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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행기>지리산산행기

조회 수 2150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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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운대(香雲臺)가는 길

“대(臺)”라 함은 작게는 산사에 모셔진 불상의 좌대에서부터 크게는 스님들이 산속에서 정진 수행하는 장소를 말하며, 넓은 의미로서는 지리산의 만복대나 영신대, 종석대 그리고 오대산의 다섯 대처럼 그 산의 왕성한 기운이 응집하여 수행하기 좋은 장소이거나, 나아가서는 큰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능력의 기운이 깃든 곳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백두대간의 마무리이자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에는 아직도 상당수의 대들이 현존하고 있고, 또한 이미 주인을 잃고 묵어버렸거나, 흔적마저 없어져 찾아내기가 여간 쉽지 않은 대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이러한 장소들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지리산 매니아들이나 수행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몇 몇 사람들만의 비밀장소처럼 쉬쉬하며 조심스럽게 찾아다니곤 했으나 최근 들어 옛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기들을 가까이서 접하게 되고, 미디어매체 등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전해지거나 인터넷상에서 서로 공유하게 됨으로서 지리산의 숨어있는 대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최근 들어 왠만한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지리산 10대 정도는 섭렵하는 것이 기본이고 아직도 고서의 기록이나 전설처럼 남아있는 대나 암자터를 찾아나서는 것이 마치 임무를 부여받은 시자侍者의 행동처럼 실행에 옮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가 비지정등산로에 숨어있거나 인적끊긴지가 오래되어 길이 없는 곳에 있는 까닭에 국립공원관리단과 숨바꼭질을 하면서......

향운대를 찾아가는 길은 하루정도는 다리품을 팔아야 한다. 해발 1350지점에 있으니 위치가 높기도 하지만 찾아가는 길도 제법 가파른 능선길을 올라야하기 때문이다.

개략적인 위치는 하봉을 지나 국골 사거리에서 직진하여 처음 오르게 되는 말봉에서 내려다보면 남쪽으로 여러개의 지능이 갈라짐을 알 수 있다. 그중 사람들이 주로 다니는 능선은 추성동 성안마을로 향하는 성안능선과 광점동 어름터 독가촌으로 향하는 두류능선(엄밀한 구분은 아니다)이 있다.

향운대는 바로 이 두류능선상에 있는데 오름길은 어름터 독가촌에서 계곡을 건너자마자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야 하며, 이길은 처음엔 능선이지만 3~40분 정도면 영리봉에서 시작하는 계류를 만나게 되고 이후 다시 능선길을 올라가게 된다.

내림길에서는 국골사거리에서 말봉을 올라 능선을 타고 내려가게 되면 처음부터 바위지대를 걷게 되는데 두 번째 보조자일이 걸려있는 곳을 조심스럽게 내려서서 조금 더 나아가면 전면에 조그만 봉우리를 두고 우측으로 트래버스하는 길을 만나게 된다. 물론 이 전에 또 하나 허공다리골로 내려가는 길이 있으나 이 길은 곧 사태지역을 만나게 되고, 급경사를 내려가게되니 향운대가는 길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이 갈림길에서 전면의 봉우리를 꼭지점으로 원을 그리듯 얕은 경사로 2~30여분 나아가면 갑자기 전면이 터지고 좌측으로 거대한 수직절벽을 만나게 된다. 바로 향운대이다.

만나는 첫 순간부터 위치에 대한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배경인 수직절벽 규모에 우선 놀라게 되고, 좌우가 바위로 막혀있는 데다가 건물이 앉잤던 자리는 옴팍하여 합쳐진 기가 빠져나갈 틈이 없어 보이며, 전면은 허공다리골과 얼음골, 멀리로는 상내봉에서 이어지는 일명 빨치산능선이 거침없이 바라다 보인다. 또한 터 앞 바위아래서 나오는 석간수는 얼음처럼 차가워 한 두 모금으로도 가슴까지 서늘하고, 우측엔 가부좌를 틀고 수행하기 적당한 너럭바위가 하나 놓여 있다. 전체적인 느낌으로 보아도 뒷배경, 즉 등줄기는 날카로운 암릉으로 악귀들이 범접하지 못하고, 전면은 광활하고 평화로운 기운이 넘쳐흘러 아무리 종교에 관심이 없는 문외한이라도 장소가 가지고 있는 느낌은 다를 바가 없을 것 같다.

지금 인적이 끊긴 빈터에는 예전에 기거했던 사람들이 남긴 약간의 세간 살림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장소를 국립공원이라는 미명하에 구도의 수행마져 방해하는 그들의 행태가 이상하리만치 우습게 느껴진다.

이곳에서 전진방향으로 20여 미터를 나아가면 바위굴속에 최근까지도 사람이 기거했던 움막이 하나 보인다. 처음부터 완전한 굴의 형태는 아니고 오버행 바위의 옆면을 바위로 쌓아올려 문쪽에만 비닐로 막아놓은 조그만 움막이다.

어름터로 가는 길은 좌측 능선을 잡는다 싶은 느낌으로 돌아 나아가야 한다. 얼마간의 산죽밭과 너덜지대가 있어 겨울철이 아니더라도 조금만 실수하면 길을 잃고 헤멜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덜강 사이만 잘 빠져 나오면 그 다음은 곧장 내림길이어서 길을 잃을만한 곳은 없을 정도로 뚜렷하다.

문득 이십여년 전쯤에 묘향대를 찾아가던 일이 생각난다. 지리산에서 만난 어느 산꾼이 반야봉아래 암자가 하나 있다고 일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엔 믿질 않았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절간이라는 곳은 최소한의 의식주 해결이 가능해야 하는데 반야봉 바로 아래라면 아무리 용맹정진을 마음먹고 수행한다해도 사계절 견디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가장 문제가 될 식량문제는 자급이 불가능할 것이 뻔한 일이고, 그렇다고 그 높은 곳에 누가 일부러 찾아와 시주할리도 없다는 게 내 어린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후에도 그 암자와 스님 예기는 몇 번을 더 들었다. 길을 잘못들어 헤메다가 들어갔다는 사람, 누구에게 전해 듣고 무작정 들어갔다가 무진 고생 끝에 찾았다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들어가는 길, 나오는 길 모두가 불분명하다는 예기였다. 그러던 차에 장터목에서 만난 어떤 이가 그 스님을 뵈었다고 하길래 길을 물어 작정하고 반야봉으로 향했다. 그러나 예상대로였다. 반야봉에서 내려서다 혀를 설래설래 내두를만치 고생만한 채 보기좋게 나가 떨어졌다. 그러나 상황이 거기서 끝이 났으면 지금껏 내 머릿속에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처음엔 살아야 겠다는 생각에 탈출을 시도했지만 내려와 가만 생각하니 약이 오르기도 하고, 또한 그 암자의 모습이 자꾸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지도를 놓고 연구를 해봐도 답은 없고, 무작정 붙기에는 혼이 났던 터라 아는 사람에게 묻는 수밖에... “그곳을 알 수 있는 사람”하며 사람을 떠올리니 답이 간단히 나왔다. 바로 노고단의 함선생님이었다. 그 다음주 다시 야간열차를 탔지만 그 주에도 못 찾았다. 그리고 다시 내려오면서 뱀사골산장지기에게서 그 답을 얻었다. 그 후 묘향대를 찾아낸 것은 삼도봉에서 반야봉을 오르지 않고 트래버스하여 나가는 길이었다. 물론 길같은 길은 없었지만 아쉬운대로라도 길 흔적이 있어 차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스님은 출타 중이었는지 빈 사였고 주인 없는 산사에 홀로 있는 느낌이 묘했다. 낙엽만이 쓸쓸히 맴돌고 있는 남한 제일 높이에 자리한 암자, 지리산이 주는 또 하나의 숙제가 풀렸다기 보다는 일종의 허무함, 무력감 같은 것들이 찾아들었다. 방황이 끝나지 않았을 시기였으니 나도 어느시절 일탈을 꿈꾸다 찾아들 수 있는 일종의 탈출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자책같은 한숨이 있었던 것 같다.

지리산 속에 이러한 대가 몇 개나 더 있으며, 또한 그 안에서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이가 얼마나 있고, 그들이 구하고자하는 궁극적인 목적의 끝은 내 생각의 범위 안에서 해답이 나올 수 없었기에 더욱더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지금도 그러한 궁금증이 다 풀린 건 아니지만 다행이도 철모르고 떠돌던 지난 시절과 달리 지금은 내 안에 있는 나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음에 감사하고 있다

향운대를 찾아가면서 이곳은 어떤 모습일까가 궁금했었다. 예전의 그 느낌이 살아 오를까하는 일종의 청년기 호기심도 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전의 그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위치로만 본다면야 묘향대나 문수대와 별반 다를 게 없었으니 예전의 느낌이 묻어나올 법도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저 덤덤하니 주인잃은 암자를 찾아온 느낌이었다. 하긴 벌써 이십여년전 일이니 내 생의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 신념의 차이들도 변해버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가슴속에 새겨지는 분명한 느낌 하나는 우리같은 속인들은 살 수는 있으나 살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내 스스로는 구도의 길을 찾아갈 용기가 없을 뿐더러, 깨달음의 능력도 내겐 갖추어져있지 않았고, 가르침을 받아도 내 몸 하나 바르게 가지는 것이 버거운 미천한 중생임을 알기에 우리 같은 속인들의 일상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길지 않은 사십여년 내 인생의 궤적을 더듬어 보면서 삶의 목적이나 가치관도 너무 많이 변하고 퇴색되어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 구름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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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해 봉 2004.09.23 12:03
    유익한글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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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전에서 장기성 2004.09.23 14:42
    "...가르침을 받아도 내 몸 하나 바르게 가지는 것이 버거운 미천한 중생임을 알기에..."
    제 주위에 계신 어르신을 뵙는 듯 하네요(^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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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호정 2004.09.23 20:04
    예~ 지리산에는 구도자들이 일컫는 8 대가 있다 하더군요
    그 중 제일 금대~라 하셨습니다
    금대와 인연이 좀 있어... 가을에 지리를 오르기 전엔
    제 일 금대에서 정진의 시간을 가져, 깊은 佛力의 氣라도
    익혀보고 싶습니다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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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타타 2004.09.23 21:16
    지금 구도의 길을 가고 있으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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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해 2004.09.24 01:32
    잘 읽었습니다. 예와 지금은 마음 결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이십여년전 지리에의 열정을 고스란히 담고 계시군요.
    구름모자님의 글밭을 자주 만나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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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똘뱅이 2004.10.01 17:15
    이런 글이 있고
    이런 글을 쓰시는 분들이 있기에
    더욱 오브넷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국골 허공달골 다녀봤지만
    아직 미천하여 글만 보고는
    향운대 길이 떠오르질 않습니다.
    나중에 기회되면 배움 한 수 청해 볼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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