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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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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2236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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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진지하게 때론 가벼웁게


반야봉을 자세히 보면 지리산 주능선을 약간 비켜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봉우리를 모태로 하는 계곡은 남쪽으로 흐르는 피아골은 해당되지 않고, 북쪽으로 흐르는 뱀사골과 대소골에서 시작하여 심원, 달궁을 거쳐 내려오는 저연천 둘 뿐이다.

그런데 이 두 계곡은 반야봉 홀로 만드는 계곡이 아니라 인접한 봉우리와 함께 물을 모아 내리는 탓에 순수한 자주성은 가지고 있지 않다. 즉 뱀사골은 토끼봉과 명선봉이 함께하고, 대소골은 노고단이, 심원골은 만복대가, 달궁골은 세걸산이 함께한다. 그렇게 한데모여 흐르니 그만큼 넓고, 크고, 깊고, 웅장한 것이다.

지리산의 협곡 속에서 시작되는 저연천 상류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제법 역사가 길다. 하지만 이 골짜기에 군사적 목적을 빙자한 도로가 뚫리기 전까지만 해도 외지사람 보기가 시집간 누님만큼이나 힘든 곳이었다.

이곳이 관아에서 행정력이 미치기 어려운 오지라는 증거는 가장 상류쪽에 있는 심원마을이 수계나 능선 경계로만 따져 봐도 남원 땅이 분명한데 백두대간너머 구례군에 편입이 되어있고, 거기에서도 시오리가 넘는 하류 달궁마을에서부터 남원시에 편입되어 있다. 지금이야 편리하게 뚫린 도로를 따라 이동하니 인월이나 운봉장을 다니겠지만 이 도로가 생기기전만 하더라도 이 지역사람들은 약초나 산채를 등짐으로 울러 매고 백두대간의 험난한 고개 너머 구례나 운봉장을 왕복하며 생필품을 구해 날랐을 것이다.

반야봉의 주능, 즉 심마니능선이라 일컫는 능선자락에 기댄 지계곡은 해발 1,732m라는 산의 덩치에서 보듯 상당히 많은 세류가 보인다. 그런데도 그 지계곡들 중 이름을 가지고 있는 곳은 하점골 또는 광산골이라 불리는 곳과 봉산골 또는 얼음골이라 불리는 두 군데 밖에 없다. 모두가 반야봉의 서쪽기슭으로 흘러 저연천으로 합류하는데 봉산골은 심원골에서, 하점골은 달궁마을 앞에서 하나가 되어 큰 내를 만든다.

이 두 골짜기 중에서도 사람 산 흔적이 있는 곳이 하점골이다. 광산골이란 이름은 근세에 니켈광산이 있어 붙여졌던 명칭이고, 원명은 하점골(下店谷)이라 불렀다. 지금은 사라진 마을이지만 이 골짜기에 몇 않되는 자연부락중 하나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는 우선은 하늘가림이라도 할 수 있는 터가 있다는 뜻이요. 당장의 호구지책이라도 때울 수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예기하면 이웃하고 있는 봉산골은 같은 이름을 가자고 있어도 사람이 살 수 있는 골짜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골 자체가 반야 중봉의 정수리에서 시작하여 지대가 높은데다가, 하점골보다는 훨씬 좁은 협곡이어서 안주할 터가 없고, 일조시간이 짧아 아마도 이 부근에서 얼음이 가장 늦게까지 있어 얼음골이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그러나 하점골도 지금은 그 명칭만이 남아있을 뿐 언제 누가 어떻게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달궁마을 앞에서 달궁계곡 본류를 내려서니 유난히 붉은 수달래가 새벽 찬 공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화사하게 웃고 있다.

하점골 초입은 넓다. 사람의 힘만이 아닌 기계의 힘이 가해졌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들지 않아야 자연 훼손이 없는 논리라면 나도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지만, 인간의 명분없는 힘의 논리가 자연 스스로 복구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기는 일이라면 그런 일은 앞으로 없었으면 좋겠다.

산행을 시작한지 20여분정도면 계곡을 한번 건너고, 거기에서 다시 10여분이면 하점골을 양 갈래로 나누어 놓은 삼거리를 만난다.

애초에 하점골을 들었으면 하점골을 오르는 게 정석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렇게 진지할 필요가 없었다. 산을 가벼이 볼 일은 아니지만 지리산에서 길있는 곳만을 찾아다나던 시절은 이미 오랫적 예기, 예전과 같은 심각한 고민도 없이 계곡을 건너 가운데 지능으로 들어선다. 때론 여유를 가지고 한적하게 산을 오를 줄도 알아야함은 짜여진 틀에서 움직여야하는 일상과 구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길은 마을주민들의 먹고 사는 노력으로 처음엔 인적이 뚜렷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진다. 그러나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너른 지능은 어느 해 큰 비에 밀렸는지 지표면의 토양은 없어지고 바위표면이 들어나 너덜강같은 바윗길을 겅중겅중 오르게 된다.

신록을 만끽하듯 가지마다엔 여린 순들이 앙증맞은 얼굴을 내밀고, 이제 지상으로 오름을 시작한 단풍취가 지천으로 깔려있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경사가 점점 급해진다. 희미한 인적을 더듬어, 아니 사람이 오를 수 있는 비탈면 어느 한줄기를 따라 땀을 훔쳐내니 어느새 지능 끝 하늘금이 보인다. 먼발치에 있는 듯 보이는 바위를 돌아 한달음에 올라서자 적송 몇 그루가 험한 생을 살아온 이력을 기둥에 새기고 있다.

예서부터는 사람이 다닐만한 길은 없다. 키 작은 산죽 밭으로 여린 인적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꼭 사람의 흔적이라 말하기도 어렵다. 그나마도 여러갈래여서 이곳을 지나간 선행先行 흔적이 덩치 큰 산짐승들의 나들이 흔적인지, 아니면 심리적 안정을 가지지 못한 우리 마음속에서 방황하는 이중적 갈등이 빗어놓은 착시현상인지 종이 잡히지 않는다.

제법 진지하게 지도를 놓고 방향을 찾아보지만 잡목으로 시계視界 제로. 다만 오른 시간과 수더분한 능선의 경사로 봐서 지형도상 간격이 너른 등고선 부근이니 정점은 멀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이 대목에서는 눈앞에 있는 현상만으로 심각할 일도, 조급해 할 일도 없다. 그저 처음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오르면 그만이다.

딱히 어디라고 잡아 오를만한 길은 없다. 정점은 심원능선상의 1,380m 봉우리, 시간상으로나 거리상으로도 조급할 것까지야 없었다. 하지만 사람의 틈바구니에 끼어 사는 인간 심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편함에 길들여져 있어 한 치라도 손해보지 않으려는 타산 심리가 기본 양심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정수리를 정해 놓고 오르는 길이니 지능의 날등을 찾아 올라야 하지만 우선 당장 처해진 상황을 비켜보려는 심리가 자꾸만 게걸음을 걷게 만든다. 차분히 마음을 다스린다.

나는 산을 들 때 언제나 나 자신에 도전하는 자세로 나선다. 누구라도 처음 가는 길은 두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궁극적으로 길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다. 그래서 집을 나선다는 자체가 일종의 나 자신에 대한 도전인 셈이다. 스스로 나설 줄 아는 용기는 미래를 향하는 징검다리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깨쳐 나가는데는 이 징검다리를 건너야 한다. 그래야 전진이 있고, 발전이 있고, 희망이 있다. 가만히 앉자 남의 것이나 훔쳐보면서 나의 미래를 찾는 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정점은 오르지 않는 사람에게 내어주질 않는다. 내가 오르는 것은 내 안의 좁은 틀을 깨는 작업이다. 그것이 끊임없이 내가 올라야 하는 이유이다.

봉우리가 가까워질 즈음 분지형태의 너른 터가 형성된 듯싶더니 몇 군데 여린 흐름의 물길이 보이고 당귀가 지천이다. 정점이 다했기에 혹시 모를 비상시를 위해 샘을 정비하고는 마지막 키 큰 산죽과 시름을 한다. 철옹성을 지키는 병사처럼 단단한 수비벽을 쌓고 있던 저지선들이 발아래로 쓰러지며 아우성을 지르고, 우린 결사의지를 다진 장수처럼 양팔을 휘두르며 적진을 파고든다. 10여분을 지났을까? 마침내 항복을 선언하듯 심마니능의 길이 터지며 너른 터가 나타나고, 그 앞엔 망루 가장 높은 곳에서 나부끼던 깃발처럼 아름드리 까치박달나무 한 그루가 파르르르 이파리를 떨고 서있다.

그래도 사람 왕래가 있었던 길을 만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땀과 먼지를 털어내고 개선군을 환영하듯 도열하고 서있는 황장목을 지나 길게 목을 늘어뜨린 고개마루로 내려선다. 하점골에서 올라오는 지점을 만난건 불과 10여분, 그리고 다시 오름길을 10여분 쳐 오르면 봉산골 삼거리다. 시간은 아직 하루의 반이 지나지 않았는데 일정은 이미 반이 끝났다. 여린 이파리를 어루만지고 있는 따가운 햇살을 피해 긴 시간 몽상에 젖는다. 언제쯤 이 산은 나를 편안히 받아줄 것인가......

삼거리 전망바위에 올라 사방을 둘러본다. 중봉이 코 앞이고, 이끼폭포골이 반야의 허리춤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싱그러움으로 가득한 뱀사골 안은 이제 초벌이 끝난 수채화가 성하를 준비하고, 우리가 내려 가야하는 능선은 뱀처럼 길게 달궁으로 치달아 있다.

내림길은 처음부터 제법 깔끄막이다. 때론 네발을 써야하는 곳도 있지만 위험을 느낄 만큼은 아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잘 다듬어진 묘를 한 동 만나면 그나마도 훨씬 누그러든다.

중간중간 조망이 터지는 곳에서는 만복대 산허리로 그어진 노고단과 정령치 오름길도 보인다. 능선 날망에 서있는 소나무가 늠름해 보인다. 그러나 그 나무도 그냥 평온한 세월만을 지내온 것 같지는 않다. 황장목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 기둥은 하늘로 곧장 치솟은 듯 보이지만 그 기둥을 키웠던 가지는 모진 세월을 격은 모양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어느 것은 갈지자로 꺾여있고, 어느 것은 스리랑을 추듯 베베 꼬여있다. 또 어떤 가지는 부러진 상처를 다시 붙들어 매어 불룩하고, 어떤 가지는 이미 생을 마감하고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록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지 못하는 나무라 하더라도 생명이 있는 것들의 사는 방식은 모두가 같음이다.

어느덧 삼거리를 만난다. 우측은 처음 올랐던 하점골 입구로 내려서는 길이지만 아직은 시간이 지천이라 봉산골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산은 숲이 짙어 한 낮인데도 어둠침침하다. 대소골과 봉산골을 나누는 건너편 능선이 가까워 계곡이 좁을 뿐 아니라, 빛이 드는 양도 적어 습해 보인다. 아마도 겨울엔 많은 눈이 쌓이고, 그 눈은 지리에 봄이 온 후에도 가장 오래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자연스레 동계를 떠 올린다.

봉산골에 내려 선 것은 묘지가 있었던 장소에서 쉬엄쉬엄 1시간 정도였다. 아침시간 이후 처음 만나는 계곡인지라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든다. 배낭을 내려 오늘의 흔적을 씻어 내고는 골짜기를 빠져나오자 심원골 쟁기소 위로 구름다리가 걸쳐있다. 반석 위를 흐르는 힘찬 물줄기가 시원하다.

딱딱한 포장도로를 걷느니 보다 산길이 나을 것 같아 오랜만에 심원골의 옛 정취를 더듬으며 쉬엄쉬엄 달궁을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옮긴다.


진지하면서도 심각하지 않은, 가벼우면서도 헐렁하지 않은, 여유있고 풍요로운 하루였다.


- 구름모자 -


  • ?
    신후 2005.05.27 13:59
    한편의 멎진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덩달아 옛정취 남아있는 길을
    소요하듯 걸어보고 싶어지네요.
  • ?
    하해 2005.05.28 02:46
    잘 지내시지요?
    요새 통 글을 제대로 읽지도 못하였는데 오랜만에 느긋하게 보네요.
    구름모자님 산행이야기 속에서 '길에 관한 사유' 를 엿듣는
    즐거움이 있는 듯 싶습니다.
  • ?
    구름모자 2005.06.02 18:46
    하해님 건강시시지요?
    요즘에야 조금 여유를 가지고 산에 듭니다
    그래도 가까이 있는 편이니 남들보단 훨씬 수월하겠지만 마음만큼 되질 않는 것이 인간의 마음인가 봅니다
    웃음잃지 마시고 건겅하세요
    지리에서 뵐 수 있도록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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