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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올해도 한 장의 달력만을 남겨둔 채 지나가는가 봅니다.

시절이 덧없다는 사실이 어제오늘의 깨닫은 바는 아니지만 하루

하루 너무 쫒기는 생활에 젖어있다 보니 문득 세삼스럽게

느끼고 있습니다.

올 한해도 이제 한달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급박함이 나를 웬지 모

르게 조급하게 만드는군요. 지리산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뭔가 이룩해 놓은 일도 없이 또 한해를 마감한다는 허망함을 조금

이라도 채워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면서 말입니다.


요즘 지리산 주능선은 출입이 통제된답니다. 다행이 지리산 사진을

찍는 동료가 있어 입산허가를 받아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순전히 행운이

지요. 12월의 첫 일요일을 맞는 꼭두새벽 연곡사계곡의 농평마을을 향했

습니다. 08시30분 농평의 아침은 더없이 상큼했습니다. 가을이 떠나갔음

을 아쉬워하는듯 아직도 그 여운을 떨치지 못하고 포근한 아침공기가 우

리를 맞이합니다. 하늘은 천고마비의 계절마냥 높습니다. 전형적인 가을

날씨 같습니다. 이 척박하고 깊디깊은 지리산의 산중,농평마을

에도 번듯한 새집이 지어지고 있더군요. 음식점을짓고 있는지 "농월관

(弄月館)"이라는 이름이 이채롭습니다. 기껏해야 7~8호 밖에는 안되는

미니마을인데도 궁궐 같은 요정이 지어지고 있으니 정말 아이러니하게만

느껴집니다. 누가이용하게 될는지... 알듯말듯 합니다. 교회도 있답니다.

지금도 목회활동이 계속되는지는 모르겠구요. 덩그러히 세워진 십자가가

웬지 모르게 조금은 처연하게 조금은 을씨년스럽게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텅빈마을에 십자가는 더욱 높게만 보이고 그러다가 하늘을 찌르는 건 아

닌지 모르겠습니다.

농평마을의 역사는 참으로 복잡하답니다.

마을이 생긴 건 임진왜란 때 왜놈들을 피해 이곳으로사람들이 숨어들어

왔다는데... 그후 꽤나 번창했나봅니다. 30~40호 쯤 되는 마을이 있었다

니까요. 그러다가 해방이후 격동기를 맞이하면서 농평마을도 정말이지

민족과 나라가 겪었던 격동을 더욱 크고, 깊게 겪게 됩니다. 낮과 밤의

지배가 갈리고 매일 같이 마을주민 수가 변해 갔다고 합니다. 낮에는 군

인들과 경찰이 들어오고, 밤이 되면 산사람들의 차지가 되는... 그런 혼

돈의 세월에 마을사람들이 온전했겠습니까? 급격하게 인구는 줄어들고

너나없이 마을을 떠납니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정확치는 않지만

아마도 그후에 여기저기서 흘러 들어온 사람들일 겁니다.

이곳 사람들을 보면 낮선이를 보자마자 살피는 기색이 완연합니다.

나만 느끼는 감정은 아닌가 보더라구요. 그런데... 또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지리산 속의 대부분의 마을들이 다들 잘 사는데도 이곳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죠. 주변에 계곡이 없어서 여름이면 찾아오는 사람이 없고,

마을뒷산에 고로쇠나무도 없는지 봄이 되어도 썰렁하기는 마찬가지.  

변변한 농토가 없는건 당연하고...

그러니 사람들의 안색이 늘 밝아 보이지가 않거든요. 해서 지리산을 그렇

게 찾아 다니면서도 이곳은 자주 찾지 않는답니다. 따지고보면 이곳 만큼

우리 근대사의 질곡을 적나라하게 나타내 보이는 곳도 없을 성 싶은데 말

입니다. 농평마을이 주는 어감부터 농사를 평안하게 짓는다는 의미(農平)

이든, 평화를 가지고 논다는 뜻(弄平)이든간에 차분하고 긍정적으로만은

느껴지지 않거든요. 이 곳 사람들이 종사하는 생업은 주로 꿀벌을 치고

약초를 캐고 나물등속을 채취해서 가용이나마 쓰는 정도랍니다. 하나같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아닙니다. 요즘 유행하는 사조라고할만한 신자유주

의 경제방식으로 보면 정말이지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힘든 노동에

찌든 모습, 까맣게 그을려 있으면서도 핏기가 없는 얼굴들, 그리고 하나같

이 노인들만 보게 됩니다. 지금은 망해가는 산골농촌의 전형을 보고 있는듯

합니다.

그런데도 새로 요정이 들어오고, 마을 뒷편에서는 보신탕용 똥개를 사육하

는 곳도 들어 와있더라구요. 불란서의 브리짓 바드로인가 하는 그 유방하고

눈이 커서 젊은 날 한가락했다는 쉰 여배우 있잖아요? 그 여자가 우리나라

사람 개고기 먹는 걸 그렇게 질색을 하고 세계 여론화하기 위해 애를 무진

쓰는가 보던데... 그래서 개사육장이 이 머나먼 산골 동네까지 밀려 들어왔

는지 모르겠지만요. 결국은 이곳도 도회인들의 놀이터가 되가는가 봅니다.

마을을 위해서는 그나마 다행일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되면 농평의

역사는 사라지고, 근대사의 우리의 질곡의 터널도 점점 그 농도를 잃고 빛

을 바래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결국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농평마을을 나오면서 부터 마음은 급해지고 거칠고 가파른 오르막을 몇차

례 오르고나니 근 30분 쯤 지나 통꼭봉에 이릅니다. 발아래로 내려다 본

농평마을에서는 이제야 아침밥을 짓는지 한두 집의 굴뚝위로 연기가 길게

피어 오르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여기저기 빨치산들의 참호같은 시설물이

눈에 띠고 과거 이곳이 심상치 않는 격전지였음을 보여줍니다.

통꼭봉을 지나면 금새 불무장등에 발을 얹게 됩니다.

능선길이 당분간 계속 이어지고요. 능선을 사이에 두고 올라가면서 왼편은

전남, 오른편은 경남으로 갈립니다. 같은 산 속에 조그만 산길 하나를 사이

에 두고도 서로 갈리어 싸우는 모습이 어이없습니다. 과거 이곳을 무대로

있었던 싸움은 이념과 신조라도 있었기에 추악한 싸움이라는 말은 듣지 않

습니다. 지금의 지역다툼은 감정싸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

고 보면 지금을 사는 우리가 수십년전의 우리들 선배들보다 훨씬 못났다고

보아야지요.

그래도 오롯하게 난 산길위로 수북하게 쌓인 낙엽이 포근한 융단처럼 부드

럽습니다. 잎사귀를 잃어버린 나무가지에서는 바닥의 낙엽을 태우는 듯한

목향이 그윽합니다. 산공기는 여전히 맑습니다.                

                
불무장등을 따라 오라가는데 잘 가꾸어진 묘가 계속 나타납니다. 이곳에

명당이 있다고 알려져 그런가 봅니다. 이 깊은 곳까지 조상을 모시는 후

손들은 과연 돌아가신 선조들을 위해서일지 아니면 살아있는 자신을 위

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죽어 송장이 되어서도 산사람의 이기심과

욕심 때문에 고생을 하는구나하는 생각을 지울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사

연많은 세번째 묘를 지나면서 다시 평탄한 능선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조금 더 올라가니 또 묘가 나타나는데 전혀 관리가 안되어 거의 무너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름모를 빨치산의 묘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곳을 빨치산루트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빨치산루트를 따라서

양 옆으로는 무수한 샛길이 보입니다. 피난길이라 부르는 곳이지요. 산행

중에 문제가 생기면 그 길을 따라 피신을 하는 곳인데 지금은 밀렵꾼들이

주로 이용하는 길이라고 하는군요. 옛날에는 빨치산들이 야간에 마을로

하산할 때 이용했다고 하구요.

그렇고 보면 우리들의 민초들에게는 "고난의길"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길

의 의미는 그렇게 다양하답니다. 인간이 이루어놓은 똑같은 대상도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죠. 칼을 강도가 쓰면 흉기이

지만 의사가 쓰면 도구가 되고, 무사가 쓰면 무기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닐까요?

불무장등의 가장 높은 고개를 앞두고 다시 가파른 길은 계속 이어지고 있

습니다. 키높이의 산죽잎이 얼굴을 할퀴고 있습니다. 조금은 따끔거리는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죠. 우리가 지금 겪는 고생은.

목숨을 내놓고 가는길은 아니니까요. 출발한지 3시간여만에 불무장등의

가장 높은 봉우리 곁을 지납니다.


눈 앞에는 삼도봉의 모습과 반야봉의 위용이 시원스레 펼쳐집니다. 그러

면서 다시 평탄한 능선길이 시작됩니다. 길옆으로는 피난로가 수없이 이

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산행을 하느 사람들이 그 옆으로 함부로 내려가

다가는 큰 경을 치르게 된답니다. 자신이 없는 길은 피해야겠지요.

길이 매우 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도(正道)를 가야 되는가

봅니다. 정도를 따르는 것은 당장은 조금 손해가 될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는 승리하는 길임을 우리는 수없이 확인하면서 살아가잖아요.

길이 햇갈리면 나무가지에 묶인 리본을 보면서 찾아갑니다. 인간의 발자국

은 그렇게 위대합니다. 누군인가 거쳐갔던 길을 따르면 그래도 안전하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불무장등은 이념과 신념이 충돌했던 곳입니다.

그 대결은 상대방에 대한 증오와 상대방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게 했죠.

분열, 미움, 파괴의 부정적 가치가 지배했던 현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불무장등을 지나치면 삼도봉에 이르릅니다. 삼도봉은 3곳으로 갈라진 땅

을 하나로 묶는 곳이랍니다. 대결과 증오의 긴 루트를 화합과 사랑으로

바꾸는 상징을 부여하고 싶습니다. 삼도봉 위에 세워진 조그마한 쇠탑이

거칠게 불어오는 찬바람에도 든든한 위용으로 다가섭니다. 4시간도 안되

는 짧은 시간에 증오와 사랑의 의미를 함께 깨닫고 있는 나는 분명 행복

한 사람입니다. 알수 없는 행복감에 사로 잡힙니다. 극치감이라고 표현해

야 하는걸까요. 이런 기분을 맛보기 위해서 황모라는 여배우는 뽕을 몇대

를 맞았다는데...

삼도봉위에서 차디찬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지리산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화개재로 내려와서 먼 옛날 소금장수들이 이곳

을 넘나드며 등짐을 지었다는 길로 내려갈 겁니다. 화개장터 위편의 목통

골로 가야 됩니다. 산짐승들을 보호하기 위해 통제구역으로 지정이 되어

있다는 표말이 보입니다. 내려갈 때는 산짐승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는

해야 되겠죠. 천천히 소리없이 하산할 겁니다.


내려오는 길도 분명 거칠디 거친 지리산야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조용

히 기습작전하듯 내려오니 세시간여가 걸립니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우렁찹니다. 이 혹독한 겨울가뭄에도 지리산에는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듯

물이 넘치고 있습니다. 그 만큼 지리산의 품이 넓다는 뜻이 아닐까요?

넓은 품이 지리산의 자애로운 성정을 낳고 어머니같은 심성을 갖게 했는가

봅니다. 그렇기에 나는 늘 지리산을 어머니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오후 3시 반 쯤 목통골에 도착하였습니다. 벌써 태양은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고, 초겨울 찬바람은 여전히 매서웠습니다. 그렇지만 올려다 본 지리산

은 부드러운 능선과 아늑한 실루엣을 내보이며 어머니의 자애로움을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끝)      
  


  • ?
    솔메거사 2001.12.03 14:46
    다시한번 찾아가고싶은 길, 근현대사의 질곡이 켜켜이 쌓여있는길... 잘 읽었습니다.!
  • ?
    오은주 2001.12.04 00:13
    불무장등에서 목통골까지...짧은시간의 증오와 사랑... 님의... 그... 깨달음의 행복도 주능선에 오른 행운?도 부러움입니다...글 잘 읽었습니다...행복하십시요!
  • ?
    산수국 2001.12.20 16:53
    내옆의 친구에게,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듯 그렇게 자연스레 내려쓴 글이 참 좋습니다. 부럽고, 또 부럽고.. 감탄하고.. 좋은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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