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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뒤적여보니 동네 이름은 싸리가 아닌 쌀, 즉 미米동이었다.

쌀의 어원은 보살에서 변형된 고어로 원어는 ‘ ’, ‘바살’ ‘보살’이다. 지도에 표기된 싸래골의 싸래(부스러진 쌀조각으로 표준어는 싸라기)와 ‘쌀’의 음운분화되는 과정에서 ‘싸리’로 변이된 것이 아닌가 하였으나, 해석은 엉뚱하게도 “쌀같이 흰 싸리꽃이 많이 피어서...”라는 주석이 달려있다.

추측컨대 왜정시대에 한문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굴골된 것이 역해석된 듯 보이며, 아무래도 이 골짜기는 싸리가 맞는 듯하다.

지명으로 쓰는 나무로는 싸리 외에도 밤, 은행, 오동, 버드, 회화(괴목), 칡, 배, 오얏, 복숭아, 매화 등이 있다. 대체적으로 나무자체로 의미가 부여된 것과 많은 개체 수에 의한 것, 그리고 과실과 꽃 등으로 특정지어 명칭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싸리의 명칭은 많은 개체수가 명칭으로 굳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해석된 것처럼 흰 꽃으로 특정지어질 수 있다면 이팝이나 조팝종류인데 싸리와는 종부터가 다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추론일 뿐 정설은 아니며, 지금 이 골짜기에서도 그 개체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싸리골에서 눈골(와운)로 넘어가는 고개를 싸리골재라고 부른다는 기록이다.

돌돌돌 물이 흐른다. 지난 겨울 그렇게 퍼붓던 폭설과 강추위도 순리 앞에서는 모두 다 숙연해 진다. 자기만의 아집과 교만으로 우기지도 않으며, 지나는 시간을 아까워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자연의 세계이자 생명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여린 가지, 저 마른 땅 속 바위틈바구니에서도 움은 트고 있다.

싸리골재 앞에는 멧돼지 목욕탕이 있다. 이 곳에서 즐긴지가 오래되지 않은 듯 헤집은 깊이가 깊고 고인 물이 탁하다. 비록 우리 눈엔 낙엽에 덮인 하찮은 늪이라 할지라도 흡혈곤충과 싸워야하는 그들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터일 것이다. 어디 그 뿐이랴 이 정도면 이 능선 언저리에 얹혀사는 짐승들의 목마름도 충분히 해결하고 남을 성 싶다.

싸리골재에서 영원능은 처음엔 제법 고된 된비알을 채고 올라서야 한다. 땀을 한 조금 흘리고 나면 영원서릉이 만나는 무명봉에 서게 된다. 주변조망이 시원하고 천년송능선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아직 음지녘에는 잔설이 남아있지만 찾는 이에게 위협을 줄만큼은 아니다.

영원봉까지는 서두를 게 없다. 가끔씩 나타나는 바위는 모두 우회되어 있고, 날등을 오를 때는 산죽 속으로 길이 열려있다. 정상부가 거의 왔다 싶으면 형이상학인 바위들이 나타나는데 첫 번째 첨성대처럼 솟은 바위를 이정표 삼아 20분 정도면 영원봉에 닿을 수 있다.

전면엔 천왕이 피라미드처럼 솟아있고, 정수리에 붙은 곁가지들이 우람하다. 가야할 능선 영원릉으로는 뚝떨어진 영원재 위로 삼정산이 도도한 콧날을 세우고 있고, 그 뒤편 삼봉산이 치마폭처럼 펼쳐져 있다.

영원능은 제법 깊은 잔설이 남아있지만 빗기재까지는 한걸음에 내달을 수 있다.

빗기재는 비켜있다는 뜻의 횡橫치인데 그 비킨 대상이 산인지 마을인지 아니면 무형의 존재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좁은 골짜기에 들어선 마을 모양새나 그들의 살아온 이력을 보면 화전이나 목기가 전부였을 것이니 처음 시작의 삶이나 살아온 삶 자체가 일상적인 삶과는 많이도 왜곡되고 비틀어져 한참이나 비켜져 있는 삶을 살아왔을 것임은 능히 짐작이 간다.

이젠 잊혀지고 싶다는 듯 흔적마저 지워버린 눈 덮인 급경사와 너덜강을 내려선다. 북사면으로 휘어나간 골짜기는 정마저도 외면하며 살았던 그들의 기운이 남아있는 듯 차갑게 느껴진다.

삼정산에서 내리는 합수점을 만나면 제법 계곡다운 모습을 보이지만 규모는 그리 크지 않고, 마을터를 지나서야 양쪽으로 늘어선 지능이 만들어 놓은 깊이가 짐작이 간다.

한적하기만한 오솔길을 따라 끝을 찾아 내려오면 인공폭포가 보이고, 굿당에선 징소리가 요란하다. 내세에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당치않은 욕심에 발을 구르는 것도 우리네 인간들뿐이라는 생각을 하니 비록 내 밥벌이에도 힘겨워하는 몸이지만 그저 내가 산에 들면서 느끼는 작은 행복에 더 감사를 해야겠다.


봄이 오는 길목, 사라진 마을터, 그리고 또 다시 시작하는 지상 만물들...

내가 지나온 발자욱에도 지난 가을 어렵게 터를 잡았던 풀씨가 꼬물꼬물 움트기를 시작하는 그런 계절이다. 따르지 못할 깊은 생각보다는 그저 내 걸음이 그들의 생명 움틈에 훼방꾼이 되질 않고 동토에 부풀어 오른 대지를 다져 또 다른 생명의 씨앗을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켜 살아도 인간의 땅이 아닌 생명의 땅에서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 구름모자 -



  • ?
    ... 바람 2006.03.09 11:23
    두 편의 글 잘 읽고 갑니다.
  • ?
    하해 2006.03.11 00:31
    구름모자님, 보기 편하도록 ‘ ’ 글자를 만들어서 넣어두었으니 주(註)는 내려놓아도 좋을 듯 합니다^^
  • ?
    구름모자 2006.03.13 09:56
    하해님 수고로움을 끼쳐드료 송구하고 감사드립니다.
    쓰는 재주외에 별다른 잘하는게 없으니...
  • ?
    섬호정 2006.03.31 18:57
    '돌돌돌 물이 흐른다. ~
    '비켜 살아도 생명의 땅에 살고 있는~' 그들이 오는 님의 글소리에서..
    자연이 순리를 따라 되살아나는 삶을 따라 인간도 아집과 교만을 버리고 숙연해져야 함을 일깨웁니다. ANNAPOLIS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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