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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통신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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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덕산에는, 정확히 시천면 사리(絲里) 덕천강가에는 남명의 서재였던 서너칸짜리 산천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세월의 빛바램 속에 산천재는 낡고 헐어 또다시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도록 그것이 남명 당년의 모습에서 과장되지 않았음을 나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한 대목이다.
유 교수가 감탄한 것은 이 산천재 토벽에 그려진 소부와 허유를 상징하는 벽화가 용케 살아있는데 있다.

산천재 마루에 앉아 위쪽을 보면 '산천재' 현판 왼쪽에 농부가 소를 모는 그림, 정면에 신선이 소나무 아래서 바둑을 두는 그림, 오른쪽에는 버드나무 밑에 귀를 씻는 선비와 그 물을 자기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며 소를 끌고 가는 농부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벽화는 낡고 헐어 볼품이 사라진다...(중략) 농부와 소 그림은 어느날 토벽이 떨어진 것을 미장이 아저씨가 양회로 덧바르면서 용케도 소 모양만 살려내고 보수했다'고 한다.

소부와 허유는 누구인가?
허유라는 은자(隱者)는 요 임금으로부터 천하를 맡아달라는 말을 듣고 거절한 뒤, 더러운 말을 들었다고 강물에 귀를 씻었다.
그러자 소부라는 은자는 그 더러운 물을 자기 소에게 먹일 수 없다고 상류 쪽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산천재 토벽에 그려져 있는 선비는 허유, 농부는 소부를 나타낸다.
"남명의 삶과 사상에 걸맞는 그림이다. 남명의 산천재답다"고 유홍준 교수는 이 벽화에 대해 특별히 감탄했다.

덕산은 북쪽이 '연화부수', 남쪽이 '금환낙지'의 명당으로 신선이 사는 곳을 동자에게 묻는다는 뜻의 '송하문동자'가 지명으로 남아있다고 했다.
또한 덕천서원 남쪽 국동마을에는 갈마음수(渴馬飮水)의 명당이 있다 하여 지명이 '음수모퉁이'이고, 이곳을 경계로 하여 위쪽을 '물위'라 하고, 아랫쪽을 '물아래'라 불러왔다.
국동과 원리 마을 뒷산은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曲)과 같다고 하여 구곡산(九曲山)이라고 이름 붙였다 한다.

이곳 덕천강의 명물로 꺽지라는 물고기가 있다. 몸빛은 회갈색이며 머리 외에 7~8개의 윤곽이 확실치 않은 가로무늬가 있다. 성질이 단순 급격하여 낚시로써 낚을 수 있는 고기인데, 육질이 단단하여 생회로 즐겨 먹는다.
용암 이천간이라는 선비는 이 꺽지가 뛰노는 덕천강의 덕산을 이렇게 노래했다.
"복사꽃 따스한 물에 꺽지가 살찌면 강위의 고기 잡는 늙은이는 해질녘에 돌아가네."
복사꽃이 물에 어리는 무릉도원이란 것이다.

덕산은 산수미가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는다. 지리산을 17번이나 돌아보고 마지막 삶터로 이곳을 낙점한 남명 선생이 그 모두를 입증한다.
그러나 산수경관이 좋아서 무릉도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덕산에 은둔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고려 녹사 한유한과 남명 선생은 똑같이 나라의 부름을 받았으나 결코 관리로 나아가지 않았다.
아니 한유한은 더욱 깊숙한 산속으로 도망을 가서 두번 다시 이 세상에 얼굴을 비치지 아니했다.

남명은 어떠했던가?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것은 물론, 사약을 준비하고 직언을 했다.
55세 때 단성현감에 제수됐을 때 이를 사양하는 소를 올렸는데, '전하의 국사는 이미 그릇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무너졌으며, 천의는 이미 저버렸고, 인심은 이미 떠났다'고 썼다.
문정대비의 수렴청정을 지적, '자전은 생각이 깊지만 궁궐 속의 한 과부에 불과하다"고 통렬하게 비난했다.
절대군주 시대에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진정한 무릉도원은 마음을 비운 이들에게만 존재할 수 있다.
'빈손으로 찾아들었지만, 맑은 물 십리에 흐르니 먹고도 남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덕산 사리 동쪽 산은 수양산이다. 저 은나라의 산림처사 백이(伯夷) 숙제(叔齊)가 숨어 살았던 곳이 수양산이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치려는 것을 말렸지만 듣지 않자, 두 형제는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가 죽었다고 하지 않던가.
덕산도 이 수양산 앞을 지나야 들어간다.

남명의 서당인 산천재에선 천왕봉이 정면으로 올려다 보인다.
산천재 토담 밑 양당(兩塘)에는 신천과 삼장천 두 지리산 물줄기가 흘러와 합류한다.
날마다 천왕봉과 양당수를 지켜보며 청정하게 마음을 가다듬었을 남명의 자취는 지금도 선연하게 남아있다.
나라에서 부르는 사륜(絲綸)이 날아들자 수양산이나 구곡산 어느 골짜기로 더욱 깊숙이 숨어든 한유한의 족적도 예사롭게 생각될 수 없다.
그 정신을 몰라선 안 되리라.
(2003년 2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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