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녀굴은 빨치산의 입장에서 보면 천혜의 요새였다. 좁은 산길로만 오르던 전면이 갑자기 터지면서 제법 너른 분지를 이루고, 그 위로 턱을 하나 더 둔 곳에 거대한 바위가 서있다.
굴을 형성한 바위도 전면에서 보면 그저 처마를 이룬 평범한 바위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사철 끊이지 않는 샘이 있고, 전면엔 은폐엄폐가 가능한 바위 하나가 기대어 서있다. 굴은 언 듯 보기엔 전면이 훤하게 뜷린 두어평의 공간처럼 보이지만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가장 안쪽에 조그만 틈새가 보이고, 이곳으로 몸을 집어 넣으면 20여명이 기거할 만한 커다란 공간이 숨겨져 있다.
이현상이 사살되고 난 후 사실상 괴멸의 길을 걷던 빨치산은 그 후 아군의 생명보장 작전에 끌려 일부는 스스로 하산하기도 하였으나, 끊임없는 아군의 소탕작전에 밀려 대부분 사살되거나 지도자를 잃은 채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그러나 이곳에 숨어든 정순덕 일행은 1962년 이은조가 사실되기 전까지 이곳에 은거하고 있었고, 그 1년 후 자기가 태어났던 고향집에서 동료 이홍이마저 잃은 채 생포되었다. 생포당시 입은 관통상으로 다리마저 잃고 차다찬 감옥에서 23년을 보낸 후 출소하였으나, 슬픈 역사만이 자리한 가슴을 다스리지 못하고 쓸쓸한 인생으로 남은 생을 살아야 했다.
흐르는 세월 앞에서 추하지 않은 것은 없겠지만, 기구한 운명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그녀의 삶의 궤적은 애초부터 사상이나 이념따윈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자신만이 아는 선택의 꼬리는 역사에 진실을 묻어둔 채 2004년 후미진 도심의 뒷 켠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노장대1)를 오르는 길은 솔봉 능선길로 나가야 한다. 능선을 만난 후, 전망바위(일명 의론대)를 지나면 노장대와 안락문 삼거리에 닿고, 두 곳은 지척간이다.
노장대는 오를 수 없는 바위처럼 보이지만 하단부는 인공시설이 있어 어려움 없이 오를 수 있고, 상단부는 바위 틈새를 빠져나와 마지막 두 바위가 기대고 있는 안쪽에서 선답자가 설치해 놓은 줄을 잡고 발디딤을 확인하며 위험한 오름짓을 해야만 오를 수 있다.
500년전 사림의 조종이었던 김종직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쓴 [유두류록]에 나오는 독녀암으로 그는 이 바위군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 독녀암이라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었다. 그 높이가 천여 자나 되고 다섯 가닥으로 갈라져 있었다.(중략) ... 그곳에 올라가려면 사다리를 놓고 잣나무를 붙잡고 바위를 돌고 돌아야 하는데, 등과 배가 모두 벗겨진 뒤에야 꼭대기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목숨을 내건 자가 아니면 올라갈 수가 없었다.(하략)」
날이 좋으면 지라산자락을 감싸 도는 엄천강에서부터 반야봉까지 이어지는 시원한 주능, 그리고 수도 없이 가지를 지른 지능과 첩첩한 산들이 감동의 도가니로 넘쳐 나겠지만 오늘 같은 날은 저 구름을 타고 노는 선녀에게 물어볼 일이다.
그런 한편으로는 구름 속에 서서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는 오늘이 차라리 모든 꺼풀을 벗어던진 나신보다 더 신비하다. 그것은 남아있는 부분에 대한 상상과 떠나야 하는 미련 때문이다.
안락문과 신열암 터는 바로 이 부근이다.
하늘 위에나 존재하는 낙원을 들어가는 문은 모양새 자체부터가 오묘하고, 그 아래 자리를 튼 신열암은 거대한 병풍을 두르고 앉자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극락정토였을 것이다.
솔봉은 송대마을 좌측 지능을 이루는 능선으로 높지도 길지도 않은 평범한 줄기에 불과 하지만 전망만은 상쾌한 곳이다. 정상은 주변의 바위들을 모아 억지로 바람을 막고 벌거벗은 채 누워있는 묘 한기가 애처로워 보인다.
그곳에서 송대마을 까지는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 전에서 좌측으로 꺾어 10분여를 내려오면 마을 뒤 임도로 내려선다.
정순덕과 선녀, 그리고 구름.
그러나 오늘은 정순덕이도, 선녀도 그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그곳엔 하얀 구름만이 있었을 뿐이다.
역설적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현재를 불확실성 속에서 살고 있다면, 미래에도 확실한 건 하나도 없다. 저 구름처럼...
그녀가 적어도 이 산속을 헤메였던 13년의 세월은 사랑 따위에나 목숨을 걸었던 공허한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 한들 그의 일생은 절망의 심연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그렇다면 그녀가 짊어진 무게는 얼마였을까? 혹 저 구름만큼이 아니었을까? 버거울만치 큰 덩치를 짊어지고 있지만 애써 벗겨내지 않아도 때가되면 스스로 벗어지는...
오늘 선녀가 구름을 타고 우리를 맞이한 것은 이런 것 아니었을까?
흑과 백, 적과 청, 너와 나, 적과 동지 이런 구분을 덮어 두려는 ......
그래서 너흰 하얀 옷을 입고자란 한민족, 단군의 자손이라는 걸 알려주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주 : 1) 노장대는 기행수필인 특성상 함양군에서 표기한 지명을 썼습니다.
-구름모자-
굴을 형성한 바위도 전면에서 보면 그저 처마를 이룬 평범한 바위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사철 끊이지 않는 샘이 있고, 전면엔 은폐엄폐가 가능한 바위 하나가 기대어 서있다. 굴은 언 듯 보기엔 전면이 훤하게 뜷린 두어평의 공간처럼 보이지만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가장 안쪽에 조그만 틈새가 보이고, 이곳으로 몸을 집어 넣으면 20여명이 기거할 만한 커다란 공간이 숨겨져 있다.
이현상이 사살되고 난 후 사실상 괴멸의 길을 걷던 빨치산은 그 후 아군의 생명보장 작전에 끌려 일부는 스스로 하산하기도 하였으나, 끊임없는 아군의 소탕작전에 밀려 대부분 사살되거나 지도자를 잃은 채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그러나 이곳에 숨어든 정순덕 일행은 1962년 이은조가 사실되기 전까지 이곳에 은거하고 있었고, 그 1년 후 자기가 태어났던 고향집에서 동료 이홍이마저 잃은 채 생포되었다. 생포당시 입은 관통상으로 다리마저 잃고 차다찬 감옥에서 23년을 보낸 후 출소하였으나, 슬픈 역사만이 자리한 가슴을 다스리지 못하고 쓸쓸한 인생으로 남은 생을 살아야 했다.
흐르는 세월 앞에서 추하지 않은 것은 없겠지만, 기구한 운명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그녀의 삶의 궤적은 애초부터 사상이나 이념따윈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자신만이 아는 선택의 꼬리는 역사에 진실을 묻어둔 채 2004년 후미진 도심의 뒷 켠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노장대1)를 오르는 길은 솔봉 능선길로 나가야 한다. 능선을 만난 후, 전망바위(일명 의론대)를 지나면 노장대와 안락문 삼거리에 닿고, 두 곳은 지척간이다.
노장대는 오를 수 없는 바위처럼 보이지만 하단부는 인공시설이 있어 어려움 없이 오를 수 있고, 상단부는 바위 틈새를 빠져나와 마지막 두 바위가 기대고 있는 안쪽에서 선답자가 설치해 놓은 줄을 잡고 발디딤을 확인하며 위험한 오름짓을 해야만 오를 수 있다.
500년전 사림의 조종이었던 김종직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쓴 [유두류록]에 나오는 독녀암으로 그는 이 바위군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 독녀암이라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었다. 그 높이가 천여 자나 되고 다섯 가닥으로 갈라져 있었다.(중략) ... 그곳에 올라가려면 사다리를 놓고 잣나무를 붙잡고 바위를 돌고 돌아야 하는데, 등과 배가 모두 벗겨진 뒤에야 꼭대기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목숨을 내건 자가 아니면 올라갈 수가 없었다.(하략)」
날이 좋으면 지라산자락을 감싸 도는 엄천강에서부터 반야봉까지 이어지는 시원한 주능, 그리고 수도 없이 가지를 지른 지능과 첩첩한 산들이 감동의 도가니로 넘쳐 나겠지만 오늘 같은 날은 저 구름을 타고 노는 선녀에게 물어볼 일이다.
그런 한편으로는 구름 속에 서서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는 오늘이 차라리 모든 꺼풀을 벗어던진 나신보다 더 신비하다. 그것은 남아있는 부분에 대한 상상과 떠나야 하는 미련 때문이다.
안락문과 신열암 터는 바로 이 부근이다.
하늘 위에나 존재하는 낙원을 들어가는 문은 모양새 자체부터가 오묘하고, 그 아래 자리를 튼 신열암은 거대한 병풍을 두르고 앉자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극락정토였을 것이다.
솔봉은 송대마을 좌측 지능을 이루는 능선으로 높지도 길지도 않은 평범한 줄기에 불과 하지만 전망만은 상쾌한 곳이다. 정상은 주변의 바위들을 모아 억지로 바람을 막고 벌거벗은 채 누워있는 묘 한기가 애처로워 보인다.
그곳에서 송대마을 까지는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 전에서 좌측으로 꺾어 10분여를 내려오면 마을 뒤 임도로 내려선다.
정순덕과 선녀, 그리고 구름.
그러나 오늘은 정순덕이도, 선녀도 그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그곳엔 하얀 구름만이 있었을 뿐이다.
역설적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현재를 불확실성 속에서 살고 있다면, 미래에도 확실한 건 하나도 없다. 저 구름처럼...
그녀가 적어도 이 산속을 헤메였던 13년의 세월은 사랑 따위에나 목숨을 걸었던 공허한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 한들 그의 일생은 절망의 심연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그렇다면 그녀가 짊어진 무게는 얼마였을까? 혹 저 구름만큼이 아니었을까? 버거울만치 큰 덩치를 짊어지고 있지만 애써 벗겨내지 않아도 때가되면 스스로 벗어지는...
오늘 선녀가 구름을 타고 우리를 맞이한 것은 이런 것 아니었을까?
흑과 백, 적과 청, 너와 나, 적과 동지 이런 구분을 덮어 두려는 ......
그래서 너흰 하얀 옷을 입고자란 한민족, 단군의 자손이라는 걸 알려주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주 : 1) 노장대는 기행수필인 특성상 함양군에서 표기한 지명을 썼습니다.
-구름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