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호랑이 담배 피던' 종주산행(8)

3박4일 동안 함께 행동하며 작은 텐트 안에서 잠까지 자야 한다면 처음 만난 총각 처녀들로선 여간 가슴이 설레지 않을 것이다. 그 때문에 조편성을 할 때 모두들 긴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불행하게도(?) 기혼자여서 그런 설렘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다만 나는 지리산 종주를 함께 하는 선남선녀가 좋은 인연을 맺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85년으로 기억된다. 주말 일일산행에 자주 나오는 참한 규수 K가 있었다. 병원에 근무하는 그녀는 아주 이쁘고 착했다. 하지만 수줍음이 많아 주말 산행 때도 낯선 사람과는 말을 잘 나누지 않았다. 그녀가 지리산 종주에 참가하면서 나에게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낯선 남자와 한 조가 될 수 없다며 나와 같은 조에 편성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종주 희망자를 접수하면서 아주 멋진 한 총각을 발견했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잘생긴 P란 젊은이로 무역회사에 다니고 있는 것도 알아냈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K양과 P군을 한 조로 편성했다. 조편성이 끝나자 K양이 나에게 다가와 종주산행을 포기하겠다고 펄쩍 뛰었다. 낯선 남자와 한 텐트에서 어찌 지내냐며 울려고 했다.

"1 대 1도 아니고 4명이 같은 조이니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이상하다"고 말을 둘러대며 K양을 간신히 달랬다. 종주 첫날 저녁 화엄사 여관촌에서 유흥시간을 가질 때 K양은 자기 조를 벗어나 나의 옆자리를 고집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산행이 시작되면서부터 별수없이 그녀도 P군 등 조원들과 함께 조별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둘쨋날, 셋째날은 화개재와 세석고원에서 야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K양은 화개재에서 텐트에 들어가지 않고 바깥쪽을 맴돌았다. P군 또한 텐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따로 맴도는 것이 아니겠는가. 보다 못한 내가 P군을 불러 야단을 쳤다. "조장이 조원 하나 통제 못하고 무슨 종주를 한다는 거냐? 손을 끌고라도 텐트 안으로 들어가라니까!"

그 다음날 세석고원에선 K양도 P군도 텐트를 사이에 두고 맴을 돌지 않았다. 천왕봉에 올랐을 때는 두 사람이 다정하게 사진도 찍는 것이었다. 그 3개월 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K, P 부부는 아들 둘을 낳았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가끔 K양, 아니 K부인이 편지를 보내오기도 한다. 종주산행이 맺은 첫 결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