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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이 꿈꾸어질 때(한신지계곡 우골-연하북릉)

한신계곡이라하면 지리산의 빼어난 골짜기로 손꼽는 곳 중의 하나이다. 백무동을 기점으로 이 계곡에 모이는 큰 골짜기만해도 제석봉과 연하봉 사이를 내리는 한신지곡, 연하봉과 영신봉 사이를 내리는 한신주곡, 연신봉과 칠선봉 사이를 내리는 큰새골, 칠선봉과 덕평봉사이를 내리는 작은새골이 있다. 물줄기의 시발이 드넓은 어머니품 지리산 주능에 두고 있으니 모두 다 규모가 상당하고 경관이 수려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중 한신지곡은 예전엔 하동바위능선보다 무료함이 덜하고 붐비지 않아서 자주 들던 골짜기였으나, 어느순간 한신주곡을 열면서 등산로를 폐쇄시키는 바람에 이젠 상당한 모험을 감수하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골짜기로 변해버렸다. 그 모험의 대상이 인간이냐, 자연이냐만의 차이만 존재할 뿐.


백무동 주차장에서 하루저녁을 유하고 일어난 아침은 썩 상쾌하지가 못하였다. 전날의 피곤함과 술, 그리고 장소에 대한 불편함이었다.
아침을 밀어 넣지만 속만 울렁거리고, 이내 모자란 잠이라도 채우려 누워 보지만 동이튼 하늘은 눈꺼풀마져 투과해 그것마져 용이치 않다.

걸음은 천근만근, 일행이 많았기에 짐이 될 것 같아 영 아니다 싶으면 가내소 삼거리에서 되돌아오기로 작정을 하고 길을 나서지만 자꾸만 멀어지는 걸음은 어쩔 수가 없다.
가내소 삼거리, 마음은 심란하지만 그래도 나선 길이니 끌려가듯 오르느니보다 옛 추억이나 추스르자 자위하며 뒤쪽에서 하느적하느적 발길을 옮긴다.

길은 많이 변해있고, 사태가 일어난 비탈은 위험스럽게 계곡 쪽으로 길을 떨구어 신경쓰일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연하북릉에서 갈라져 나온 조그만 지능 모퉁이를 도는 데만도 거진 한 시간, 새로운 계곡을 만난 듯 반가운 너럭반석에 앉자 허겁지겁 행동식을 먹는다.
사람의 흔적이 많이도 사라진게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고맙기 까지 하다. 다만 차단만이 보전의 가장 편리한 방편이라 생각하는 너무도 단순한 인간의 사고에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지리산을 다니는 생리처럼 기존의 등산로를 찾아 오르기 보다는 계곡을 그냥 차고 오르는 게 오히려 더 상쾌하고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흐르는 물소리를 벗 삼아 쉬엄쉬엄 오르면 천근만근이던 발걸음에 새로운 기운이 솟아나고 이른 아침의 싱그러움마저 계곡을 넘쳐 흐른다.

글쎄 이곳을 올랐던 예전의 느낌은 무엇이었을까? 족히 10년쯤은 흘렀으니 아마도 고행길 아니었을까? 중배낭에 장비를 가득 짊어진... ‘하나 둘 쾅쾅’을 목이 터져라 외쳐대고 건폭에 매달려 얼음을 찍던 동계의 마지막 날은 하중훈련이었으니 계곡의 수려함에 취하기보단 얼른 올라서 어깨를 누르고 있는 장비를 장터목 앞마당에 내려놓고 텐트 속에 둘러앉자 한 순배 두 순배 선배님이 넘겨주는 술잔을 감지덕지 받아 마시며 ‘내가 왕년엔’하며 풀어내는 산예기를 듣는 맛이었지.
그래 맞다. 가을날 장터목에서 여유 있게 내려오던 그날은 단풍이 환상이었다. 가을낙엽은 바람에 우수수 흩날리기도 하고, 물길따라 흘러가는 조각배처럼 폭포며, 물웅덩이며, 너른 반석들 위로 휘청휘청 떠밀려내려 가기도 했었다.

옛 생각에 사로잡혀 무심코 물길을 건너다 굉음이 일어 고개를 들어보니 천령폭포다. 무엇이 되었든 이곳에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곳이 사람의 감동을 주지 않은 곳이 없겠지만 수량이 풍부한 폭포가 청명한 하늘을 비상하여 내 있는 앞으로 날아온다면 마치 날개옷을 입은 선녀가 날 마중이라도 나온 양 가슴이 뭉클해 진다. 그게 이름처럼 하늘(天)의 명(令)이라면야...

천령폭포 위쪽에서는 좌측을 돌아 상단으로 올라서야 한다. 위쪽으로는 옛길이 있지만 머지않아 다시 계곡으로 내려서게 된다. 꼭 길이 있어서가 아니라 계곡의 너럭반석이 햇살을 받아 흐르는 물살마저 새롭게 채색하여 직접 느끼며 오르고자 함이다.

지계곡 갈림길, 거친 숨을 달래며 남은 거리를 계산하고 있는데 뜻밖의 제의가 들어온다.
“우右골로 차보는게 어때?”

몸이야 어찌 되었든 생각의 여지가 없다. 일부러도 찾아서도 갈란지라 예까지 왔으면 올라온 거리만큼이라도 단축했으니 손해 볼 것 같진 않고, 궁금한데 지금 풀지 않으면 언젠가는 풀어야할 숙제로 남기에 코앞의 유혹이 더 강하게 와 닿는다. 때론 일탈을 꿈꾸는 방랑자처럼......

계곡은 사태가 진행되고 있는 위험스런 곳이었다. 원시적인 느낌, 새롭다는 느낌보다는 정리하지 않은 홀애비 골방처럼 퀴퀴하고, 골치 썩이는 악동들의 놀이터처럼 어수선하다.
바위들은 철분이 많아 피를 토해낸 듯 붉은 빛을 띄고 있어 아물지 않은 듯한 상처가 안쓰러워 보이고, 살아있는 바위들이 이방인의 침입을 경계하며 버르륵 버르륵 소리를 지른다.
하류의 규모는 그래도 큰 물길이 스쳤음인지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상류로 오를수록 위험도는 수위를 더하여 잠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미완성의 느낌은 여러가지를 생각케 한다. 남아있는 몫에 대한 책임감이 지워지고, 아직도 그려내지 못한 작품들에 무한의 상상력을 불어넣어 개척자들에겐 완성작품 이상의 매력을 느끼게 한다. 그것이 일탈을 꿈꾸는 자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이다.

주능선이 바라다 보여도 마루금의 가늠은 의미가 없다. 지금 서있는 곳을 우선 벗어나는게 급선무다.
사태에 쓸려 내려간 자리는 풍화가 더디 진행되어 땅마저 무르고 바위는 푸석하다. 게다가 계곡에 성기지 않게 배열된 바위들은 인간의 발디딤에도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경사는 암벽등반을 해야 할 만치 곧추서 있어 한번의 실수는 자칫 대형사고를 유발할 수 있는 위험요소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물흐름이 끝난 얼마 후, 사태가 시작된 지점이 보이고 토사지대와 접한 사면을 오르는데 갑자기 외마디 외침이 들려온다.
“낙석”
그리곤 굴러 떨어지는 돌소리... 화들짝 놀라 위를 보니 어린아이 머리통만한 돌이 굴러 내려온다. 순간적인 동작으로 바위 사면에 붙어 안간힘을 쓰는데 다행이 조그만 테라스 바위 혼합지대에서 멈춘다. 뒤를 돌아보니 마치 훈련 받은 군사들처럼 제 살길은 찾아 이동해 있다. 좁은 협곡에 길게 늘어선 일행에게는 치명적인 사고를 안겨줄 수 있는 위험한 곳이다.

사태지역을 지나니 이제는 미역줄나무 덤불지역, 사람 지나간 흔적이 없으니 뚫기가 여간 사나운게 아니다. 전 대원이 편하려면 한 길을 뚫어야 하나 그런 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제각기 우선 편한 길로 나가게 되고, 이곳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큼이나 집요하게 덤불은 배낭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는다.

몸부림치기를 얼마나 했을까, 비로소 전면이 터지고 지리의 주능과 마주선다. 연하봉을 막 지난 헬리포트 전이었다. 주능선을 지나는 사람들이 흠씬 젖은 몰골에 짜증스런 표정의 우리를 이상스런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 모습을 감추기라도 하듯 우린 서둘러 연하봉 숲 그늘로 숨어들었다.


하산은 연하북능, 예전엔 이 루트를 탈출로라 한 적이 있었다. 악천후에 한신계곡을 내려가지 못하면 굳이 장터목을 지나 하동바위코스로 가지 않고서도 하산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였다. 능선으로만 내려서다 마지막 가내소폭포 앞에서 한신지계곡만 건너면 되기 때문이다.

능선은 대체로 순탄하고 길이 뚜렷하여 길잃을 염려는 없다. 다만 마지막 부분이 암릉이어서 조금의 주의가 필요하나 특별히 어렵다고 생각될 만큼의 구간은 없는 게 특징이다. 한신주곡이나 새골로 올라 하루를 잇기에는 더없이 좋고, 조금의 시간과 체력의 여유가 있다면 오공능선이나 창암능선으로 내려설 수도 있다.

바람도 없는데다 습도가 많아 후덥지근한 날씨인데도 계곡물소리에 홀려 옷을 입은 채로 첨벙 뛰어들기라도 할 듯 급하게 뛰어 내려왔으나 막상 계곡에 도착해서는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씻을 여유도 없이 백무동으로 발길이 옮겨지고, 함께한 일행과 들이키는 맥주는 걸림도 없이 서너잔이 단숨에 넘어간다.

2004년9월


- 구름모자 -


  • ?
    너른산 2004.10.01 15:35
    첩첩산중.. 끊임없는 유혹에 스러지고야 마는 산꾼..
    가파른 걸음이 알싸하게 느껴졌습니다..
  • ?
    아낙네s 2004.10.04 11:45
    거친호흡 잡아보려다 그 수려한 모습 가슴에 담지못하고왔으니
    다시 찾을 땐 저 또한 그럴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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