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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통신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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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들어가는 길이 고래로 허다하지만, 쌍계사 세이암의 화개협 시오리를 끼고 앉은 화개장터의 이름이 높았다.(중략)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들이 화갯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아 장수들의 실 바늘 면경 가위 허리끈 주머니끈 족집게 골백분들이 또한 구롓길에서 넘어오고, 하동길에서는 심진강 하류의 해물 장수들이 김 미역 청각 명태 자반 조기 고등어들이 올라오곤 하여...'

김동리의 초기 단편소설 가운데 하나인 <역마(驛馬)>의 한 대목이다.
1947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화개장터의 민속적인 소재를 통하여 토속적인 삶과 운명을 시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의 도입부 한 대목인 위의 글만 보더라도 우리는 지리산의 옛길을 마치 비디오 테이프를 재생시켜 놓은 것처럼 지켜볼 수 있다.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사람들은 걸어서 다녔다.
화개장터로 몰려드는 사람들은 등짐을 지고 강을 건너고 재를 넘고 산모퉁이를 돌아왔던 것이다.
뱃길이 닿는 곳까지는 배편에 기대기도 했을 것이고, 나귀나 우마차와 함께 물건을 옮기기도 했을 터이다.
사람과 물건, 그리고 짐승이 함께 걸어갔던 길이다.
사람과 물건과 짐승의 동행, 그것이 옛길의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걸어가는 길, 도보(徒步)에는 '느림의 미학'(?)이 있다.
느림, 거기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담겨 있을까?
느린 움직임에서 깊은 생각을 건져올린다. 또한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게 된다.
사유와 인정의 미덕이 강물처럼 넘쳐나게 되는 법이다.

뛰거나 날아가느라 보지 못하는 것도 느린 보행에서는 결코 놓치지 않는다.
자연을 자연의 호흡으로 지켜볼 수 있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니까 걸어가는 것은 자연과 함께 가는 것이다.
들꽃과 함께, 냇물과 함께, 바람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자연과의 동화(同化), 그것은 보행으로 얻는 가장 큰 기쁨일 수도 있다.

하동~화개 구간의 19번 국도는 아름다운 섬진강을 따라 꿈결같이 흐른다.
사실은 이 구간의 도로도 지난 1980년대 2차선으로 확장되면서 산모롱이를 구비구비 도는 곳들이 상당히 직선화됐다.
특히 악양 강변공원 구간의 직선도로는 지난 90년대에 새로 생겨난 길이다. 원래는 악양면 소재지로 소쿠리 테 모양으로 한 바퀴 돌아나오는 도로만 있었다.

하동~화개 구간의 19번 국도를 왕복 4차선으로 다시 확장하는 것에 환경단체와 현지 주민 상당수가 반대하는 까닭도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첫번째이다.
그에 못지 않는 이유가 또 있다.
"4차선 직선도로로 바뀌면 우리는 아름다운 길 하나, 천천히 달리고 싶은 여유를 잃게 된다"는 한 주민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가슴을 때린다.

김동리의 단편소설 <역마>에서 하일라이트는 총각 성기(性騏)가 처녀 계연(契姸)을 이끌고 화개장터에서 칠불암까지 걸어가는 대목이다.
화개장터~칠불사를 지금은 승용차와 관광버스들이 줄지어 오른다.
차량으로 편안하게 오르는 오늘의 사람들에게 <역마>에서 두 처녀총각이 칠불사를 찾아가는 대목의 자연적인 분위기는 꿈에서조차 상상이 되지 않을는지도 모르겠다.

'...쳐다보면 위로는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산봉우리요, 내려다보면 발 아래는 바다같이 뿌우연 수풀뿐, 그 위에 흰 햇살만 물줄기처럼 내리 퍼붓고 있었다.
머루 다래 으름은 이제 겨우 파랗게 메아리져 있고, 가지마다 새빨간 복분자 오디는 오히려 철이 겨운 듯 한머리 까맣게 먹물이 돌았다.
성기는 제 손으로 다듬은 퍼런 아가위나무 가지로 앞에서 칡덩굴을 헤쳐가며 가고 있는데, 계연은 뒤에서 두릅을 꺾는다, 딸기를 딴다, 하며 자꾸 혼자 처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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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도 2004.09.25 09:41
    "느림의미학" 공감합니다.
    강원도 홍천에서 속초로 가는 44번국도가 비포장시절에는 그도로조차 홍천의 체취를 느낄수있는 문화공간이 일부였는데 포장이되고 또확장이되니 이제 그냥 휙- 지나가는 도로만 존재하는것을 봤습니다. 인제, 원통 또한 마찬가지고...........
    오히려 포장도로가 되고부터 홍천이 또하나의 섬이되더군요.......... 산수좋은 44번 국도를 그냥 두었으면 하는 바램 혼자만의 욕심인지............꼭빨리가서 뭘하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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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유화 2004.09.25 10:01
    들꽃과 함께, 냇물과 함께, 바람과 함께
    자연을 자연의 호흡으로 느끼며 자연과 함께 걷고 싶어집니다. 느리게.
    정진도님께서도 안녕하시죠. 느리게 돌아가는 강원도 국도길 참 좋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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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메 2004.09.30 11:22
    '걸어가는 것은 자연과 함께 가는 것.
    들꽃과 함께, 냇물과 함께, 바람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산유화님에 이어 다시 강조하고 새겨보고싶은 묘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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