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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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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땅 1평만 사주세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수많은 원혼들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서 무덤을 보존해야 하겠기에 십시일반으로 무덤 땅 1평을 사달라는 것이다.
산림을 지키기 위해서, 도시 공원을 조성하고자 땅 1평 사기 운동은 펼쳐지고 있지만, 무덤 땅 1평 사기 운동은 처음 있는 일이다.
어디에 있는 무슨 무덤인가?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지리산 기슭 소정골에 있는 무덤이다.
무덤 땅 1평 사기 운동은 현지 주민 70여명으로 구성된 외공리 양민학살대책위원회가 추진하고 있다.

양민학살대책위원회 서봉석 위원장(산청군의회의원)은 한국전쟁 전후 자행된 민간인 학살사건 진상을 규명하고자 증거 보전을 위해 그들의 무덤을 보존하려는 것이다.
외공리 소정골에는 민간인을 집단 학살하여 파묻은 무덤 6기가 있다. 그 가운데 1기는 발굴했고, 나머지 5기 중 국유지에 있는 1기를 제외한 4기 사유지 300여평(평당 가격 2만5천원)을 매입, 보존하고자 무덤 땅 1평 사기 운동을 펴려는 것이다.
오는 3월16일 총회의 의결을 거치게 되면 무덤 땅 1평 사기 운동은 본격 추진된다.

도대체 이 무덤들은 무슨 사연이 있어 땅 사기 운동까지 펼치게 된 것일까?
무덤 6기 가운데 1기는 지난 2000년 8월에 발굴됐는데, 거기서 무려 150여구의 유골이 쏟아져 나왔다. 나머지 5기의 무덤 속에 있을 유골까지 합친다면 모두 800구 가까운 원혼들이 6기의 무덤에 집단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공리의 이 무덤의 주인공들은 지역 주민들과 사건 당시의 목격자 증언으로 군인들에 의해 집단 학살된 양민 희생자임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정부는 그런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외공리 양민학살대책위원회는 아무 죄도 없는 무고한 양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현장의 훼손 상태를 막고, 원혼들이 집단 매장돼 있는 무덤을 증거로 보존하기 위해 '무덤 땅' 매입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이런 운동을 펴게 됐다.
또한 외공리 양민학살사건의 실체를 규명하여 현재 국회에 계류중인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외공리 사건도 포함될 수 있도록 국회에 청원할 것이라고 한다.
외공리 소정골에서 들려오던 원혼들의 곡성이 이제는 멎게 될 것인지 주목된다.

지난 1951년 정월 대보름 다음날 사건이 일어났으니까 무심하게 흐르는 세월은 벌써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었다.
그날 낮부터 내린 비가 오후 2시께 빗방울이 제법 굵어졌다. 좁고 가파른 덕천강 벼랑의 도로를 따라 한대의 장갑차를 앞세운 긴 차량 행렬이 지리산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장갑차에는 기관총이 실렸고, 그 뒤 3대의 트럭에는 무장군인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트럭들의 바로 뒤에는 11대의 버스가 줄을 지어 따랐다.
차량 행렬은 외공리 점동마을을 지나 소정골짜기를 향하고 있었다.

빗방울이 더 굵어졌지만, 버스에 실려 있던 사람들이 강제로 차에서 내려졌다.
그들은 대개가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이었다. 아이를 등에 입은 아낙네도 많았다. 냄비와 솥, 담요 등 피난봇짐을 꾸려 짊어진 아낙네들도 있었다.
장갑차와 군용트럭이 골짜기 앞 뒤쪽을 가로막아놓고 버스에서 내린 양민들을 그 안에 몰아넣었다.
고무신을 질찔 끌고 있는 어린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죄없는 어린아이라고 하여 따로 가려내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기관총과 소총들이 콩볶듯 불을 뿜기 시작했다.

소정골짜기는 빗물과 핏물이 내를 이루었다.
김종원 대령이 부대를 이끌고 소정골짜기에서 내려왔다.
시천 특공대원들과 마을에서 동원된 주민들이 양민 학살 현장으로 달려가 흙을 덮어주며 함께 울었다.
빗방울은 더 굵어지고 안개구름이 둘레를 감싸 금세 사방이 어두워졌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도록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처량하게 골짜기에 메아리쳐 부근 일대 주민들을 놀라게 했다.
학살사건 이후 골짜기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풍겨나왔고, 3년이 지나도록 나무꾼도 접근하지 못했다.

직경 6미터 안팎 무덤 주변에 냄비 조각과 어린아이들의 고무신짝이 오래도록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그런데 600~800명에 이르는 그 많은 양민들은 도대체 어디서 살던 누구며, 무슨 이유로 이곳에 끌려와 희생됐는지 아직도 그 내막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희생자 대부분이 부녀자와 아이들이고, 국군부대에 의해 집단학살된 것만 드러나 있을 뿐이다.
덕산에서 중산리로 가는 도로변에 있는 소정골짜기, 지리산을 찾는 이들이 오늘도 수없이 많이 그 앞을 지나치건만 눈길 한번 주는 이 없으니...!
(2002년 2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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