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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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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6월17일.
어젯밤 늦게 잠자리에 들었지만 아침 5시께 일어나기가 바쁘게 밖으로 나왔다. 의신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녹색의 숲이 너무나 싱그럽다.
오늘 무려 12년만에 영신대를 찾아간다. 다른 때와 달리 약간의 긴장과 흥분이 따른다.
12년 전, 필자는 대성폭포까지는 또록또록하게 잘 갔지만, 마지막 영신대로 오르는 '나바론 요새'에 대한 기억은 네발로 엉금엉금 기어올랐던 것밖에 없다.
지독한 허기로 '나바론'의 입구가 어디였었는지 헷갈리고, 영신대에서도 창불대며 좌고대를 찾아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12년 전에는 길 안내를 맡은 의신마을 정근수, 정영훈 두 청년과 필자와 사진기자, 네명이 서브색 하나 메지 않고 맨몸으로 올랐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리산 통신' 1박2일 그룹산행 팀으로 26명의 대군(大軍)이 참여했고, 지리산 최고 기도처인 영신대에서 기우제를 올리기 위해 수박 북어포 등의 제물까지 넣은 큼지막한 배낭들을 메고 오른다.
12년 전에 총각으로 필자를 안내했던 의신마을 정형훈씨는 그 뒤 결혼하여 세 자녀까지 얻었지만, 부인이 지난해 여름 지병으로 타계하는 아픔을 겪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하지만 정영훈씨는 하동 화개면 산악구조대장으로 활약하며 겉으로는 여전히 밝고 명랑한 모습이다.
필자가 그에게 또 영신대 안내를 부탁한 것은 '나바론 요새' 입구에 대해 왜 그토록 혼란스러운 지 이번에는 분명하게 규명하고 싶어서였다.
아침부터 하늘에는 구름 한 조각 없이 따가운 햇살을 내리퍼붓는다.
7시20분 우리 일행은 의신마을을 출발했다.
정영훈 대장은 "큰세개골까지는 속보로 가자"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영신대까지 까마득한 길이 남아있는 때문이었다.
대성동 가게집에서 잠시 휴식한 뒤 큰세개골까지 직행이다.

"전에는 이 이정표에서 50미터 가량 더 올라가서 숲속으로 들어갔는데, 이제는 바로 계곡을 건넙니다. 그 사이 대성폭포까지 가는 새 길이 만들어졌지요."
새 길? 그 사이 많은 사람들이 영신대 산행을 했다는 것일까?
하지만 새 길은 등산객이 아니라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는 아랫마을 주민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실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고로쇠물이 아무리 돈이 된다지만, 이 높고 험한 큰세개골까지 몇 겹의 파이프라인을 길게 이어놓은 것이 놀랍다.
그 덕분에 대성폭포까지는 계곡 옆으로 이른바 '고로쇠길'이 뚜렷하게 나 있었다.

우리들은 꽤 많은 땀을 흘린 끝에 대성폭포(일명 선유폭포)에 도착했다. 폭포의 왼쪽으로 가파른 비탈을 타고 오르던 기억은 아직 기억에 생생했다.
하지만 지독한 가뭄으로 장관의 대성폭포가 말라있다시피 했다.
대성폭포를 지나면서 필자는 또 혼란에 빠졌다.
12년 전 분명히 계곡 왼편으로 한 바퀴 타원형을 그렸는데, 높고 가파른 산비탈만 있을 뿐 돌아갈 길이 없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이번에 나 혼자 영신대를 찾을 자신이 없었던 것도 바로 이 우회하는 코스에 대한 애매모호함 때문이었다.
그 의문을 정대장이 풀어주었다.

대성폭포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다 바른편 첫 지계곡을 만난다. 입구가 상당히 가파른 절벽이다. 우리 대원들은 그 가파른 절벽을 어렵게 타고 올랐다.
그런데 필자와 몇 사람은 절벽 입구가 너무 가팔라 왼쪽으로 조금 우회하여 다시 그 지계곡으로 돌아갔다.
정대장의 설명은 이랬다.
"12년 전 당시에는 계곡의 수량이 많아 지계곡 직등이 불가능하여 왼쪽으로 크게 우회했다."
아하, 그러니까 큰세개골 본류에서 왼쪽으로 우회한 것이 아니라, 폭포 위 첫 지계곡에서 왼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다시 그 지계곡과 합류했다고 하지 않겠는가.

필자의 졸저 '지리산 365일' 등에 바로 이 부분을 잘못 기술한 것이 비로소 판단됐다.
이번에는 나바론의 요새같은 이 지계곡을 따라 계속 직등했는데, 처음 찾아갔을 때는 입구에서 왼편으로 우회했을 뿐만아니라, 마지막 상단 부분에서 다시 지계곡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돌아갔었다.
그러니까 영신대에 닿기 전에 우리는 여러 개의 돌탑무더기와 집을 헐어놓은 곳, 그리고 석문(石門)을 통과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계곡을 타고 계속 올라 큰바위가 가로막는 곳, 곧 석문을 빠져나온 그 지점으로 올라선 것이다.

이번에 오른 길은 물론 지계곡의 수량이 적을 때 가능하다. 수량이 많을 경우에는 역시 지난번에 했던대로 지계곡 입구에서 왼편으로 크게 우회하여 다시 지계곡을 만났다가, 다시 오른편 능선을 따라 오를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섰다.
이제는 영신대에 오를 수 있는 길을 계곡의 수량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분명하게 찾아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영신대에서 찾아보고자 했던 창불대와 좌고대는 이번에도 확인이 불가능했다.
옛 문헌의 기록과 비슷한 곳을 미루어 짐작은 해볼 뿐이지, 어차피 확실한 근거도, 확인 방법도 없었기 때문이다.

영신대는 12년 전과 달리 국립공원관리공단의 단속으로 인적이 거의 끊기다시피 하고 주변을 숲이 뒤덮고 있었다.
지난번의 또다른 제단과 마당은 숲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큰세개골과 '나바론 요새'가 대단한 것은 틀림없지만, '지리산 최고의 경승지'란 말은 더 하지 못할 것 같다.
영신봉 주능선 종주로로 올라서던 길도 지난번의 그 길이 아니고 철망으로 막아놓고 있었다.
하지만 영신대가 '지리산 최고의 기도처'란 말은 더욱 신뢰하게 됐다. 우리들이 땡볕을 덮어쓰고 기우제를 올렸는데, 바로 이날 밤 당장 억수같은 비를 내려준 때문이다.
(2001년 6월19일)

  • ?
    허허바다 2004.05.20 08:57
    요즈음 진원님께서 영신대 얘기를 하시기에 이런 저런 자료들을 찾아 호기심을 메우고 있었는데 이렇게 자세한 기록을 볼 수 있게 해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인지 5편을 단숨에 읽어 버렸습니다.
    십수년 전의 추억...
    읽는 이의 입가에 오랫동안 미소를 자아내게 합니다... ^^*
    선생께서도 그러실 때가 있으셨군요 ㅎㅎ

    그리 효험이 좋다면 음... ㅋㅋㅋ
  • ?
    moveon 2004.05.20 18:01
    대성폭포를 선유폭포라고도 하는 군요. 겨울에 쏟아져 내리듯 얼어 있던 그 모습 장관이었던 모습이 생각나서 다시 가고 싶습니다. 겨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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