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의신마을에는 세 청년이 있었다. 벽소령 상주천막의 조봉문, 빗점골에서 토봉을 치고 있는 정근수, 그리고 이곳에 산간학교를 세울 꿈에 부풀어 있는 총각 정영훈이 그들이다.
조봉문은 힘이 장사로 한꺼번에 화개 막걸리 두 말을 메고 벽소령까지 걸어서 오르는 인물이었다.
아니, 그는 칠선계곡 입구 두지터에 국악인들이 와서 수련회를 갖고 있다는 연락이 오면 한 말짜리 막걸리를 메고 지리산 주능선을 넘어 두지터까지 달려가곤 하던 위인이었다.
정근수는 본가가 쌍계사 앞 용강리이지만, 빗점골에서 토봉을 연구(?)하느라 의신마을에 방을 빌어 부인과 함께 거주를 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그를 가리켜 '벌 박사'라고 했다. 단순히 벌을 치고 꿀을 따는 것 만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순도 높은 꿀을 생산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연구했다.
방랑벽도 있어 지리산속을 며칠 동안 헤매다 오기도 하는데, 꿀값 뺨치는 값진 수석(壽石)을 안고 돌아왔다.
나머지 한 명인 정영훈은 당시 28살의 혈기왕성한 청년으로 신흥마을 최효영이 회장으로 있던 화개 총각들의 모임 '칡넝쿨회' 회원이었다.
조봉문, 정근수, 정영훈 세 청년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똑같이 서울 또는 부산으로 나가 직장생활을 하다 지리산 고향마을로 되돌아와 살고 있었다.
또한 거의 날마다 말술도 마다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셋 모두 '황우 고집'으로 술마시기나 입씨름에서 절대 양보하려 하지 않는 것도 같았다.
당시 필자는 화개 골짜기에 들기만 하면 이 청년들과 신흥마을의 최효영, 목통마을의 김수만 등 젊은이들과 '술시합'을 벌이다시피 하고는 했었다.
필자는 조봉문의 안내로 영신대를 찾기로 한 하루 앞날 덕평봉 숲속에 숨겨져 있는 한 초막을 찾았다.
지리산 청학동을 규명하는 열쇠가 담겨 있다고 하여 의신마을 주민들이 신비롭게 생각하는 곳이었다.
그 초막에 들렀다 늦은 시각에 마을로 돌아왔는데, 예의 세 청년과 또 술판이 벌어졌다.
술자리에서 쓰러져 잠들었는데, 다음날 아침 막상 영신대를 향해 출발하고 보니 어떻게 된 셈인지 안내자는 조봉문이 아니라 정근수, 정영훈 둘이었다.
간밤에 세 청년이 '큰소리 치기' 경연을 벌이더니 조봉문은 술이 지나쳐 나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봉문보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영신대를 찾아나선 필자 쪽이었다.
정근수, 정영훈과 사진기자, 필자 네 사람의 일행이 휴대한 것이라고는 카메라 한 대가 유일했다. 배낭은 고사하고 보조 색 하나 메지 않았다.
아침밥도 먹지 않고 맨 몸으로 영신대 탐승에 나선 것이다. 두 의신마을 청년도 이웃집 마슬 가듯 평상시 걸치고 있는 옷이 전부였다.
우리 일행은 대성마을 외딴 가게에서 해장을 겸해서 막걸리를 나눠 마셨다.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이 날 험난한 큰세개골을 따라 영신대까지 오르는 에너지원의 전부였던 셈이다.
큰세개골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40미터 가량 더 올라간 지점에서 우리들은 세석으로 오르는 길을 버리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조금 들어가니 희미한 길이 이어져 있었다. 의외로 평탄한 길이 계속 이어졌다. 오르기에 너무 수월한 게 어쩐지 '폭풍 전야의 고요'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여기 좀 더 가면 참말로 기똥차부러. 선녀탕이 있는 선유폭포(대성폭포)가 있는디, 고것이 먼고 하니 의신마을 주민들이 야유회 오는 장소랑께."
"하이고, 아무리 벅구치고 놀아도 바깥세상하고는 팍 단절돼 있으니까네. 저엉말 기똥 찬 곳이라우."
두 청년의 입이 또 자랑 경연대회를 벌이면서부터 우리는 희미하게 이어지던 오솔길을 벗어나 계곡산행을 하게 됐다.
'대성계곡 깊숙이 똑같은 형상의 암봉 세개가 적절한 간격으로 서있다. 그 첫째 암봉 아래 대성폭포가 장대무비하게 서있다. 지그재그 4단 폭포인데 길이가 120미터나 된다. 폭포는 왼편으로 무난하게 오를 수 있는 길이 있고, 또 중간 부분에 100여명이나 앉아서 놀 수 있는 넓은 반석이 전망대처럼 따로 자리해 있으며, 그 뒤편엔 선녀탕으로 불리는 직사각형의 욕조 반석이 절묘하게 물을 받아들이고 있다.'(필자의 졸저 '지리산 365일')
이 웅대한 대성폭포가 지리산 등산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 것이 불가사의하다. 또한 원시수림에 둘러싸인 암봉과 계곡미는 설악산을 방불케 한다.
영신대를 찾아가는 것을 잊을 정도로 너무나 아름답고 청정하다.
아, 대성폭포를 지나 깊은 협곡을 오르며 신선세계와 같은 선경에 얼마나 황홀해 했던가.
하지만 그 감동의 순간은 의외로 빨리 끊어졌다.
갑자기 온 몸에서 힘이 쭈욱 빠지고 식은 땀이 비오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필자는 허기를 만난 것이다.
가파르고 힘든 코스가 이제부터 시작된다는데 사탕 한 알 지니고 있는 게 없으니 큰일이었다.
당시 왜 그처럼 아무 준비도 없이 나섰던 것이었을까?
"영신대는 아무 먹을 것도 가지고 갈 필요가 없소. 제물들이 수두룩하니께로."
의신마을 청년들은 영신대만 가면 포식한다고 자랑했었다.
필자는 또 하나, 세석산장이 지척이므로 먹거리는 거기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인 영신대에서 까마득한 거리로 깊숙이 떨어져 있는, 바깥 세계와 완벽하게 차단된 협곡에서 허기를 만났으니, 이게 어디 예사일이겠는가!
(2001년 6월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