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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산책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조회 수 5138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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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어지러운 것을 난세(亂世)라고 하지요.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신라 말기가 어지럽기 짝이없는 난세였어요. 조정이 무능하여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관리들이 국정을 농단하면서 부패와 사치로 천년 사직을 좀먹었지요. 핍박을 견디다 못한 민중들이 도처에서 봉기를 일으켰답니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석학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은 이처럼 문란한 정치와 사회의 혼란상을 바로잡기 위한 시무책(時務策)을 진성여왕에게 올려 개혁할 것을 건의했지만, 묵살이 된 채 오히려 모함을 받게 됐어요.

그이는 어지러운 현실과 등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산에 한번 들면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청산맹약시(靑山盟約詩)'를 남기고 세상(경주)으로부터 아주 떠나게 되지요. 현실의 정치세계를 떠난 그이는 오직 자연과 더불어 신선처럼 살 수 있는 이상향을 찾아나섰습니다. 그이는 가야산 등을 거쳐 마침내 지리산 화개동천의 신흥(神興)에 이르러 무거운 발걸음을 멈추었지요. 이곳이야말로 자신이 찾던 이상향으로 여겼던지 그이는 큰 바위에 '三神洞(심신동)'이란 글자를 새겼어요.

삼신동이란 청학동(靑鶴洞)과 그 개념이 비슷하지요. 죽어서 신선이 된다는 곳이 청학동, 삼신동은 살아서 신선이 되는 곳으로 인식하는 점이 다릅니다. 청학동이 현실적인 집단의 이상향이라면, 삼신동은 미학적인 개인의 이상향이라고 하겠네요. 최치원의 '三神洞' 각자(刻字)가 새겨져 있는 곳은 행정구역으로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신흥부락이예요. 지리산 연동골 계류가 화개천과 합쳐치기 바로 직전에 큰 바위가 있어요. 칠불사로 꺾어지는 도로변, '삼신동산장' 뒤편에 '三神洞' 각자가 있어요.

최치원은 신흥사 앞 화개천에서 현실 세상의 더러운 말을 듣지 않고자 귀를 씻었다고 하지요. 바로 그곳 바위에도 '세이암(洗耳岩)'이란 글자가 새겨졌고, 옛 신흥사(또는 신응사) 자리였던 왕성초등학교 앞에는 그이가 머물 때 꽂아둔 지팡이가 움이나 자랐다는 수령 천년의 푸조나무가 서 있지요. 난세에는 민중들의 삶이 고달플 수밖에 없고, 올바른 뜻도 펴기 어려운 법입니다. 그래서 지난날 많은 선인들이 이상향으로 보았던 지리산 삼신동과 같은 존재가 현대사회에서도 새삼스럽게 돋보이는 거예요.

'신흥사에서 남쪽으로 수십 보 내려가면 동쪽 서쪽 두 시냇물이 모여 하나의 내를 이루는데, 맑은 물이 돌에 부딪히고 꺾여 소리를 내면서 뒤집힐 때마다 물보라가 눈꽃처럼 피어난다. 시내 양 언저리에는 수천 개의 흡사 소와 같고 양과 같은 바윗덩어리가 쭈삣쭈삣한데, 이 돌들은 태초에 하늘이 이렇게 험하게 하여 신령스런 곳에 숨긴 것이리라.' 이곳에서 입산 수도한 서산대사가 남긴 '신흥사 능파각기'의 한 대목이지요. 삼신동의 신령스런 자연 앞에 얼마나 경건한 마음이었는지를 알게 해줍니다.

두 내가 합쳐지는 곳에 긴 돌다리를 놓고 '홍류교(紅流橋)'라 이름하고, 그 위에 다섯 간의 누각을 지어 단청을 곱게 하여 '능파각(凌波閣)'이라 불렀지요. '스님들은 여기서 선의 경지를 찾게 되고, 시인들은 시흥을 짜내고, 도사들은 바람을 이끌어 날렵하게 다녔다'고 합니다. 이곳을 찾은 이인로(李仁老)는 '천암이 다투어서 솟아 있고, 온갖 골짜기에는 맑은 물이 소리내어 흐른다. 대나무 울타리와 때를 입힌 집들이 복숭아꽃 살구꽃에 어리어 정말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닌 듯하다'고 감탄하기도 했어요.

지금의 신흥부락 모습은 옛 선조들이 묘사했던 글들과는 너무나 다르지요.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신흥사 자리에는 초등학교가 들어서 있고, 2차선 포장도로를 내면서 화개천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망가뜨렸는가 하면, 홍류교 능파각 자리에는 삭막한 시멘트 다리가 놓여 있을 뿐이예요. 다닥다닥 들어선 민가에는 '민박'이나 음식점 간판을 어지럽게 달고 있어요. 다만 이곳이 '삼신동'이었다는 그 흔적이나 분위기가 자연석에 새겨둔 글씨와 노거수(老巨樹)로 쓸쓸하게 남아 있는 게 고작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이 삼신동에 머물던 고승대덕과 시인묵객의 문향을 더듬어보면 눈과 마음이 새롭게 열려집니다. 신라의 고승 삼법화상 진감국사, 고려의 대각국사와 이인로, 조선의 벽계 벽송 부용 경성 처영 부휴 벽암 서산대사, 또 정여창 김일손 조식 이정 기대성 이륙 등의 숨결이 이곳 일대에 배어 있지요. 그냥 눈에 비춰지는 사물의 현상을 바라보는 것만이 전부일 수는 없어요.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보는 눈, 들리지 않는 말을 찾아 듣는 귀, 거기에서 선인들의 숨결과 체취를 느끼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지요.

옛 선인들의 체취를 더듬어 보면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삼신동 소묘'가 절로 떠오릅니다. '새로 내린 비로 불어난 시내는 급류를 이루어 성난 물결이 바위에 부딪히며 물보라를 튀긴다. 흡사 만섬의 구슬이 쏟아졌다가 꺼지 듯, 은하를 끊어 뭇 별이 한꺼번에 쏟아지듯 하고, 다시 신선들이 잔치를 마친 곳에 비단 자리만 남아 펼쳐진 것 같기도 하다.' 그렇습니다. 신흥부락 앞 화개동천 물흐름은 옛날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네요. 난세의 아픔을 삼신동 선인들 숨결에서 추스리는 지혜가 아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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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메거사 2002.04.23 17:20
    그토록 깊은 내력의 화개동천이요, 삼신동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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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화수 2002.04.23 17:47
    솔메거사님의 추임새에 그냥 신바람이 나서 정신없이 읊조리고 있습니다. 잘 못 쓴 내용은 가차없이 질타해주시기 바랍니다. 거사님, 언제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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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도 2003.05.22 09:39
    삼신봉 가기전에 읽어야 했는데 .....
    지리산등산은 역사의산책 인것같네요 최화수선생님의 글을 읽노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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