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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행기>지리산산행기

2005.06.21 15:32

누가 주인인가?

조회 수 226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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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주인인가?


서산대 가는 길은 힘겨웠다. 내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지혜를 매번 경험하면서도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그곳을 무사히 찾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만용이 일단 무리이긴 했지만 그 능선 한 자락에서 내가 사고할 수 있는 한계에 무력함마저 느껴졌다.


새벽 찬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 마시며 한가로운 산행에 대한 머릿속 구상이  끝나기도 전 노고단 산장에 도착한다. 아침 여명이 채 일기도 전인 이른 새벽, 땀을 들일 시간도 없이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드는 산장을 뒤로하고 속보로 노고단 모퉁이를 돌아 몸을 숨긴다. 이내가 피어오르는 새벽 기운은 내 가슴속의 외로움까지도 감싸 안으려는 듯 얼굴을 간지럽힌다.

정상을 지키고 있는 송신소 모퉁이를 돌아 들어가면 비로소 완연한 산길이 시작된다. 흐르는 바람이 몰고 다니던 구름은 풀섶에 내려 앉고 그 숲을 지나온 내 몸엔 어느새 함초롬한 이슬이 하나 가득 묻어난다.

문수대는 적막하다. 둘로 나누어진 커다란 단애 아래 조그만 오막살이 하나 달랑 매달아 놓은 그야말로 단촐하고 보잘것없는 건물이다. 이십여 년 전에 왕시루봉을 내려가다 우연히 만났을 때의 감흥은 사라지고, 애두른 숲이 조망을 닫아 깊은 산속의 난쟁이 처소 같아 보인다. 우리 같은 중생은 이런 곳을 아무런 목적도 없이 찾아다니지만 정진중인 스님은 세상에 알려짐이 조심스러워 이른 새벽 찾아온 나그네의 발길이 달갑지만은 않은가 보다.

하긴 속세를 떠나 문수의 지혜를 구하려는 마음과 구경거리인 양 찾아나서 힐끔거리는 우리 무지렁이들과는 격이 있어도 너무 높은 격이 있어 보인다. 그것이 단절이 아닌 타락해져가는 인간사회에 새로운 정신을 불어넣어주려는 과정이기에 더 심오해 보이는 것도 같고...



고즈녁한 문수대, 초라해 보이지만 결코 초라하지 않은 곳이다


그곳에서 일행이 하나 늘어난다. 목적지를 묻기에 무심히 던진 말이었는데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며 막 시작하려던 아침도 황급히 챙겨 따라나서는 데는 어떠한 의미의 말도 필요 없었다.

돼지령 삼거리를 나와 헬리포트를 만나자마자 희미한 인적을 더듬어 몸을 숨긴다. 얼마쯤은 각오했었지만 이상하리 만치 인적이 보이지 않는다. 동물들의 흔적마저도 끊어진 어느 한 비탈을 내려선다. 이상타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간이 넉넉하여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분명 능선길을 걸어야 하는데 이미 좌측엔 조그만 계곡이 하나 시작한다.

능선을 잡으려 우측으로 돌았다. 물론 그곳에도 인적은 없었다. 분명 잘못된 것은 확실 했다. 어제 내린 비로 계곡물소리가 환청인 듯 가깝게 들린다. 어느덧 우리가 내리던 지능 끝이 보인다. 우측에 한길이나 쌓아놓은 장작더미는 분명 인간의 소행이 분명하지만 내가 아는 대의 위치와는 전혀 달라 미련을 버린다.

계곡을 건너 다시 좌측 능선을 차고 오른다. 있는 듯 없는 듯 산길 흔적이 보이더니, 첫 번째 지능을 올라서자 이미 폐목이 되어버린 표고목이 한무더기 쓰러져있다. 짙은 숲속에 갇혀있는 꼴이지만 예부터는 시야를 멀리 놓고 단애를 확인하며 오른다.

그러나 조그만 인적이라도 확인하며 쫒아가 보면 어김없이 거미줄처럼 역어진 고로수 파이프가 길을 막고 있을 뿐,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그 무엇 하나도 보여주질 않는다. 요 근래 벌써 이런 일이 두 번째다. 내 능력으로 지리를 안다는 건 무리인 것 같다. 내 훗날 지리의 혜안이 뜨였다 해도 난 여전히 그곳에서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 지혜에 갇혀 허우적대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위쪽 산죽이 흔들린다. 마치 사람이 헤쳐 나오는 것처럼, 순간 반갑다는 마음보다는 섬짓한 기운이 든다. 자세를 낮추고 전면을 응시하다 에코를 넣으니 움직임이 멈춘다. 적막이 흐른다. 어느새 서로가 적이 되어 있었다. 신경전은 치열했다. 어떻게 움직여할까? 갑자기 숲에서 불쑥 튀어나와 공격을 해온다면 무엇으로 대항해야 할까? 덩치는 나보다 더 큰놈일까? 인적도 없는 이 험한 산속에서 만약 위험상황에 처해 불리해 졌을 때 내가 먼저 도망치기란 힘이 들것이다. 그렇다면 지혜를 모아 싸워야 한다는 것인데...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서로의 미동이 없는 걸 보니 경계의 수준이 최고조에 달한 것 같았다. 그래도 발길을 되돌리기엔 아직 미련이 남아 우측으로 멀리 돌아 앞으로 나아간다.

또 다시 굵은 나무 기둥 사이로 벽이 보인다. 올라서 보니 단애는 있으나 터가 보이지 않는다. 비탈 끝쪽 산죽밭으로 인적이 있는 듯하여 앞으로 나아가니 그 끝엔 절벽이 가로막고 서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젠 너무 고도가 높아졌다. 눈짐작으로 건너편 왕시루봉 능선을 보니 1,238 봉우리가 지금 있는 위치와 레벨이 같고, 좌측능선 끝으론 주능 마루금이 멀지않은 거리에 살짝 보인다. 서산대는 해발 1,100m 부근에 있다. 다시 지도를 놓고 방향을 확인하며 허기진 배를 채우는데 발아래 산죽이 수북이 쌓여있다. 밑둥의 잘려진 모양이 기구 흔적이 없는 걸 보니 동물의 소행이다. 쌓인 형태나 넓이로 보아 곰의 짓이다. 조금전 신경전의 대상이 곰이라는 생각을 하니 그 자리에 오래 머물만한 곳이 못되었다.

벌써 두 시간 반이 지나 있었다. 다시 하산을 시작하면서 이제는 횡으로 갈지자를 그으며 내려간다. 기필코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각오까지 다지며...

그러나 언감생심, 저 위 곰 잠자리에서 확인 했던 위치와 문득문득 보이는 바위벼랑을 샅샅이 뒤져가며 내려서는데도 서산대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다시 계곡. 이 조그만 숲을 헤메기 시작한지 네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결정을 해야 했다. 졸지에 나를 따라나선 사람에게 고생만 시킨 꼴이 되었다. 그래 그냥 내려서자. 피아골 산장까지 내려서서 다시 판단을 하자. 서산대든 무착대든...

계곡은 의외로 큰 규모였다. 어제까지 내린 비의 영향으로 수량이 많기도 했지만 곳곳에 폭포가 가로막고 서서 굉음을 지르고, 불쑥불쑥 일어선 수직절벽이 앞을 막아 아슬아슬한 산비탈을 돌고 또 돌며 내려서야 했다. 이런 경우 팔과 정강이를 부딪히는 건 부지기수, 그렇게 위험스런 탈출을 시작한지 40여분이 흘렀을까? 비로소 사람들이 다니던 산길을 만난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래 적어도 이 정도의 사람흔적은 있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왜 처음부터 나 자신을 믿지 못했던 것일까? 왜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까? 나 혼자만의 만용이었을까? 새로 생긴 동행자와에 대한 우월심리였을까? 아니면 지리의 작은 지능에 불과하니 적당히 시간을 채우면 내어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동행자는 우번대 스님을 뵙고 가야한다 말한다. 생각을 고쳐 먹는다. 우선 서산대부터 확인하자. 그리고 시간을 판단하여 다음을 결정하자. 우번대든, 묘향대든, 무착대든...
동행자는 흔쾌히 따라 나선다. 능선길을 올라선지 30여분 지났을까? 벽과 너덜이 혼재된 부근에서 좌측으로 인적이 보인다. 지체없이 방향을 틀었다.

서산대는 거기 있었다. 아주 깊은 산중인 것 같으면서도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시야도 광활하고... 시간을 보니 이 지능을 헤메고 다닌지 꼭 5시간만 이었다.

서산대는 처참했다. 마치 난리통에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어지러운 잔해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겨우 하나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는 해우소마저도 사람의 발길이 끊긴지 오래니 머지않아 스스로 인간과 인연의 끈을 놓을 것이다.

허무함마저 도는 폐허의 터, 왜 수도장이 이런 모습으로 변했을까? 방법은 정녕 이것 뿐 이었을까? 그들의 행정집행은 과연 정당한 것이었을까? 이곳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일까?

아주 오랜 옛날부터 서산대는 분명있었다. 그곳에는 수도승이 기거하고 있었다. 한때 흐르는 세월을 거스르지 못하고 잊혀졌다 해도 그 장소는 없어지지 않았다. 긴 시간이 흐른 후 어느 수도자가 찾아 들었다. 그곳엔 그 터도, 그 바위벼랑도, 그 샘도 그대로 흐르고 있었다. 비가림은 해야겠기에 지붕을 올렸다. 나라에 소유를 기록하진 않았지만 오랜 옛날부터 그들만이 기거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런데 그 훨씬 이후 어떤 사람들이 주인이라고 나타났다. 내 땅에 허가 없이 지붕을 올렸다고 사람을 내쫒고 부셔버렸다. 이곳은 내 땅이다. 다신 오지마라. 그렇지 않으면 혼나는 수가 있다. 그런 뜻이다. 산산이 부서져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잔해들이 그때의 오만함을 말해주고 있다.

이 터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일까? 인위적으로 획정 지어진 선 하나, 도화지 위에 옮겨놓은 사각 테두리, 나라에서 정해 놓은 그 장부의 위력은 대단했다. 나랏님이 그런 약속을 정해 놓았는데 그 선을 찾지 못하고, 먼저 장부를 기록하지 못했으니 주인될 자격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나가라고 한다. 아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그들은 범법자가 아니다. 숨어들어온 도망자가 아니다. 도시락 싸들고 유람이나 다니는 행락꾼이 아니다. 적어도 이 산에 있는 공기와 물과 나무와 숲과 동물들을 해할 만한 사람은 아니다.

그들은 수도자이다. 구도의 길을 걷는 사람이다. 자신의 깨달음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두를 위한 깨달음이다. 그가 그런 터를 찾아 왔다. 그런데 남의 명령을 받고 그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쫒겨 났다. 참으로 허허로운 일이다. 묘향대는, 문수대는, 무착대는, 우번대는, 무주대는... 허허허 웃음이 나올만치 허허로운 일이다. 아마 그곳을 떠나야 하는 그 수도자도 그랬을 것이다. 허허허 웃었을 것이다. 그저 하늘을 쳐다보며 허허허 웃었을 것이다. 떠나는 아쉬움도 저 석간수 한 모금 마시고 흘려 버렸을 것이다.

날망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모퉁이를 돌아 허물어져 가는 담장을 스치고 지나간다. 바람이 머물다간 주인 잃은 작은 터와 졸졸거리는 옹달샘 소리가 애처롭기까지 하다. 지혜의 목마름은 우리 인간들에게나 있는 것이기에......

미련을 털어 내 듯 툴툴 엉덩이를 두드리며 길을 나선다.

오름길은 제법 서있다. 그곳에서 돼지평전이 있는 주능선까지는 줄창 한 시간 쉬지 않는 오름길이었다.

헬리포트, 분명 헬리포트는 맞았다. 그런데 그 장소가 문제였다. 그 부근의 헬리포트는 둘이었다. 숨어 다니는 범법자 신세라 남의 눈에 띨세라 성급히 몸을 숨긴다는 것이 첫 번째 포인트에서 꺾었던 것이다. 눈을 채 뜨지도 못했으면서 채워지지도 않은 머릿속 생각으로 알맹이 없는 지식이나 퍼뜨리고 다니는 나는 별수 없는 속물 이었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니 능선상의 거리는 2km남짓, 오늘 하루를 헤메고 다닌 거리치고는 내 자신이 너무 초라했다. 그래 그게 지리산 아니었더냐? 내가 아무리 용을 쓰고 다녀도 알아내지 못하는 게 지리 아니었더냐? 내가 아무리 공부를 하여도 풀어낼 수 없는 게 지리산 아니었더냐?

그저 의미두지 말고, 목적 가지지 말고, 조급해하지 말고, 내보이려 하지 말고 초근히 다니자. 걸음마를 배우듯 한땀 한땀 걸음만 옮기자.


- 구름모자 -

  • ?
    진로 2005.06.23 09:26
    느끼는게 많은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좋은 산행기 고맙습니다.
  • ?
    아낙네 2005.06.23 14:41
    역으로 비춰보게 되여지는 산행기였습니다.
    이기심과 욕심앞에 무너지지않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결국엔 그 상처가 되돌아올 것이라는 깨달음 항상 잃어버리지 않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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