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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암자에서 천왕을 오르다(광덕사골-천왕동릉-중봉골)


광덕사골을 거슬러 천왕동능으로 올라 중봉골로 내려서는 길이면 왼 무릎관절에 이상 조짐이 있는 내게는 조금 벅찬 길이었다. 그런데도 이 골짜기가 자꾸 마음을 동하게 하는 것은 이성계가 왕이 되기 위하여 8도 명산에 기도를 드렸다던 암법주굴에 관한 전설 때문이다.

향리를 떠나 변방의 무장이었던 그가 천운의 기를 품었던 장소, 하나의 국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뜻을 품었던 장소라면 과연 그곳은 어떤 모양새를 하고 있을까? 동해로 솟아오르는 해오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까? 등지고 있는 천왕의 지기는 채울 수 있을까? 내게는 버거운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지만 그 갈증을 해소하는 일은 오로지 오르는 길 밖에 없었다.



중산리에서 자연학습원을 오르는 길은 포장도로이기도 하지만, 지루함을 무릅쓰고 오르는 길에도 심심치 않게 올라오는 차량의 경적과 소음 때문에 짜증 섞인 불만이 터져 나온다. 이러한 이유에선지 법계사 오름길은 등산로 정비가 잘되어 있음에도 등산객이 많지 않아 한적함 속에서 오를 수 있다.

늦가을의 제법 차가운 날씨에도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올 때쯤이면 자연학습원 정문 삼거리가 나오고, 여기서 좌측 소로를 들어서야지만 비로소 고즈녁한 산속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출렁다리가 놓인 계곡을 두어 번 건너면 순두류 삼거리가 나오고, 나무계단을 올라 지능을 돌아 나가면 비로소 천왕봉골과 광덕사골이 합수하여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이 능선 사면을 거슬러 오르면 솜씨 좋은 목공의 땀이 베인 아담한 목교를 만난다. 바로 광덕사교이다. 광덕사골은 여기에서 길을 버리고 우측 골짜기로 들어가야 한다.

입구에서 사람소리가 완전히 멀어지는 지점쯤에 커다란 와폭이 하나 보이고 길은 고로수 채취용 파이프를 따라 우측 사면으로 나있지만 계곡을 그냥 쳐도 무방하다.

곧 천왕봉골과 나뉘는 두물머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광덕사골은 우측 계곡이다. 가을가뭄이 심한 탓인지 계곡은 거의 바닥을 바짝 기며 흐르고, 듬성듬성 가로막는 바위 위로 가을 낙엽이 수북하다.

광덕사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계곡을 좌측으로 두고 산죽사이로 이어진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우측으로 거대한 바위벽이 보인다. 첫 번째 암자터라 했던 곳인데 건물이 앉을만한 공간은 보이지 않고 커다란 바위들이 질서 없이 그대로 널브러져 있다.

두 번째 기도터는 그곳에서 불과 100여미터, 비로소 공간 갖춘 터를 처음 만나는 곳이다. 커다란 벽 아래 칸을 나누듯이 가림벽이 하나 놓여있고, 그 양쪽엔 사람 손길이 미친 석축이 쌓여있다. 샘에서는 아직 가느다란 물줄기가 흐르고 이미 가치를 잃어버린 기도객의 세간살림이 숲 주변에 드문드문 보인다.

광덕사지까지는 최근 많은 사람들의 행보 탓인 듯 가지런한 오름길을 따라 잠깐이면 닿을 수 있다. 기운자체가 아래 두 곳과는 확연히 다르고, 특히나 터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넓게 닦여 있다. 게다가 바위는 오버행을 이루어 천혜의 기도처를 만들고, 남향인 탓에 습한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기회만 된다면 이런 곳에서 하루를 유하며 그 기운을 받아 보고도 싶지만 우리 같은 속인들에겐 그저 평범한 욕심일 뿐이다.

다만 이곳이 기록에 있는 천불암이냐, 구전되어오는 광덕사지냐의 관계는 차후 밝혀질 일이지만, 천불암과 암법주굴의 관계는 기록으로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을 듯 싶다.

이륙의 지리산기에서는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천불암과 법계사가 있고,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가면 작은 굴이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를 임했고 서쪽으로는 천왕봉을 등지고 있어 매우 맑은 운치가 있는데 암법주 굴이라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지리산 기록 중 유일하게 장소와 이름이 명시된 기록이다.

그리고 또 하나 김일손의 속두류록에서는 법계사에서 “잠깐 쉬고 곧 올라가니 바위가 있는데 배 같기도 하고 문 같기도 하다. 그 바위를 거쳐 지나가는데 길은 꼬불꼬불 돌기도하고 꺾여지기도 하였으며, 골짜기는 휑뎅그렁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알 듯 모를 듯 주변 형태만이 기록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보면 암법주굴과 천불암은 분명 따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광덕사지와 천불암과의 관계가 모호하다. 최근 자료에 보면 광덕사지를 암법주굴로 예기하는 이도 있지만 이는 ‘사寺’나 ‘굴窟’이라는 어원상으로도 아닌 듯하다. 그러면서도 기록에 없는 암자가 아직도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면 존재의 근거 또한 확실한 셈이다.

짐작컨대 암법주굴은 절이라기보다는 법계사와 관련된 선승의 수도처이거나 아님 토테미즘과 융합된 기도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최근 이륙의 지리산기를 근거로 수차례 답사를 한 끝에 제시된 광덕사와 천불암의 동일지설과 그 위치 상부에 있는 굴형태의 오버행바위 위치가 암법주굴이라는 추론이 상당한 근거를 제시하며 힘을 얻고 있기는 하지만 고증의 문제는 아직 풀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혹 모를 일이다. 한때 3백여 개의 암자가 있었다는 이 너른 지리산에 암자 터 하나 지을 곳이란 수도 없이 많았을 터, 우리 같은 속인이 범접하지 못할 어느 산기슭 모퉁이에 또 하나의 암자터가 옴팡지게 들어앉자 잃어버린 세월을 덮고 있을지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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