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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곰은 알고 있을까?(왕시루봉)


반달곰이 사는 지리산 문수골.
영암마을 앞 덕은내에 자리한 지리산산간학교에 도착한 시간은 늦은 저녁이었다. 우리산악회 회원이자 지리산 산악구조대원인 홍동식회원 내외와 함께 차를 내리니 정문은 닫혀 있고 김대장님은 출타 중이었다.

남도의 훈훈한 인심과 더불어 정을 듬뿍 담아 오신 형님과 동생, 그리고 함께 모인 식구들과 즐거운 저녁을 보내고 포근한 잠자리에 들었다.


피로가 채 풀리기도 전 날이 밝아 꾸역꾸역 눈을 뜬 아침, 마당을 내려오니 동네 나이 드신 어르신께서 두리번거리며 들어오신다. 허락은 받았지만 어제의 성찬이 너무 걸판졌던지라 행여 잔소리라도 들을 까 싶어 잠시 움츠리고 있는데 어르신이 말을 건낸다.

“종뵉이는 어디 갔어?”
“예, 어제 부산가신다고 그랬어요”
“처갓집 갔는개비구만, 주인도 없는 집이서 잠을 잤어?”
“어제 전화 드렸었는데요 안에는 열어 놓는다고 따뜻하게 자라고 하셨어요”

대화가 통하자 모두가 저의기 안심하는 분위기다. 그때 문득 생각나는게 있어 건너편 우리가 올라야 할 곳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어르신에게 물어본다.

“저 골짜기 이름이 뭐예요?”
“문수골이지 뭐여”
“문수골은 이 쪽 큰 골짜기 아닌가요?”
“거그는 문수사가 있어 문수골, 여기는 문수링게 문수골여, 글고 저 우그가 생기골여 생기암이란 절이 있었어. 지금도 터는 남아있제”

내 지도에는 본류가 덕은내, 문수암 골짜기를 용소골이라 적혀 있으나 생기골이나 생기암터란 이름과 영암촌 뒷 계곡은 명칭이 나와있질 않다. 그런데 그곳을 문수골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뻔한 예기처럼 다시 한번 왕시루봉을 물어 본다. 그런데 또다시 돌아오는 대답이 전혀 뜻밖이다.

“저그 등성이에 가면 크댄헌 바위가 있는디 그것이 큰시루처럼 생깃다고 히서 옛날부터 왕시루봉이라고  그릿어”

내가 아는 상식이나 어느 자료를 찾아봐도 정상부 너른 초원이 펑퍼짐하고 두리뭉실하게 생겨 마치 큰 시루를 엎어놓은 것과 같다 하여 왕시리봉이라 이름지어졌다고만 알고 있었던 터였는데 또 하나 생각의 틀이 깨진 것이다. 하긴 펑퍼짐과 두리뭉실 만으로 시루를 연상하는 자체가 무리인 듯싶다. 우리나라에 몇 있는 시루봉은 하나같이 정상부가 평평하기도 하지만 그 평평함의 끝은 수직으로 꺾이듯 단애를 이루어 어렵지 않게 시루의 모양을 연상케 하지만 이곳은 느진목이나 구산리 방향 모두가 그저 수더분한 내림선이기 때문이다.

산간학교에서 빤히 내려다보이는 양지쪽에 옴팍하게 들어앉은 영암촌으로 내려선다. 원지명은 문수리의 중간에 있어 중대라 하였으나 영암에서 이주한 장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여 이렇게 불렀다한다.

동네 어르신이 문수골이라 예기한 골짜기로 들어선다. 처음엔 계곡을 우측으로 두고 멀찌감치 비켜서 가게되어 능선으로 붙는게 아닌가 착각하기도 하지만 곧 능선을 오르는 갈림길과 만난다.

지리산에는 유달리 문수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이곳 지명이 문수리요. 골짜기가 문수골이다. 게다가 노고단 정상부 아래에 있는 문수대, 삼정산 능선의 문수암, 그리고 이곳과 더불어 함양 휴천면 운서리에 같은 이름의 문수사가 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생각만 조금 넓혀보면 금새 알 수 있다. 문수는 불가에서 말하는 문수보살로 석가모니불 왼쪽에 모셔진 지혜의 화신이다. 그런데 지리산(智異山)이란 어떤 산인가? 어리석은 사람도 이 산에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는 곳 아닌가? 그렇다면 문수의 지혜(智)와 지리의 지혜(智)는 곧 같은 의미이니 이 산의 어느 곳에서도 지혜를 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시 음미해 보면 지혜를 얻고자 이산에 들어 더 좋은 구도의 자리를 찾아다니는 일은 인간의 욕심일 뿐이다. 그것은 마치 부처님 품안에 들어 ‘온풍이 나오는 콧구멍이 더 좋네, 운동장 같이 너른 손바닥이 더 좋네’하며 말다툼하는 격이다.

저 하늘금에서 시작한 단풍은 이제 막바지인 이곳까지 내려와 현란하기 짝이 없고, 고요만이 지키고 있는 골짜기에 바람이 일면 이미 숨을 놓아버린 낙엽들이 어지러이 맴을 돈다.

한 시간여를 올라가면 처음으로 계곡을 건너고, 그 위엔 커다란 폭포 하나가 적막함을 위로하고 있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계곡에 외롭게 떨어지는 물줄기와 그 단애에 위태롭게 자리 잡아 말없이 굽어보고 있는 저 나목은 같은 심정일 것이다.

길은 폭포 상단부로 있다. 그곳에서부터는 길이 곧추서 있어 곧 된비알을 올라서야 한다.

고개를 들면 하늘은 푸르른데 이 골짜기는 해가 들어오지 않는 북사면이어서인지 우중충하여 어디서 산짐승이라도 나타나면 우리가 먼저 놀라 뒷걸음질칠 것 같은 분위기다.

그러나 그 경사만 끝나면 왕시리봉의 품성이 그렇듯 이내 완만한 산길이 이어지고 곧 주능선을 만난다. 이른 시간에 시작하기도 했지만 앞서가는 사람 꽁무니를 놓치지 않고 좇아왔던 탓에 11시가 채 되기도 전에 주능을 올라서 버렸다.

가을마저 떠나버린 자리, 푸짐하고 넉넉한 자리, 금빛양탄자를 깔은 듯 포근한 자리.

오늘은 쉬엄쉬엄 늦가을 정취를 만끽하며 걷고 싶었었다. 시루바위에 올라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가을 햇살을 담고 천연덕스럽게 흘러가는 섬진의 은빛 꼬리를 보고 싶었었다. 그러나 하릴없이 남는 시간이 오늘은 햇살 가득한 주능의 정취로 만족하고 돌아가라 어깨를 다독거린다.

왕시리봉을 향해 너른 등줄기를 오른다. 이 능선은 지리산에서도 그 흔하디흔한 자랑거리나 구경거리도 하나 없다. 또한 시루를 연상할만한 어떤 모양도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숲에 들어서는 숲이 보이지 않는 법이니 산속에 들어 산을 찾으려하고 있다면 그건 우자들의 숨바꼭질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이곳에는 감출 것 없이 가슴을 열어 받아주는 그 온화한 품성이 있다.

그러니 그 의미를 모르면 이곳은 너무도 평범하여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는 곳이다. 그리고 나직이 바람으로 예기한다.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자만이고, 아집이고, 욕심이라고......

외국인 선교사 수양관.
이국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지만 왠지 모르게 지리의 느낌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의 발자취로 느껴진다면 나의 오만한 심성일까? 애당초 노고단에 터를 잡았다가 여순반란사건과 한국동란으로 폐허가 된 후 1961년부터 새로이 터를 잡은 곳이다. 교회는 물론 수영장과 테니스장이 있고, 한때는 이들을 나르는 품삯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주종관계의 역기능이 있었다 할 순 없지만 이제는 주인 잃은 공가처럼 황당그래 남아있어 보기도 안쓰럽다.

문득 동네 어르신이 한말이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 짐들도 있고 사람들도 쪽~ 있는디 지한테 배당됭게 하매 좀 뚱뚱한 여자였든 모냥여, 그리서 지게바작에 올려가꼬 땀을 뻘뻘 흘림서 올라가다 샘통이나서 그릿디야, ‘하따 고년 참 무겁다’. 그릿더니 그 노랑머리 여자가 화를 버럭 냄서 바작에서 내리라고 허드니 다짜고짜 내려가라 그러드랴. 알고봉께 그 여자가 한국서 오래 살아서 한국말을 잘 알아 듣는디 미국 여잔중만 알고 그릿던거여. 그리서 돈도 못벌고 내리왔디야. 허허허”

왕시루봉 고스락 전 오목한 분지 양지밭에 고즈녁하게 자리잡은 수양관 건물들.

문득 문명과 사람의 인식 차이가 이렇게 다르다는걸 느끼게 된다. 우리 선조들은 지리산을 마음의 도량을 넓히고 구도의 장이나 난세를 극복할 피안의 장소로 여기며 경외의 대상으로 삼았었다. 그런데 그들은 이곳을 휴양지과 피서지로 택했다. 당초의 목적이 풍토병과 돌림병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긴 하였지만 이제는 이용객은 물론이요, 변변하게 관리인 하나 없는 곳으로 전락하여 머지않아 기운이 쇠락해 앙상한 뼈대만 남아있을 폐허의 음산함이 연상되어 차라리 옛 모습의 복원이 더 어울릴 듯싶다. 하긴 노고단의 옛 선교원 건물을 복원한다는 교계의 움직임이 있어 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하니 가당치도 않은 일임은 짐작하겠지만......

양지녘에서 따듯한 햇살을 받으며 한가로이 노닐다가 정상으로 걸음을 옮긴다.

주능의 느낌은 언제 어디서 보아도 장쾌하다. 전망이 좁아 나뭇가지 사이로 띄엄띄엄 보이는 풍광이지만 거대한 몸집으로 늘어선 주능은 백두대간의 마무리로서, 한반도의 기운을 담고있는 민족혼의 영산으로서의 분위기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느진목을 향하다 막 내려선 삼거리에서 좌측을 들으니 곧 묘지가 한기 서있다. 돌아가기도 그래 그냥 좌측의 골짜기로 내려선다. 첫 나들목은 길이 있는 듯 하지만 이내 너덜강이 나타나고 길은 숨어버린다. 왠만하면 보일 것 같던 인적은 바위에 덕지덕지 엉겨붙은 이끼들이 사람들 손때가 거의 없었음을 예기하고, 살아 움직이는 돌들은 한시도 긴장감을 풀어놓질 못하게 한다.

그런 경사가 끝나고 우측에 거대한 벽하나가 보이는 지점부터는 여린 길 흔적이 보이더니 사유지 안내판이 서있는 무인들의 치성움막에 다다라서는 다시 지리 고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근 한 시간을 기다려 사람을 모으고 얼마 남지 않은 가을을 예기하니 지리산이 떠나갈 듯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골짝을 메운다.

이후 길은 너른 등로로 바뀌고 조그만 건물이 들어서 있는 암자 모퉁이를 돌아 나오면 이내 문수사가 앉자있는 너른 계곡 용소골을 만난다.

곰이 있는 골짜기. 한때 지리산반달곰 프로젝트를 구상하여 방사했지만 실패하고, 이제 같은 종이라는 시베리아산 곰들을 방사했던 장소가 이 덕은내 골짜기 끝자락이다. 또한 문수사에는 어느 신도가 방생하려던 곰이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절 주위를 맴돌아 이제는 철창 안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있다.

그들이 왜 멸종되었는지, 그들이 왜 야성을 잃고 인간주위를 맴돌고 있는지는 인간의 욕심을 되짚어보면 알 일이지만, 그렇게 억지스럽게라도 그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게하려 한다면, 그래서 이 산에 생물의 종다양성이 복원된다면야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겠지만, 자연을 자연답게 두지 않고 인간에게 편리하게 가공하려는 위정자들의 꼼수을 먼저 막아내는 것이 아직 남아있는 것들에게 더 보탬이 되지 않을까?

머지않아 호랑이, 늑대, 표범까지도 복원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전에...

하루를 마감한건 애초의 출발지였던 산간학교였다. 어제저녁을 그렇게 풍성하게 먹고도 아직 남아있는 음식이 있어 또다시 잔치상 벌리듯 풀어 헤쳐 석별의 정을 나눈다.


네편도 내편도 없이 오직 베풀기만 하는 지리의 넉넉함을 어설프게나마 풀어내며...


- 구름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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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호정 2004.11.15 20:35
    지리산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것도 없는 왕시리봉이라지만,
    님의 산행기는 어느 지리종주의 산행기보다 새록새록 ,구수하게,
    알것들을 풀어내 줍니다.높지 않은 지리산 한 봉우리, 계곡, 문수사주변의 묻혀있던 많은 이야기들이 우리 곁에 나와 시선을 붙잡아줍니다.
    알찬 산행기 잘 읽습니다.합장
  • ?
    하해 2004.11.16 15:23
    산행기에 마을과 사람 이야기가 소담히 실려있으니 풍성합니다. 구름모자님의 글에서는 종종 접할 수 있어서 참 좋더군요.
    지리산이야기를 구수하게 들려주는듯 하여 여유롭게 읽습니다.
  • ?
    하해 2004.11.16 15:29
    그간 지리산산간학교는 한번 구경도 못하고 지나치기만 했습니다. 길가에서 문패 보고 들여다보려해도 턱이 여간 높아서.^^ 오랜 세월 산에서 생활하시는 김종복님은 누구못지않게 쌓이고 쌓인 지리산이야기가 많을 듯 싶습니다.
  • ?
    신후 2004.11.17 20:13
    두루 경계와 가르킴의 예지 번뜩이는 빠르면서도 한편,
    "섬진의 은빛꼬리를 보고자 쉬엄쉬엄 걸어보는..." 여유속에
    "나직이 바람으로 예기하며,자연스럽지 못 한 것은 자만이고,
    아집이고,욕심이라고......"소담스런 대화 등장하는 산행기
    일품이네요.
  • ?
    구름모자 2004.11.18 00:40
    섬호정님, 하해님, 신후님 감사합니다
    구조대장님은 지리산을 너무 사랑하시는 분이라 사람을 구한다기 보다는 지리산을 구하기 위해 구조대를 조직했다는 표현이 맞을 듯 싶습니다.
    말씀이 정감이 넘칠뿐 아니라 사람을 너무 좋아하셔서 언제라도 방문하시면 더 없는 정으로 맞아주시는 분입니다.
    없을 때 왔다갔다하면 어찌나 서운해 하시는지...
  • ?
    GBC 2006.07.15 10:10
    인간, 가축의 생명을 담보로 자행되는 반달곰 방사 전면반대
    http://www.GodBuddhaChrist.com/savemt
    방문하셔서 같이 지리산과 국립공원들을 지켜나가십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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