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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산책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조회 수 5607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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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전에 임금의 명에 따라 곽재우, 이순신, 김덕령 등 명장을 천거한 이는 정승 정탁(鄭琢)이었습니다.
그이는 젊었을 때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을 뵈었는데, 선생은 “내 집에 소 한 마리가 있는데 끌고가게나” 했다는 군요.
집에 소가 없으면서 끌고가라니, 어리둥절해하는 그에게 남명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자네의 언어와 의기가 너무 민첩하고 날카로우니 날랜 말만 같아 넘어지기 쉬운지라 더디고 둔한 것을 참작하여야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므로 내가 소를 준다는 것일세.”
그 후 정탁은 자신이 대성한 것은 남명이 선물한 '마음의 소' 때문이라고 말했었지요.

남명은 벼슬을 바라지 않아 평생 과거를 보지 않았고, 임금이 내리는 관직도 모두 사양했답니다. 경제적으로는 곤궁했지만, 산림에 묻혀 책보고 글쓰는 것으로 일생을 보냈습니다.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에만 전념했던 대쪽같은 선비가 곧 남명이었지요.

남명이 지리산에 귀의하여 산림처사로 살았던 발자취는 '산천재(山天齋)'의 작고 소박한 모습이 무엇보다 잘 전해줍니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 덕천강변의 산천재 뜨락에선 천왕봉이 바로 올려다 보입니다. 천왕봉과 '양단수'를 읊은 그이의 시들이 저절로 떠오르기도 합니다.

2001년 8월, 남명 탄생 500돌을 맞아 대규모 국제학술대회가 덕산 일원에서 열렸었지요.
경상남도는 이를 계기로 수십억원의 예산을 들여 산천재 일원의 성역화 작업에 나섰습니다. 대규모 기념관을 건립하고 있고, 남명 선생 묘소로 오르는 도로도 개설했어요.
그에 앞서 기념관 앞에 남명 선생의 대형 조각상을 먼저 세웠답니다.

하지만 그 조각상이 당혹감을 안겨줍니다. 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는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의 동상과 같은 모양입니다. 산림처사 남명의 모습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듯합니다. 더구나 높은 단 위에서 하늘을 떠받들듯 하고 서있는 남명의 전신상(全身像)의 황당한 느낌이라니!

'콩 세말' 이야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경우입니다.
한 사람의 명창이 탄생하기까지는 살을 도려내는 것 이상의 엄청난 노력을 요구합니다. 목청을 틔우기까지 폭포수 앞에서 수없이 피를 토해내기도 하지요. '콩 세말'은 강조 어법이기는 하지만, 결코 과장이나 가식은 아닌 것이지요.
한편으로 조각상이나 동상의 크기가 그 인물의 위대성과 정비례한다는 법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남명의 경우 너무 큰 조각상이 산림처사로 일관한 그이의 정신세계를 오히려 욕되게 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남명은 고향의 집과 전답 등을 죄다 버리고 빈손으로 지리산에 들어왔습니다. 그이는 먹을 양식마저 없었지만, 십리에 걸쳐 맑은 물이 흐르니 먹고도 남겠다고 시를 지어 노래했었지요.
남명은 임금이 내린 단성현감의 벼슬자리도 거부했습니다. 그는 오히려 명종에게 "자전(임금의 모후)은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 전하는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에 불과하다"는 저 유명한, 죽음을 무릅쓴 상소를 올렸던 것입니다.

남명이 후학들을 가르친 서당 산천재!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 담장 옆을 적시고 흐르던 덕천강도 직강공사로 곡선의 아름다움을 잃고, 산천재 뒤편 도로 건너에는 대규모 기념관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빛이 바래고 허름한 산천재 건물은 볼품없는 옛모습 그대로입니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이 산천재가 남명 선생의 체취를 진정으로 전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 산천재 토벽에 그려진 소부와 허유의 그림은 그이의 정신세계를 그대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산천재가 좋은 것은 옛 모습 그대로인 때문이겠지요.
만약 화려하게, 새롭게 고쳐 지은 건축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초라하고 소박하고 허름해서 더 좋은 산천재가 아닐까요.

그런데 신축 기념관 앞의 남명 조각상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동상과 같은 것은 너무 어울리지 않는 듯하네요.
남명 선생이 살아계신다면 자신의 조각상에 대경실색하지 않을까 합니다.

남명 선생의 이 조각상과 지척지간에 역시 크기로 한몫 하려는 듯 거대하게 세운 동상과 조각상이 또 있습니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성철생가의 성철 동상, 그리고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에 주민들이 새천년을 맞이하며 만들어 세운 성모석상이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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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희 2003.09.09 18:06
    초라하고 소박함 속에 진실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는데, 우리들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많이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최선생님, 즐거운 명절 보내시길 바랍니다.
    건강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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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거사 2003.09.10 11:12
    남명선생 동상 보지는 않았지만 누가 세웠는지?참 안타까운 이야기군요.악양 서희가 살던 참판댁도(픽션을 기념한 것이지만) 가보고 참 안타깝더군요.
  • ?
    솔메 2003.09.15 11:49
    시천, 덕천강줄기가 변하듯 산천재주변도 물신의 그림자만 덩실하게 내보이고 있다하니 남명선생이 현신한다면 무슨 표정으로 돌아보실까 하는 생각입니다.. 소부와 허유의 고사에서 오늘날의 저는 무엇을 얻고있는지 부끄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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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호정 2003.11.29 03:58
    이 해도 다 저물어 가는군요 오랜 덴버살이로 타국의 사게를 보며 어찌 깊은 지리산 운치만이야 하겠어요
    산천재 남명선생 동상 이야기로, 지난해의 덕산 골 개울물소리를 떠올리며 안부 여쭙니다 도명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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