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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 골짜기에 붙어있는 “비린내”라는 이름은 어원 자체만으로도 팔자에 풀지 못할 기구한 전설이 서려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잔뜩 묻어난다. 하긴 근세에만 하더라도 피비린내 나는 민족상잔의 비극이 이 동네 골짜기에서 수도 없이 자행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생각해봐야 할 것은 자칫 피아골이라는 어원의 의미 변천처럼 “피아의 싸움으로 많은 피해를 입어...”라든지 혹은 “그 전쟁통에 피가 넘쳐나 피밭골에서...“라는 원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굴절된 자의적 해석들이 초심자들에게는 혼돈만 가중시키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그것은 그러한 역사적 사실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한 단면의 이입이 본래 의미를 상쇄할 만큼의 큰 의미를 지녔다 하더라도 그 역사적 사실에 맞는 명칭이 새로이 생산되었다면 모를까 기존 명칭이 억지 해석되어 짐으로서 후자에게 여과 없이 전달되고 이에 따른 혼란이 종내엔 엉뚱한 불씨가 되는 경우가 왕왕있어 조금은 신중해야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곳에 들어 그러한 느낌을 받고 풀어낸 글과 원래 그 어원이 근세에 새로이 생성된 사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비린내”에 관한 어원 유래를 찾아보니 하나는 함양군 전설집에 나오는 선유정과 관련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마천향토지에 나오는 풍수에 관한 이야기다.

선유정에 관한 전설은 ‘선녀와 사냥꾼’에 대한 전설로 우리나라 전래동화인 ‘나뭇꾼과 선녀’와 비슷하나 후자가 마지막에 상봉하여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과는 달리, 전자는 끝내 상봉하지 못하고 화석으로 변하여 비통한 죽음을 맞는데 원통하게 떠나보낸 유모엄마의 골이라 하여 비린내골이라 했다는 설화적인 전설인데 반해,

다른 하나는 삼정(음정, 양정, 하정)마을 중 제일 위쪽 음지에 있다는 음지말(음정) 상부의 이 골짜기가 제비가 날아오는 형국이어서 비연래飛燕來골 이라한다는 풍수적 주석이 곁들인 학문적인 이야기가 전한다.

벽소령을 휘감아 도는 도로 끝 지점에서 비린내골을 내려선다. 초반부는 경사가 제법 급하고, 인적이 거의 없어 골짜기를 이룰만한 지점까지는 썩은 나무와 낙엽을 쓰고 있는 너덜지대를 감으로 잡아 내려가야 한다. 그리 오래지 않아 마른 계곡이 형성된 상류부를 만나면 오래전 사태의 흔적이 보이고, 바닥은 급한 경사를 이룬 건폭이 물맛이 그리워 입맛을 쩍쩍 다시고 있다.

계곡다운 모습을 보려면 그곳에서 합수점까지 제법 험한 지역을 한 두 번 지나야 하는데 크게 위험지역은 보이지 않는다. 합수점이 보인다 싶으면 이 가뭄에도 제법 큰 물소리가 웅웅거려 비린내골의 서막을 알린다. 그곳에서 바로 시작이자 마지막인 폭포가 거대한 물줄기를 떨어뜨린다.

억지로 급조해낸 흔적 없이 깨끗한데다 수직으로 일어선 모양새도 예쁘거니와 그 높이도 상당하여 그 함지박에 함께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내면 깊숙한 곳을 자극한다.


첫번째 합류지점에서 만나는 폭포. 비린내골의 하이라이트같은 존재다


여기서부터는 제법 인적이 보인다. 내림길에 이런 표현은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점입가경이다. 역으로 올라 마지막폭포를 보았다면 무성영화의 하이라이트처럼 깊은 감동이 있을 수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내림길에서 그만한 감동 묻어나지 않는 건 아니다. 아니 그 안에 들어서있는 사람이라면 훨씬 더한 감동에 전율을 느낄 것이다. 그건 계곡 자체가 그만큼 빼어나다는 이야기다.

뭐랄까 이 느낌, 이곳은 정녕 내가 아는 지리산 계곡이 아니었다. 이렇게 소란스럽지 않고 잔잔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골짜기는 아마 모르긴 해도 지리산 아흔아홉계곡 중 이곳뿐일 것이다. 이 계곡은 마치 지리산 어느 한 계곡이 아니라 설악의 가야동계곡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너른반석을 흘러내려 큼지막한 소를 만들고 있다.


시종일관 너른 반석위로 물이 흐르며, 그 끝엔 예외 없이 커다란 소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곳이 끝인가 하면 또 다시 새로운 선경을 내어 놓는다. 그렇기에 이 계곡에서는 반석위에 가로놓인 바위덩어리들 마저 예사롭게 보이지가 않는다. 그저 저 위 어디에서 홀연히 떨어져 나와 아무렇게나 내방쳐진 상태로 굴러오다 멈춘 외톨이가 아니라 꼭 그곳에 있어야 할 것처럼, 아니 꼭 그곳에만 어울리는 장식처럼 한 치 흐트러짐도 없이 당당하게 서있는 듯 보인다.


너른 반석으로 흐는는 계곡, 늦가을 정취가 가득하다


비린내골 하류부. 시종일관 이러한 계곡을 내려오게된다


이런 골짜기는 광대골이 합류하는 지점까지 계속 되지만 휴양림에서 닦아놓은 임도를 만나면 사실상 끝이 난다. 자연을 역행하는 인위적인 방식은 이 아름다운 계곡의 정취마저도 반감시켜 지루함만 더해질 뿐이다.

산이란 참으로 이상하다. 스스로 그렇게 앉자 있는데도 우리 같은 무지렁이한테까지 저렇게 많은 것을 주고 있으니 말이다. 굴절이나 왜곡 하나 없이 순하디 순한 모습으로, 아니 수직으로 일어선 폭포 하나, 주변을 애두른 절경 하나 없이도 이렇게 깊은 심연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은 때론 호소력있는 웅변보다 중도를 지키는 침묵이 인간의 마음에 더 깊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게 아닐까? 그것은 민초들의 상처받은 가슴을 몇 마디 사탕발림으로 위로받을 수 없는 것과 갚은 이치 아닐까? 총칼에 쓰러질지언정 그들의 한까지 잠재울 수는 없지 않을까?

이곳을 찾은 후 혹시나 하여 뭇 선객이나 세월을 등지고 낙향한 선비, 아니면 어지러운 세상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은둔했던 사람들의 기록이나 자료를 뒤져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능력 부족을 한탄함이 아니라 그곳이 마치 한서린 아웃사이더들의 놀이터이거나 우리 같은 삼류들에게나 어울리는 놀이터 아니었을까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들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있을 것이기에...


오늘은 유난히도 백무당, 음지, 처연한 달, 비린내가 자꾸만 외줄에 매달려 고단한 삶을 살아왔던 광대를 연상시키는 건 왜일까? 혹여 내 감성마저 왜곡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혼란스런 마음을 달래려 계곡에 손을 담는다.

산은 말이 없지만 골짜기를 흘러 내리는 물소리는 아직도 고고하다.


-구름모자-


  • ?
    산이조아 2005.12.21 13:38
    계곡을 따라가는 산행이 좋아보임니다.
    사진속에 한분이 계시는 군요. 숨은 그림찾기 같습니다
    비린내골이 어디를 말하는지 지도를 찾아봐도 안나오는 군요.
    대충 마천면 음정에서 올라가는 길을 말씀하신 것 같기도 하고요
  • ?
    구름모자 2005.12.23 10:56
    산이조아님
    비린내골은 지리산자연휴양림이 있는 광대골 골짜기중 제일 좌측의 골짜기 입니다
    마을사람들의 구전에 의하면 휴양림이 들어선 골짜기(중앙)은 우수청골 이고요, 우측은 생이바위골이라고 부른답니다.
    생이바위골은 내년 봄에나 다녀와야 될듯 싶습니다.
    내년에 기회가 된다면 생이바위골도 산행기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언제나 즐겁고 추억이 남는 산행 하십시요
    감사합니다
  • ?
    선경 2005.12.26 12:02
    황금의 연휴에 구름모자님을 따라
    비린내골을 산행하는 기분,,,,너무 감미롭습니다
    그리운 고국의 지리산행을 이렇게 멀리서도 멋지게 느낄수있음을
    너무 너무 감사드립니다,,,구름모자님
    벌써부터 생이바윗골 산행기도 기다려집니다
    새해 더욱 보람찬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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