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지리산

산행기>지리산산행기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봄이 오는 길목에서(싸리골과 빗기재골)


산길을 걷다보면 아무런 특징이 없는 무미건조한 산길인데도 왠지 정감이 가는 산길이 있다. 그런 곳의 십중팔구는 향수에 대한 아련한 기억들이 묻어있는 곳들이다.

뭔가 특별하게 찍어내지는 못해도 내 마음 한 구석에서 느껴지는 추억의 샘을 자극하여 모퉁이를 돌면 누군가 있을 것 같고, 저 언덕바지만 올라서면 외할머니께서 나타나 까칠한 손으로 볼을 잡고 부벼 댈 것만 같은 느낌이 있는 곳이다. 그런 곳에선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신중해 진다.

비록 걷는 걸음에 무심하게 길을 내어주고, 깊숙한 마을 터엔 새로 자릴 잡은 잡목 하나가 주인행세를 한다해도 대밭을 넘어오는 바람소린 천진난만했던 옛 동무들의 웃음소리요, 고개를 넘어오는 햇살은 정 그리운 도시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줄 외할머니의 미소이다.


그윽한 소나무숲길, 봄을 부르는 계곡물소리, 먹이사냥에 분주한 딱따구리, 땀방울을 돋아내는 대지 기운. 싸리골재 오르는 길은 이렇게 시작된다. 앞을 바라다보면 그냥 휑하게 뚫린 것 같으면서도 철없이 떠난 자식의 환영받지 못할 귀향을 위로라도 하는 듯 괜찮다 괜찮다 어깨를 다독여 준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기억나는 옛 동무 하나 없는 놈,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놈한테 이런 느낌의 향수는 사치 아닌가? 동화 속 나라를 그리워하는 소아적 발상은 아닐까? 난 그런 허상을 쫒으며 내 이미지를 각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푸념처럼 내던져진 정체성을 다독이다 충돌의 혼란에서 벗어난 것은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였다.

빈농의 칠 남매 중 첫째로 태어나 순사집이라며 꼬셔대던 중매쟁이한테 속아 떠밀리듯 출가했던 열아홉, 농사가 천직이었던 깡촌에서 세상물정 하나 모르고 자랐던 순정은 남편과 시어머니 사랑 한번 받아보지 못하다가 이십여년을 홀로 보내시고, 이제 겨우 남은 여생이나 편히 보내나 했더니 믿었던 자식마저 금융사고 빚덩어리, 질긴 인연 악귀는 병마로 찾아오고 짐되신 몸 걱정하다 또다시 홀로 낙향, 하나 있는 피붙이 아들 청에도 그대로 몸져누우면 대소변이라도 받아낼 사람 걱정하며 그냥 그대로 자다 조용히 죽었으면 좋겠다던 그런 여인이다.

그래서 내 고향은 투박한 도시 뒷켠이 아니라 외할머니의 한숨이 있던 그 빈촌, 아들 손자 다 필요 없고 외손주 너만 하나만 잘되면 여한 없겠다며 가슴으로 안아주던 외할머니 품속, 초가, 똥돼지, 뒤안 가지밭, 집 앞 천수답, 제실, 소나무, 썰매... 그 기억만이 생생한 갓바우마을이다.

가지런한 솔밭을 오르면 어느 결에 오밀조밀하게 얽힌 싸리마을 터가 보인다. 이 곳이 마을터였던 것은 햇쌀 한조금 받기도 어려운 좁디좁은 골짜기에 억지로 생겨난 듯한 분지를 층층히 돌로 쌓아올려 살아야했던 그들의 흔적이 계곡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널려있었기 때문이다.

「저 저기 쌓여진 돌들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지금 눈에 보이니 그저 몇십년 아니 몇백년일 것이라고는 단정하지 마십시오. 엄밀히 따지면 바위가 만들어지기가 수백만년, 그 바위에서 떨어져 나오기가 다시 수십만년, 대지에 자리를 잡아 저들의 눈에 띄기까지 수천년, 그리고 저들의 손에 들려 이곳으로 옮겨와 쌓여지고 지금 우리 눈에 띄기까지가 백여년은 족히 흘렀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 역사를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요?」


(계속)
  • ?
    섬호정 2006.03.31 18:54
    구름모자님의 글을 읽고 싶어 불원천리찾아와 봄이 오는 길목의 싸리골에 마음 한자락 쉽니다.
    찔레꽃 석류꽃 무화과.드릅나무로 울타리 쳐진 제 외가의 유년을 떠올리며 동치미로 파인애플 맛을 알게 해 준 음식솜씨 고을 명성높던 제 외할머님 생각에 젖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들에게 외가는 가슴 훈훈한 보배같은 추억입니다
    Annapolis의 새벽에 합장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지리산 산행기, 느낌글, 답사글을 올려주세요. 운영자 2002.05.22 10004
47 봄, 그리고 지리산 8 구름모자 2007.04.12 3778
46 잃어버린 30분 - 2 5 구름모자 2006.12.19 3158
45 잃어버린 30분 - 1 1 구름모자 2006.12.18 3113
44 이곳은 지리산 맞다 2 구름모자 2006.08.02 3297
43 잊어버린 길을 따라 잃어버린 마음 찾아 - 마지막 6 file 구름모자 2006.07.05 3872
42 잊어버린 길을 따라 잃어버린 마음 찾아 - (3) 1 file 구름모자 2006.07.04 2756
41 잊어버린 길을 따라 잃어버린 마음찾아 - (2) 2 file 구름모자 2006.07.03 2995
40 잊어버린 길을 따라 잃어버린 마음 찾아 - (1) 2 구름모자 2006.06.30 2815
39 비탄과 고통의 벽은 허물어질 수 없는가? - 2 1 구름모자 2006.04.04 2946
38 비탄과 고통의 벽은 허물어질 수 없는가? - 1 5 구름모자 2006.03.30 2251
37 봄이 오는 길목에서 - 2 (싸리골과 빗기재골) 4 구름모자 2006.03.08 2995
» 봄이 오는 길목에서 - 1 (싸리골과 빗기재골) 1 구름모자 2006.03.07 2482
35 돌려주고 싶지 않은 이름 선유동 - 3(내원골) 4 구름모자 2006.02.22 2519
34 돌려주고 싶지 않은 이름 선유동 - 2(선유동) 1 구름모자 2006.02.16 2199
33 돌려주고싶지 않은 이름 선유동 - 1 2 구름모자 2006.02.15 4408
32 박달내와 삼신산 - 2 3 구름모자 2006.02.02 2157
31 박달내와 삼신산 - 1 1 구름모자 2006.02.01 2779
30 역사는 잊혀질 수는 있어도 없어지지는 않는다 - 3 (단천지능) 8 구름모자 2006.01.09 2677
29 역사는 잊혀질 수는 있었도 없어지지는 않는다 - 2 (수곡골) 6 구름모자 2006.01.05 2256
28 역사는 잊혀질 수는 있어도 없어지지는 않는다 - 1 1 구름모자 2006.01.05 2415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Next
/ 4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