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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통신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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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난 1989년 10월7일 밤중에 지리산에서 겪었던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날 밤 필자는 어둠속에 홀로 유평리를 출발, 무재치기폭포를 거쳐 해발 1,450미터의 치밭목산장으로 급히 올랐다.
이날 따라 첫 얼음을 얼게 한 한파가 기습하면서 거센 강풍이 사정없이 휘몰아쳤다. 강풍에 부대낀 수목들이 깊은 골짜기의 캄캄한 어둠을 찢어놓을 듯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고는 했다.
지리산 자락에 묻혀 있는 수많은 원혼들의 잠을 깨워놓기 위해서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한 바람이 휘몰아쳤는지도 몰랐다.

자정이 지나면 음력으로 9월9일이었다. 음력 9월9일은 숨진 날짜도 모르는 모든 원혼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이다.
10년째 매년 이날 지리산을 찾아 수많은 원혼들의 넋을 달래느라 제사를 모시는 한 여인이 있다고 했다. 더구나 그녀는 저 유명한 '남부군' 간부였단다.
남부군 간부로 지리산에서 투쟁하다 살아남은 여성이 음력 9월9일 지리산 그 처절했던 격전의 현장을 찾아와 고혼들에게 제사를 모신다는 은밀한 정보가 필자에게 전해졌다.
어찌 그 자리에 가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지리산-너무나 많은 청춘들이 그 산중을 방황하면서 죽어갔다. 전쟁이란 어휘로도 설명될 수 없는 비참 속에 죽어갔다. 이제 이름조차 기억하는 이 없는 그 주검들은 풍우 속에 흙이 되었으나 그들이 불태웠던 허망의 정열에는 한가닥 장송곡도 없었다. 그리고 세월은 강물처럼 흘렀다. 흐르고 있다. 지난 은수를 다 잡아 싣고 삭히며 한없이 흘러가고 있다. 사랑도 미움도 환희도 분노도 마침내 모든 것이 투명으로 돌아간 역사의 강물 위를 인간은 또 흘러간다. 스스로의 의지로는 어찌 할 수 없는 25시의 인간들이 한없이 표류해 간다.'(이태 '남부군' 서문)

필자는 밤 늦은 시각에 치밭목산장에 도착했다. 공간이 협소한 산장에는 스무명 남짓한 등산객들이 바람소리와 나무들의 비명에 질렸는지 침낭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이미 잠들어 있었다.
자정이 되자 어둠 속에 산장의 문이 조용히 열리고 제물들이 소리없이 밖으로 운반되기 시작했다.
통돼지를 비롯하여 생선 떡 막걸리 과일 밥 나물 등으로 제사상 차리기가 끝났다.
소복을 입은 한 여인이 제문을 읽고 술을 올린 뒤 큰절을 올린다.
그리고 그녀는 장승처럼 우뚝 선 채 캄캄한 지리산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경건하고 진지했던지, 필자는 그녀에게 한마디의 말도 붙여보지 못했다.
그녀는 누구와도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은 채 관리인의 침소로 든 뒤 모습을 감추었다.
제사상 차리기를 도왔던 사람들이 음복을 하는 데도 그녀는 두번 다시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필자는 다음날 아침 그녀와 얘기를 나눠보기로 작정을 했었지만, 그녀는 날이 밝기도 전에 살그머니 산장을 빠져나가 천왕봉 쪽으로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산장에 묵었던 등산객들은 그녀의 출현 사실 조차 눈치채지 못했었다.

치밭목산장의 '남부군 여인'! 그녀는 과연 누구일까?
그녀의 치밭목 제사 정보를 필자에게 은밀히 알려준 민병태 산장지기는 이렇게 들려주었다.
이름은 최순희, 나이는 칠순이 가까운 60대 후반, 주소는 서울, 직업은 없고 음악 레슨으로 생계 유지, 출생지는 러시아, 학력은 러시아에서 수학하다 일본의 음악대학을 졸업했다는 것 등이었다.
그녀가 민병태씨에게 말한 한마디가 정말 감동적이었다.
"나는 지리산에서 숨진 빨치산은 물론이요, 토벌 군경, 요즘의 등산객 가운데 조난당한 사람들의 넋까지 함께 위로하고자 한다. 모두가 똑같은 한민족인 때문이다."

그녀가 사라진 뒤 나는 비로소 가슴을 쳤다.
"'피아골 축제'의 바로 그 여인이다!"
이태의 '남부군'에 '피아골 축제' 얘기가 실려 있다.
'그날 밤 피아골에서는 춤의 축제가 벌어졌다. 풀밭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둘레를 돌며 <카추사의 노래>와 박수에 맞춰 남녀 대원들이 러시아식 포크댄스를 추며 흥을 돋우었다. 피어오르는 불빛을 받아 더욱 괴이하게 보이는 몰골들의 남녀가 발을 굴러가며 춤을 추는 광경은 소름이 끼치도록 야성적이면서도 흥겨웠다.'
이 축제를 주도한 한 여성에 대한 글도 함께 실려 있지 않았던가!

'최문희라는 문화지도원이 각색 연출한 <엉터리 곡성군수>라는 코미디 촌극도 공연되었다...문화지도원 최문희는 동작이 활달하고 격정적인 인상의 20대 여인이었다. 평양에서는 오페라 <칼멘>의 칼멘 역을 맡았던 유명한 오페라 가수이며 공훈배우였다고 한다.
그녀는 등사판으로 <50곡집> <20곡집> 등 가사집을 만들어 대원들에게 배부하고 틈틈이 노래 공부를 시키고 있었다. 우리는 기억력 좋은 이 여인으로부터 주로 러시아 것을 번역한 군가와 가요를 수십 가지 배웠다.'(이태의 '남부군')

'피아골의 그녀'가 바로 '치밭목의 그녀'란 사실을 필자는 그녀가 사라진 뒤에야 깨우친 것이다.
그 얼마 후 영화 '남부군'이 만들어졌을 때 필자는 이태씨를 직접 만나 피아골 축제의 그녀가 치밭목의 바로 그녀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빨치산은 물론, 군인과 경찰, 주민과 등산 희생자 등 지리산에서 숨진 모든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자는 '생명평화 민족화해 지리산 위령제'가 오는 5월26일 달궁 일원에서 열린다.
하지만 좌, 우 이념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자는 이런 위령제는 한 빨치산 여인에 의해 이미 지난 80년대부터 10여년간 치러왔던 것이다.
(2001년 5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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