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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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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에 지리산을 찾는 사람은 한 인물의 숨결이나 발자취를 잠시라도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휴정 서산대사(休靜 西山大師, 1520~1604)가 그이이다.
전쟁기념관은 2005년 1월의 호국인물로 서산대사를 선정, 발표했다.

서산대사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자 전국에 격문을 돌려 각처의 승군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했다.
대사는 73세 노구에도 불구, 문도 1500명을 이끌고 평양성을 탈환했다.
선조는 대사에게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 大禪師 禪敎都摠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란 최고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 작위를 하사, 그 공을 치하했다.

서산대사라면 그이가 85세(법랍 67세)를 일기로 가부좌를 한 채 입적한 묘향산이나 금강산을 먼저 떠올리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서산대사가 각별한 인연을 맺은 산이라면 단연코 지리산이다.
그이는 지리산 삼신동(화개동천)에 들어와 머리를 깎았던 것이다.

운학(雲鶴) 소년은 나이 열다섯 때 과거시험에 낙방, 지리산에 들어와 3년을 유랑하다 열여덟살 때 숭인(崇仁)스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는다.
"마음을 비우는 공부를 하라."
운학 소년은 머리를 깎고 마음을 비우고자 의신사 뒤편 삼철굴에서 세 해 여름, 대승사에서 두 해 여름, 원통암 원적암 은신암 등 여러 사암에서 두서너 해를 지나며 용맹정진했다.
마침내 대오득도의 깨달음을 얻은 그이는 휴정이란 법명을 얻게 되었다.

휴정 서산대사는 지리산에서만 전후 20년을 지냈다.
특히 화개골 내은적암에 청허원(淸虛院)을 열고 '선가귀감' 등의 저술활동을 했던 10년이 가장 빛난다.
훗날 '지리산 역사와 문화'를 규명해주는 그이의 중요한 저술들이 이 시기에 거의 이루어진 것이다.

지리산 개산(開山)의 역사를 달궁의 마한 피란도성에서 찾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 마한 피란도성의 근거를 제시해주는 기록이 서산대사의 '황령정사기'이다.
또 그이가 쓴 '신흥사 능파각기'는 지리산 관련 글 가운데 최고의 명문이다.
그 글은 대사가 머물던 당시의 신흥사(신응사, 화개동천) 주변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게 해준다.

'화개동천 깊은 곳에 너댓 집 마을이 있다.
꽃나무 대나무숲이 있고, 개소리 닭소리가 들린다.
마을 사람들은 아주 소박한데 땅을 일구어 씨뿌려 거두는 것만 알고, 만나고 찾아오는이는 늙은 중 뿐이다.
신흥사에서 남쪽으로 수십 보 내려가면 두 시내가 모여 내를 이루는데, 맑은 물이 돌에 부딪히고 꺾여 소리를 내며 뒤집힐 때마다 불보라가 눈꽃처럼 튀긴다.'

서산대사는 '다리에 걸린 구름 물에 비쳐 흘러가고 산승은 오늘도 무지개를 밟고 섰네...'라는 '홍류교 능파각' 시도 따로 남겼다.
그이는 홍류교 능파각의 좋은 점을 칭송하면서도 글의 말미에 한스러운 것도 있다며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한스러운 것이 있다면, 태초에 하늘이 이 신령한 곳을 숨겨놓은 것을, 지금 옥륜과 조연스님이 그름을 헤치고 산문을 열어 드디어 산과 골짜기와 시내와 사원을 인간세상에 드러나게 만들어 이름을 숨기기 어렵게 한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개발의 아픔을 느끼는 것은 같은 것인가 보다.

그런데 지금 와서 우리가 정말 통탄할 일이 있다.
지리산 어느 곳에도 휴정 서산대사의 자취가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서산대사 기념관이 있어야 한다면 당연히 신흥사지나 화개골이어야 한다.
하지만 신흥사지는 초등학교로 변신했고, 그이가 저술활동을 했다는 청허원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서산대사가 머물 때의 화개골에는 100여 사암(寺庵)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대찰 의신사도 간 곳 없고, 원적암 은신암 등이 어디에 자리했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
이 달의 호국인물이라는 서산대사, 그러나 지리산에는 그이의 유품 하나 제대로 보존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부끄럽다.
  • ?
    솔메 2005.01.12 15:07
    지리산,
    그 중에서도 서산대사의 족적이 많이 남아있어야 할 화개골에서조차
    대사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후손들로써 정말로 부끄러운 일이군요.
  • ?
    신후 2005.01.14 14:18
    서산대사에게 지리산은 그런 각별한 인연 있는곳이군요.
    관계당국이나 우리 개개인 상당수가 문화사적 가치및
    유적지에 너무도 무관심,소홀하지 않나쉽네요.
    어떤나라에선 생존한 작가의 거처를 알리면서 "우리의
    위대한 작가 ***의 집필장소가 있는곳" 이라고 알리면서
    지나는 사람들에게 존경의 마음 갖도록 한다는데...
    그런점에서 이런 사실들을 자꾸 발굴해서 좋은글 올려
    주시는 여산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 ?
    산유화 2005.01.20 09:58
    서산대사가 각별한 인연을 맺은 지리산, 어디에도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 없다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 ?
    선경 2005.01.22 07:56
    다리에 걸친구름 물에 비쳐 흘러가고
    산승은 오늘도 무지개를 밟고 섰네...
    몇번이고 읽어보며 암송을 해봅니다 서산대사의 10년의
    가장빛난 저술활동도 지리산에 계셨기에 더욱 좋은작품을
    남겨 주셨군요
    휴정 서산대사님 애국심과 지리산의 깊은인연을
    되새겨 봅니다
    감사합니다 여산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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