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지리산

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통신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조회 수 1351 댓글 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980년대 지리산 관련 최대 사건(?)은 이태(李泰)의 빨치산 수기 <남부군> 책이 88년에 펴내진 일이었을 것이다.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이 85년에 이미 발간됐고, 조정래(趙廷來)의 <태백산맥>이 87년 초쇄를 펴냈다.
<지리산>과 <태백산맥>이 빨치산 얘기를 그리고 있고, 특히 이병주의 <지리산>은 이태의 <남부군>을 절반 이상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남부군>은 소설이 아니라 빨치산 출신 인사의 수기라는 데서 엄청난 화제와 충격을 몰고 왔다.

<남부군>이 나올 때까지는 누구도 빨치산 얘기를 감히 입 밖에 꺼내지 못 했다. 다만 허구의 세계인 소설에서만 그려지고는 했을 뿐이다.
<남부군>이 나온 뒤로 <빨치산의 딸> 등 관련 수기들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왔다.
그로부터 또 이십수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난해 5월26일에는 '생명 평화 민족화해 지리산 위령제'가 열려 이념과 신분을 초월하여 지리산에서 희생된 영령들을 위로하고, 빨치산과 토벌군경 출신 인사들이 한자리에 만나 '화해의 악수'를 나누었다.

관청에서는 근년에 지리산 곳곳에 이른바 '빨치산 루트'를 복원하고 빨치산 마네킹들을 세워놓았다. 엄청난 액수의 국민 혈세로 '이현상 아지트' 따위의 각종 빨치산 흔적들을 부활시켜 놓은 것이다.
하지만 빨치산과 군경토벌대와의 처절한 사투와 그 사이에 끼어 온갖 고통을 겪은 지리산 주민들과 희생자 유가족들의 깊은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빨치산 마네킹 따위보다는 당시의 진상 규명을 증인들이 타계하기 전에 국가에서 서둘러 매듭을 지어야 한다.

지리산 비극을 다룬 수많은 소설과 수기, 르포 등이 나왔지만, 그 모두는 지극히 피상적인 부분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지리산 주민들 가운데는 아직도 당시의 상황을 금기사항처럼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너무나 엄청난 희생과 그 가족들의 고난의 세월에 대한 충격이 큰 때문일 것이다.
'무덤 땅 1평만 사주세요'란 이 칼럼을 읽고 지리산에 살고 있는 '0OO'님이 큰외할아버지의 얘기를 메일로 보내왔다.
그 사연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
                                                
...................................................................................
                        
...(전략)...지금 그곳엔 저의 큰 외가댁이 있는데요. 어떻게 호칭을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네요.
저희 엄마의 큰아버지(저는 그냥 큰집 외할아버지라고 부릅니다)께서 이제 구순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저희 외할아버지와는 형제간이셨는데 제가 보기에도 두 분은 엄청 달랐습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투박한 농사꾼이셨던데 비해 큰외할아버지는 어려운 한자책을 끼고 사랑방에 기거하시는 양반이셨습니다.
시골 작은 동네에서 방앗간을 하셨으니 그럭저럭 동네 큰어른쯤은 되셨나 봅니다.

그 분이 청년시절에 빨갱이로 몰려 생초 어딘가 야산에 끌려 가셨답니다.
골짝 골짝에서 끌려나온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군인들의 무차별 총격 세례를 받으셨다구요.
끌려가신 그날 야밤, 저희 할아버지가 그 산엘 큰외할아버지를 찾으러 가셨다고 합니다. 무수히 많은 시체 속에 저희 큰외할버지가 계셨는데 천운으로 아직 숨을 쉬셨고 저희 할아버지가 그 길로 들쳐 업고 산을 내려 오셨다 합니다.
물론 보는 눈들이 있어 바로 집으로 들어가진 못하고 생초에 사셨던 고모할머님의 도움으로 며칠을 몸조리한후 쌀가마처럼 위장해서 야밤에 집으로 들어가셨다 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살아나셨지만 그 후 3년간은 더 어려우셨던 것 같습니다.
한옥을 보면 천장과 지붕 사이에 조그만 공간이 있다면서요. 그 좁은 공간에서 3년을 나셨으니 그 고통이야 오죽 하셨겠습니까? 저희 외할아버지와 생초의 고모할머니와 큰외할머니 이외에는 그 많던 대가족 중 아무도 몰랐다하니, 그 마음고생이야 감히 짐작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좁은 공간에서 불빛을 아껴가며 무료함과 울분을 달래러 책을 읽으셨다는 그 분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3년이 지난후 산청경찰서에 자수(?)를 하셨다 합니다.
그 후에 무고하게 잡혀갔다는 판정을 받았다 하고요.
저희 어머니는 그 때 태어나지도 않으셨고, 집안어른들께서 후에 다 성장한 아들딸들을 앉혀 놓고 조심스럽게 그 이야기를 하셨다 합니다.
그 사건이 일어난지 30여년이 지난 명절날이었다 하십니다. 저는 또 그로부터 20여년을 훨씬 지나 들었으나 그 이야기를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아주 조심스러우셨습니다
...(중략)...저는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때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내 주변에 이렇게 억울한 일이 있었다는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큰 일을 그동안 쉬쉬 했던, 그리고 지금도 조심스럽게 얘기하는 가족들도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조금 그 분들의 마음을 짐작할 것 같습니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은 당당하게 얘기하기가 쉬울 겁니다.
그러나 아직도 50여년 전에 있던 분단의 현실은 그대로입니다.그 분들은 그 흔적조차 들추어내는 게 고통일 것입니다.
어떤 방향으로든지 애써 묻어 두었던 아픔을 다시 생각나게 할 테니까요.
시대가 달라졌다고 요즘 사람들이 아무리 얘기해도 믿기 힘드실 겁니다. ...(후략)...

................................................................................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양민학살대책위원회가 양민학살 진상규명을 하겠다는 것도 지리산의 비극이 반세기를 넘기면서까지 여전히 검은 베일에 가려져 있는 때문이다.
아직도 말하지 않고, 숨겨놓기만 한 사연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 아픈 역사의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그래서 억울한 원혼들을 진정으로 위로하고, 다시는 이같은 비극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무덤 땅' 1평 사기 운동은 지리산의 어두운 역사를 밝혀내는 작지만 당찬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2002년 2월16일)

  • ?
    오 해 봉 2004.06.05 01:55
    참으로 마음아픈 글을읽었 습니다.
    반세기가넘는 세월동안 말못하고 겪어야했던 유가족들의 한.통분.
    체념의세월,잊혀져가는 그이야기를 여산선생님 아니면 누가감히
    이곳에 올려놓을수 있을까 싶네요.보통사람들은 감히범접못할 이야기 였기에 말입니다.이제라도 진상이 규명되어 원혼을 위로해 드려야 하리라 생각됩니다.좋은공부 거듭 감사합니다,
  • ?
    섬호정 2004.06.06 20:11
    민족의 아픈 수난의 역사를 용기있는 필봉으로 시대를 열어주시니 역사가 묻어져 가는 오늘날 경종입니다 환란과 사치가 난무하는 현실에서 누군가 짚고 파 헤쳐야 할 어둠속의 삶을 귀 열고 배웁니다 우리 모두가...그 힘든 일 주저없이 진군하는 여산선생님께 박수를 보냅니다. 합장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94 "그대 다시 돌아오리"(1) 최화수 2004.02.26 1144
293 "그대 다시 돌아오리"(2) 최화수 2004.02.26 1374
292 "그대 다시 돌아오리"(3) 최화수 2004.02.26 972
291 "나 문수암에서 죽을랍니다!" 10 최화수 2004.11.02 2131
290 "나의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최화수 2004.01.30 1935
289 "마을 이름이 '예언자'였네!" 4 최화수 2004.08.01 2221
288 "무덤땅 한 평만 사주세요"(1) 최화수 2004.06.04 1223
287 "무덤땅 한 평만 사주세요"(2) 최화수 2004.06.04 1395
» "무덤땅 한 평만 사주세요"(3) 2 최화수 2004.06.04 1351
285 "벽송아, 너 왜 그냥 가느냐?" 3 최화수 2008.01.08 1771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0 Next
/ 30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