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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행기>지리산산행기

2007.04.12 11:23

봄, 그리고 지리산

조회 수 3778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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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그리고 지리산


완연한 봄. 지리산 곁가지 황장산을 오르고 있었다. 섬진강변에서부터 오르고 있었으니 만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날씨마저 따듯하여 이마엔 송글송글 땀방울이 솟아 올랐다.

얼마를 올랐을까 법하마을에서 올라오는 갈림길을 지나고 고즈넉한 송림 숲을 지나고 있는데 낡고 허름한 배낭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아닌 다른 산꾼이 이 산을 찾았나 싶어 처음엔 반갑기도 했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산꾼의 배낭은 분명 아니었다.

모양새도 다르거니와 어찌보면 그저 수명을 다하고 버려진 배낭 같기도 하고, 아니면 누군가가 산길을 헤매다가 잃어버린 채 다시 찾아 나서지 않아 상당기간 이슬을 쓰고 지내온 모양새였다.

걸어온 거리도 있고 땀도 들일겸 자리에 주저 앉잤다. 한참만에야 그 주인을 알 수 있었다. 숲속에서 한 웅큼 고사리를 쥐고 나오는 나이 많으신 어르신이었다. 말하자면 나물을 채취하시는 동네어르신의 낡은 배낭이었던 것이다. 하긴 취도 나오기 이른 때이니 이 시기에 채취할 수 있는 것이 두릅과 고사리 정도였을 것이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허리 잘린 고사리 밑둥이 제법 보였다. 왠지 모르게 남의 농장에 허락없이 들어왔다가 들킨 사람처럼 마음이 움츠러들어 넙죽 인사부터 드리고는 말을 걸었다

“뭐 채취하세요?”

“고사리”

“시내에 중국산도 엄청 많은데 꺾어서 파실만큼 양이 되나요?”

“없어서 못팔아”

대답이 너무 단호했다. 그 나이에 일삼아 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저 크지도 않은 배낭 가득 담아 내려간다해도 삶고 말려서 장에 내다파는 수고를 거쳐야 손주들 간식거리나 사줄 수 있는 돈푼이나 만질지 싶지 않은데 그 짧은 대답의 뉘앙스가 다시 궁금해 졌다.

“돈이 좀 되나보죠?”

“그럼, 딴디꺼보단 훨씬 더 쳐주제, 글고 중국산 그건 고사리도 아녀”

“왜 더 쳐주는데요?”

“지리산꺼잖여”

난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맞다 그 고사리는 지리산 것 이었다.

자기 앞에 큰 감 먼저 놓으려는 지금 세상에서, 아니 혹세무민에 눈꼬리 치켜뜨는 세상에서 저 고사리가 장에 나가 그 값을 한다는데 ‘지리산꺼’ 그보다 더 함축적인 말이 있을까? 난 더 이상 할말도, 들을 말도 잃은채 앉자있었다.



황장산을 지나 모암마을로 방향을 꺾었다. 능선길이 끝날 즈음 갑자기 시야가 트이더니 차밭이 보였다.

그 면적이 얼마나 넓었는지 그 골짝 안쪽, 아니 그 건너 골짝까지 보이는 곳은 모두, 나무가 서있을 만한 경사에는 모두 차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차 잎을 따는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한편 우리에게는 다시 한번 남의 밭을 허가없이 들어와 가로질러 나가는 꼴이 되었으니 주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근데 그런 생각도 잠시, 이 넓은 차밭에 일손이 없다는게 이상했다.

지금 찻잎은 우전이다. 곡우이전이 따서 만들기 때문에 가장 비싸다는 시기이다. 올해 첫 순이므로 지난 겨울을 응집한 첫물, 그야말로 작설雀舌인 것이다.

예전엔 화개천 건너 산비탈에 심어진 차밭에서 하루종일 따낸 찻잎이 도르레를 통해 화개천을 건너오던 모습은 추억꺼리가 되었다.

그러니 우리 같은 범인의 눈에는 찻잎을 따는 사람이 없다는 건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동네가 저만치 보일즈음 할머니 한분이 지나가신다. 분명 차밭에서 일하고 내려오는 차림새였다. 차밭이 있냐고 여쭤보니 많다고 하신다. 연세는 자그마치 여든이 넘었다고...

“근데 왜 찻잎 따는 사람이 없어요?”

“요즘 심들어서 이런 일 하는 사람 구허기가 보통이 아녀”

“그럼 우전은 못하시고 세작부터 하시겠네요”

“그냥 있는데로 하지 뭐, 나 같은 늙은이는 평생 이 팔자라~”

“그래도 저렇게 밭이 넓은데 속상하지 않으세요”

“아들딸 다나가고 집집마다 늙은이만 있는디 어쩔거여 내 손만큼 따서 만드는 거지”

예까지도 욕심이 없다는 뜻인지 시름이 깊다는 예긴지 정황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여든이 넘은 연세, 산비탈을 일구어 만들어놓은 차밭, 따서 운반하고, 덕어내고, 말리고, 그러길 아홉 번, 젊은 사람이라도 힘겨워할 그 일들이 갑자기 내 눈 앞에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그러면 수입이 얼마되지 않찮아요”

“돈은 밸 차이 없어”

“아니 찻잎 딸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지리산꺼잔여, 그리고...”

그새 잊고 있었다. 지리산에서 내려오면서 이곳이 지리산이라는 것을...

아침에 그렇게 한방 맞고는 아직 그 펀치 드링크가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할머니의 그 뒷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리산 것인데’ 그 뒷말은 의미가 없었다.

다만 그 할머니 댁에 잠시 들렀을 땐 솜씨있는 장인의 손길이 머문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새로이 아래채를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그 방 한가운데는 동다송이라도 읍조릴 줄 아는 다인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찻상과 다기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시간이 일러 화개장터에 들렀다. 다니던 찻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조성된 장터지만 그래도 옛 멋을 그런대로 살려둔 탓인지 그리 낮설지가 않은 곳이다. 습관처럼 장터를 둘러 보았다.

고만고만한 보자기에 펼쳐놓고 흥정을 하는 시골장터는 입심 하나가 가격을 좌우하기도 한다. 대도시 경매장처럼 요란하고 치열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두릅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값을 물었다.

“얼마예요?”“삼천원”

아니 겨우 손바닥만한 바구니에 얹혀진 두릅 한 줌이 삼천원이라니 좀 비싸지 싶었다.

“에이~ 비싸네”

“지리산꺼예요”

또 한방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이 곳도 지리산이 맞았다. 저 두릅도 지리산 것이 맞았다. 설령 집 뒤 텃밭에서 따왔을 지리도 그 두릅은 지리산 것이 맞았다. 앞은 강이요 뒤가 산인 동네에서 그 부근 어느 곳이건 땅위에 집이 있다면, 밭이 있다면, 홀로 다니는 뒷동산이 있다면 그곳은 분명 지리산이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은 지리산사람이 맞고, 그곳에서 나온 두릅은 지라산 것이 맞았다.

문득 아침에 만난 어르신 말씀이 떠올랐다

“이 산자락서 평생을 살았는디, 아~ 옛날에는 농사짓는 땅 한 평 없이도 다 먹고 살았어”

집 한 채 없이도, 일굴 땅 한 평 없이도, 아니 아수라 전쟁 속에서도 그들에겐 지리산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살아왔던 것이다. 그저 지리산이 있었기 때문에...

머리 들어 지리산을 다시 바라다보았다.



- 구름모자 -

  • ?
    진로 2007.04.12 14:11
    지리산 냄새가 흠씬 납니다.
    지리산 자주 간다고 지리산꺼는 안될거고 한번을 가더라도
    더럽혀진 심신이 지리산에 들어 정화되기나 했으면 좋겠습니다....^^
  • ?
    아낙네 2007.04.12 16:50
    지리를 아끼고 그리는 마음만으로도 모두가 지리산꺼라 말하며
    엄지 손가락 치켜 세울만 하겠지요? ^^
    이내 흐뭇해지는 마음을 느껴 보네요.
  • ?
    슬기난 2007.04.13 07:37
    왜 지리산이야?
    ????
    그저 지리산이 있기 때문에,,
    오랜만에 뵙는 구름모자님이 요근래 자주찾지 못한
    지리와 마주한듯이 반갑습니다^^*
  • ?
    선경 2007.04.13 09:06
    오브넷도~~지리산꺼 이네요^^*
    한편의 단편영화를 보듯~~~지리산주변의 풍경과
    어울어진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저녁한때입니다
    흙냄새 피어나는 정겨운산행기 감사합니다~~~구름모자님~~
  • ?
    오 해 봉 2007.04.13 22:27
    지리산 밑에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바쁘신 봄날의 일상이군요,
    참 흐뭇한 글을 읽었습니다.
  • ?
    김용규 2007.04.14 20:37
    매끄럽고 잔잔하게 묘사를 잘하시는 구름모자님의 글을 오랫만에 접하게 되네요. 지리산을 사랑하시는 구름모자님의 다음 산행기가 또 기대됩니다.
  • ?
    군자봉 2007.04.15 09:47
    봄철건조기간이라 종주를 못해 아쉬어하고 있습니다...어서 4월이 가고 5월이 왔으면 합니다.
  • ?
    산이 2007.04.20 15:31
    "지리산 꺼쟌여~"
    저도 지리산 토종입니다.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에서 태어났으면 저도 지리산 꺼죠?
    근데 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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