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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통신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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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전 님의 200차 지리산 종주를 국제신문 김성한 기자가 동행 취재, 국제신문 6월13일자 '주말&엔'에 3개 면(面)에 걸쳐 와이드 특집보도를 했다. 이 가운데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의 산행 상보를 제외한 소개 기사 부분을 여기에 옮겨본다. 여러 장의 좋은 사진이 실려 있으나 기술적인 문제로 여기 옮기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도 하다.
'최화수의 지리산 통신'에 다른 사람의 글을 그대로 옮겨 온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기사 무단전재 금지'를 명시하고 있으나, 같은 신문사에 선배기자로 근무했던 인연을 앞세워 양해도 받지 않고 글을 옮깁니다. 해량을 바랍니다.]  
.......................................................................................  
(전략)

지리산은 한국인에게 있어 산 그 너머의 의미로 통합니다. 그러기에 지리산은 산을 밟은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숱한 사연과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지리산이 품은 남다른 산꾼 한 명의 발걸음에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부산 출신의 산꾼 이광전 씨(66). 지리산에 뿌리를 두지도 그렇다고 직업 산악인도 아닌 그가 최근 지리산 종주 200회란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지리산 종주란 구름이 발 아래에 깔리는 노고단(1507m)과 천왕봉(1915m)을 잇는 백리 능선을 포함해 40㎞가 넘는 거친 산길을 오르내려야 하는 극한 도전이자 모험입니다.

까마득한 지리산 산길에 대체 뭐가 있기에 그를 그곳으로 불러들였을까요. 그저 "산이 좋아 오른 것 뿐"이라며 수줍게 웃는 그와 함께 2박3일간 그의 200회 종주 산행에 주말&이 따라 올랐습니다. 이번 그의 200번째 종주길은 취재기자에겐 생애 첫 지리산 종주이기도 합니다.

◆ 지리산 200회 종주 기록한 이광전 씨
                     - 오늘도 배낭을 꾸리는 영원한 지리산 청년
    
"아리아리!."
지리산 자락에서 이런 감탄사를 듣게 된다면 십중팔구 그가 주변에 있다는 뜻이다. '아리'는 '메아리'를 줄여 쓴 표현. 첫 지리산 종주 이래 일행을 찾을 때 늘상 사용해 온 그의 암구어다.

산악인 이광전(66) 씨. 대한산악연맹 부산시 자문위원이기도 한 그에게 며칠전 화려한 수식어 하나가 붙었다. '지리산을 200회 종주한 산꾼'. 국내 첫 기록임에 의심할 여지는 없다. 37년 세월동안 가없는 지리산 능선길을 밟은 그의 발자취가 켜켜이 쌓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산악부원으로 꽤 이름을 알렸던 그가 지리산 종주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71년 초여름이었다. 예비군 동원훈련을 간다며 둘러대고 친구와 둘이서 떠난 7일간의 지리산 종주가 시작이었다. 지루한 며칠의 산행을 마치고 칠흑의 텐트 밖에서 혼자 지켜본 지리산의 밤 풍경. 무수히 내리는 별빛, 어슴푸레 밀려오는 바람결,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와 새들의 여린 울음…. 그렇게 또 다른 세상에 눈을 떴고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갈증을 풀듯 간간이 가던 종주는 1981년, 10여 년을 다닌 섬유회사를 그만두고 주말에 시간을 내기가 용이한 동아대학교 행정직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본격화됐다.

그가 지리산 종주를 감행하던 초창기에는 산행 장비나 여건이 턱없이 열악하고 부족한 시절이었다. 마땅한 대피소가 없어 군용텐트와 식량을 메고 능선을 타야 했고 한겨울에는 군화에 러셀과 아이젠을 묶어 눈밭을 걸었다. 마을 주민이 모는 소달구지를 얻어 타기도 하고 제대로 된 지도 한 장이 없어 산 속에서 나침반을 두드리며 길을 잡았다. 야간통금으로 경찰과 군부대의 허락을 받은 뒤 새벽 산행에 나서기도 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지리산. 그는 왜 이토록 지리산에 집착하며 긴 세월을 바쳤던 걸까. 자신이 '산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산병 나으려면 산으로 가야 해." 거친 산길을 다니면서 시련과 고통 뒤에 찾아 오는 희열, 지리산의 웅숭깊은 대자연 그리고 그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바로 열병을 다스리는 치료약이란 뜻이다.

지리산에서 그는 기이한 경험도 겪었다. 1999년 10월 천왕봉에 올랐을 때는 쌍무지개를 만났고 저녁 석양에 천왕봉이 덕산 쪽으로 옮겨진 것 같은 신기루도 체험했다. "지리산은 아무리 많이 가도 매순간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게 그가 말하는 지리산의 숨겨진 매력이다.

지리산에 뿌리를 내린 토박이보다 더 지리산을 잘 알기에 산을 향한 외경심은 남다르다. 이번 200회 종주 때 천왕봉 아래에서 미끄러져 왼쪽 팔에 굵은 상처를 남긴 그는 여태 자신이 산을 오른 게 아니라 산이 자신을 받아들였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지난 3월 199차 종주 때는 눈길을 헤치고 치밭목을 거쳐 천왕봉 턱밑까지 올랐지만 눈밭이 여의치 않자 두말 없이 종주를 포기했다. "산이 어디가나, 다음에 오면 되지."

배낭 안에 늘 수동 필름카메라를 챙겨 다니는 그는 그간의 산행기록을 모아 얼마전 '지금도 지리산과 연애중'이란 책을 펴냈다. 200차 종주를 마치고 대원사 아래 식당에서 동료 산악인 100여 명이 모여 그의 출판기념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갈수록 산 타는 게 힘에 부친다"는 그는 그래도 "지리산을 향한 발걸음은 늦출 수 없다"며 부단한 종주 의지를 내비쳤다. "평지보다 높아서 오른 게 산이었습니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뗐을 뿐입니다." 저서대로 그는 지금도 지리산과 열렬히 연애를 하고 있는 중이다.

지난 7일 천왕봉을 오른 뒤 그와 함께 치밭목으로 내려오던 산길에서 문득 "산행은 가끔 뒤도 돌아봐야 한다"며 앞서 걷던 기자를 불러 세웠다. 그의 말대로 좀전에는 없던 거대한 운해더미가 산을 집어삼킬듯 빠르게 밀려오고 있었다. 뒤돌아 보지 않았다면 결코 알지 못할 비경이었다.

(후략)
                                                                        (국제신문 김성한 기자)
  • ?
    섬호정 2008.07.14 22:19
    지금도 지리산과 연애중, 이광전 선생님의 지리산 200회 종주 기념~
    가히 기네스 북 으로 가는 사건입니다
    김성한 기자님! 멋진 종주기사에 감사합니다

    전화드렸더니 번호가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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