김종직이나 김일손과는 달리 영신암이 아닌 빈발암(貧鉢庵)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이의 '지리산일과'에는 '빈발암 아래에는 영신암이 있었고, 암자 뒤에는 가섭전(伽葉殿)이 있었는데, 세속에서 영험이 있다고 말하는 곳이다' 라고 씌어 있다.
사람들이 접근하기 쉽지 않은, 깎아지른 벼랑 끝에 암자를 짓고 수행정진을 계속한 이들의 뜻이 필자의 마음에도 잡힐 듯 말 듯했다.
김종직, 김일손의 기록에 따르면 영신암에는 스님이 혼자 뿐이었다.
그로부터 1백수십년이 흐른 1611년 유몽인은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에 이르렀다'고 '유두류산록'에 썼다.
'암자에는 차솥, 향로 등이 있었지만, 살고 있는 승려는 보이지 않았다. 흰 구름 속으로 나무하러 갔는데,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속세 사람을 싫어하여 수많은 봉우리 속에 자취를 감춘 것인가?'
유몽인의 자문(自問)이다.
음양수샘에서 남부능선을 조금 따라가다 전망이 좋은 바위에 올라 대성계곡을 내려다 보았다.
짙은 녹색의 수림 아래로 계곡이 까마득하게 떨어져 있다.
큰세개골에서 영신대로 오른 우리 일행은 대성동계곡 코스의 정상 루트를 따라 하산하는 것이다.
큰세개골에서 영신대로 올랐던 지계곡을 되돌아 내려가는 것은 너무 위험한 때문이었다.
그런데 석문 앞에서 식사를 할 때 그 지계곡을 거꾸로 내려가는 한 젊은이가 있어 저으기 놀랐었다.
400년 전에도 그 젊은이 못지 않은 이가 있었다. 퇴역관리 유몽인이 영신암을 찾았다가 의신사로 하산했던 행로 또한 놀랄 만하다.
유몽인은 그 젊은이와 똑같이 험준한 지계곡을 따라 내려간 듯하다.
'산세가 검각보다 더 험했는데, 108번 굽이친 형세가 아니라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탈길이었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은 마치 푸른 하늘에서 황천으로 떨어지는 것같다.
넝쿨을 부여잡고 끈을 당기며 이른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걸었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손가락을 깨물며 정신을 차린 뒤에 내려가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그런데 필자는 그 지계곡을 거슬러 내려가는 것은 고사하고 대성계곡 코스의 아주 평탄한 길로 가는 데도 점점 지치기 시작했다.
필자는 점차 일행에서 뒤처지기 시작했고, 큰세개골 이정표를 앞둔 너덜지대에선 무릎 관절 부담으로 걸음이 더욱 느려졌다.
아주 질 좋은 고급 등산화 바닥에 고무 쿠션을 깔고 두툼한 양말까지 신었는데도 이 모양이다.
등산화는 고사하고 짚신을 신고, 길도 제대로 나있지 않은 험한 곳으로 다녔을 옛사람들에게 부끄러웠다.
요즘은 등산 장비 등이 아주 잘 개발돼 있다. 가볍고 방풍방수가 잘 되는 질 좋은 소재의 등산복들이 지천이다.
텐트며 침낭이며 취사도구들도 얼마나 편리한가.
또 인스턴트 식품도 많아 가쁜하게 배낭을 꾸릴 수 있다.
그 옛날 스님들이며 기원기복을 위해 영신대를 찾았던 저 수많은 민초들은 도대체 어떤 차림과 어떤 짐들을 메고 그 험난한 벼랑을 기어올랐을까?
그런 생각과 생각들이 이어지면서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지기만 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고급 승용차를 몰고 산문을 오르내리는 스님들의 모습을 너무 많이 본다.
또한 모처럼 단단히 채비를 갖추고도 힘들어하는 필자 스스로를 되돌아보았다.
비로소 어떤 깨우침 하나를 얻는다.
"영신대는 어디인가? 그것은 마음에 있다."
험준한 곳에 도량을 세운 스님, 그곳까지 찾아올라 기복을 간구한 민초들은 영신대가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했기에 모든 난관을 극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마음에 영신대란 없다. 그러니 이처럼 힘들어하지 않겠는가.
(2001년 6월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