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린 길을 따라 잃어버린 마음 찾아
이 넓은 땅덩어리에서 어느 한 장소가 역사성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물론 5천년의 역사를 가진 유구한 세월 속에서 어느 장소인들 선조들의 발길이 없었겠느냐라고 예기하면 대답할 말이 궁색하기도 하지만 현세까지 그 흔적이 실존하거나 기록으로 남아있다면 그것은 상당한 가치를 지니게 됨을 알기에 부러 하는 말이다.
지리산에서 이 코스가 세상에 회자된 건 극히 이레적인 일이다. 그건 스스로는 도저히 소명할 수 없는 마력에 이끌렸던지 아니면 산에 대한 열정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떠한 자전적 의식의 자각 없이는 시도 자체도 흉내내기 어려운 집념의 산실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배경에야 점필재 김종직선생이 쓴 유두류록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 열정을 다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미 5백 년 전의 기록으로 형용사 구사가 어려운 한문권시대였는데다가 당시의 지명과 장소가 대부분 역사 속에 사라진 상태였다.
따라서 현존하는 기록과 지역주민들의 증언을 근거로 당시 상황을 유추해가며 직접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2년여를 이 산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며 찾아냈으니, 퍼즐처럼 모양새와 밑그림을 요모조모 따져가며 맞춰나가는 일보다는 훨씬 더 어려운 작업이었음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우선 그 흔적의 원본인 김종직의 유두류록에서 그 행로를 살펴보자.
가이드 역할을 맡았던 승려 해공과 법종, 그리고 일행을 대동하고 함양관아를 떠난 김종직은 엄천을 건너 화암-지장사-환희대-선열암-신열암-독녀암-고열암에서 1박한 후 청이당-영랑재-중봉-천왕봉-성모사에서 2박, 통천문-향적사에서 3박, 다시 천왕봉을 올랐다가 중산(제석봉)-세석평원-영신사에서 4박, 영신봉-백무동-등구재를 거쳐 함양관아로 돌아온다.
여기에서 생소한 지명들은 대개가 첫째 날이다. 물론 이후 나오는 청이당, 영랑재, 성모사, 향적사, 영신사 등도 잊혀진 지명이긴 하나 이제는 지리산을 조금만 관심가지고 오르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 수 있는 지명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탐구의 주 무대가 엄천에서 신열암까지였고, 궁극적으로 고증의 문제가 남아있긴 하지만 현재까지 찾아진 장소와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는걸 보면 분명 성공한 답사이자 새로운 발굴임에는 틀림없다. 그만큼 완벽하고 독보적인 존재의 가치구상이 있었기에 선답자들의 행보가 우러러질만하고 존경스러워 지는 것이다.
본인은 이러한 선답자의 자료가 발표되었음에도 네 번의 발품을 팔고나서야 그 장소를 다 돌아볼 수 있었다. 물론 나름대로 이유야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원작에 충실한 기행이 아니라 본인이 둘러본 이 기슭 산길을 찾아가기 편리한 방식대로 적고자 한다.(계속)
- 구름모자-
이 넓은 땅덩어리에서 어느 한 장소가 역사성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물론 5천년의 역사를 가진 유구한 세월 속에서 어느 장소인들 선조들의 발길이 없었겠느냐라고 예기하면 대답할 말이 궁색하기도 하지만 현세까지 그 흔적이 실존하거나 기록으로 남아있다면 그것은 상당한 가치를 지니게 됨을 알기에 부러 하는 말이다.
지리산에서 이 코스가 세상에 회자된 건 극히 이레적인 일이다. 그건 스스로는 도저히 소명할 수 없는 마력에 이끌렸던지 아니면 산에 대한 열정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떠한 자전적 의식의 자각 없이는 시도 자체도 흉내내기 어려운 집념의 산실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배경에야 점필재 김종직선생이 쓴 유두류록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 열정을 다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미 5백 년 전의 기록으로 형용사 구사가 어려운 한문권시대였는데다가 당시의 지명과 장소가 대부분 역사 속에 사라진 상태였다.
따라서 현존하는 기록과 지역주민들의 증언을 근거로 당시 상황을 유추해가며 직접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2년여를 이 산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며 찾아냈으니, 퍼즐처럼 모양새와 밑그림을 요모조모 따져가며 맞춰나가는 일보다는 훨씬 더 어려운 작업이었음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우선 그 흔적의 원본인 김종직의 유두류록에서 그 행로를 살펴보자.
가이드 역할을 맡았던 승려 해공과 법종, 그리고 일행을 대동하고 함양관아를 떠난 김종직은 엄천을 건너 화암-지장사-환희대-선열암-신열암-독녀암-고열암에서 1박한 후 청이당-영랑재-중봉-천왕봉-성모사에서 2박, 통천문-향적사에서 3박, 다시 천왕봉을 올랐다가 중산(제석봉)-세석평원-영신사에서 4박, 영신봉-백무동-등구재를 거쳐 함양관아로 돌아온다.
여기에서 생소한 지명들은 대개가 첫째 날이다. 물론 이후 나오는 청이당, 영랑재, 성모사, 향적사, 영신사 등도 잊혀진 지명이긴 하나 이제는 지리산을 조금만 관심가지고 오르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 수 있는 지명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탐구의 주 무대가 엄천에서 신열암까지였고, 궁극적으로 고증의 문제가 남아있긴 하지만 현재까지 찾아진 장소와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는걸 보면 분명 성공한 답사이자 새로운 발굴임에는 틀림없다. 그만큼 완벽하고 독보적인 존재의 가치구상이 있었기에 선답자들의 행보가 우러러질만하고 존경스러워 지는 것이다.
본인은 이러한 선답자의 자료가 발표되었음에도 네 번의 발품을 팔고나서야 그 장소를 다 돌아볼 수 있었다. 물론 나름대로 이유야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원작에 충실한 기행이 아니라 본인이 둘러본 이 기슭 산길을 찾아가기 편리한 방식대로 적고자 한다.(계속)
- 구름모자-
다음이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