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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행기>지리산산행기

2005.08.02 15:51

작지 않은 작은새골

조회 수 2165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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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 않은 작은새골


작다와 크다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것은 인간의 기본 심성에서 오는 차이 아닌가 한다. 그건 마치 반잔 남은 술잔이 ‘반 잔이나 남았네’와 ‘반 밖에 남지 않았네‘의 차이처럼 본인의 사상적 발로에서 표출되는 인식의 차이인 것이다.

이 계곡 주변에서 작고 큼, 넓고 좁음, 길고 짧음, 높고 낮음의 관계는 수식어에 불과하다. 굳이 과학의 잣대로 들이대어 계량이라도 한다면 모를까 그럴 필요도, 그럴 이유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새’라는 의미는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새鳥’가 아니라 ‘사이’라는 뜻의 고어이다. 백무동을 이루는 계곡은 크게 네 개인데 동쪽으로부터 하동바위능선과 연하북능 사이가 한신지곡, 연하북능과 바른재(또는 한신능) 사이가 한신주곡, 바른재능과 곧은재능 사이가 큰새골, 곧은재와 오공능선(또는 곰달로능선) 사이가 작은새골이다. 모두다 능선과 능선 사이에 이루어진 골짜기지만 크게 한신과 새골로 양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개 같은 류의 이름을 붙일 때는 뿌리가 있고 그와 함께하는 가지를 나누는 것이 통설이다. 이를테면 새골이라는 본류에 작은새골과 큰새골이 나뉘고, 한신골이라는 본류에 한신주곡과 한신지곡이 나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골짜기의 뿌리라할 만한 본류는 사실상 미미하다. 따라서 제일 하류의 백무동계곡을 뿌리로하여 상류로 올라오면서 가지를 틀었다는 게 가장 어울리고, 그렇게 본다면 전체적인 균형의 중심은 한신주곡이 아닐까 한다. 평면상의 불균형은 느껴질지 몰라도 천왕봉이 있는 한신쪽이 더 무게중심이 실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새골에 작고 큼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 그렇게 붙여진 이름대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마치 숫자 ‘1’을 ‘하나’로 하자고 약속했을 뿐이지 애초에 ‘1’을 ‘둘’이라고 쓰자고 약속했으면 둘로 부르면 그만인 것이다.

그것은 어찌보면 동양적인 사고와 서양식 사고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것이 정신문명과 과학의 차이요, 혜안과 현미경의 차이요, 느낌과 사실의 차이이다.


새골을 오르는 길은 백무동에서 한신주곡을 약 20여분 오르다 우측 본류를 건너야 한다. 첫 번째가 작은샛골이요 약 5분여를 더 오르면 큰샛골이다.

지리산 숨은 계곡이 그렇듯이 첫 골짜기를 들어서는 느낌부터 원시미가 가득하지만 이 곳 만큼은 좀 특별하다. 시작의 초입에서 가장 아름답고 큰 폭포를 만나기 때문이다. 보통의 골짜기에서 사람의 감동을 불러일으킬 만한 명소는 그 명성을 포장이라도 하듯 안쪽 깊숙이 간직하여 어느 시점에 클아이막스처럼 나타나는게 정석이나 이곳은 초입부터 범상치 않음을 일러준다.


사람이 찾지 않는 골짜기에서 이런 폭포를 만나면 어느 곳보다 더 싱그럽다


두려움을 느꼈을 양이면 애초부터 들지도 않았겠지만 발길이 자꾸만 멈춰지는 것은 어느 한 철 모든 시름을 툴툴 털어버리고, 원래의 모습으로 나를 돌려놓은 채 탁족이나 즐기며 몇 일 푹 쉬었다 갔으면 하는 마음이 함지박으로 쏟아지는 물줄기만큼이나 강열하다.

처음 얼마간은 그런 폭포의 연속 길을 걷게 된다. 당연히 길다운 길은 보이지 않고, 다리달린 짐승이 올랐던 어느 느낌을 쫒아 가는 게 훨씬 편하다.

그런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앞이 환하게 터진다. 이 계곡의 특징은 바로 이것이다. 마치 호리병을 거꾸로 놓은 것처럼 주둥이는 좁고 몸통이 넓어 이런 현상을 처음 접하는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계곡속의 넓은 터가 있다하여 어느 한때 평전막골이라 불렀다하나 ‘평전平田’이란 표기가 일본식 표기법이니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다. 세석평전 역시 같은 의미로 원명은 잔돌평원이다.

이 부근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널부러져 있고, 계곡 양편엔 아직도 사태가 마무리되지 않은 지역이 있어 어수선한 느낌을 준다. 다만 바위의 색깔이 먹물을 뿌려 놓은 듯 검은색을 띄고 있어 의아심을 자아내게 한다. 어떤이는 한국동란에 폭격으로 그을린 자욱이라 하고, 어떤이는 광물의 산화흔적이라고도 말하지만 후자가 맞을 듯 보인다. 왜냐하면 바위들의 생태가 사태가 일어나면서 계곡으로 쓸려 내려왔으니 태양빛을 받은 역사가 길지 않음이 그 첫 번째요, 그 분포 또한 상당히 넓게 포진되어 있어 그 포격 양이 짐작되지 않을 뿐 아니라, 폭격으로 인한 그을름이라 하면 이미 50여년의 세월이 흘러 지리의 생명력이면 충분이 치유가 되고 남음직하기 때문이다.
온돌까지 놓여진 심마니 모덤 터를 지나 얼마를 오르면 다시 계곡은 본 모습을 되찾고, 소란 피우는 아이들 같은 와폭들을 하나 둘씩 만나게 된다.


비록 낮게 누워 있지만 그 시원함은 소란스럽게 치장한 여느 폭포에 비길 바가 못된다


계곡이 점점 그 규모가 좁아지면서 제법 위험스런 지점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오늘같이 화창한 날에는 그리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어느 비탈면 한쪽을 힘겹게 오르면 사면과 접하여 파르티잔 터가 보이고 테를 둘렀던 둘레석 안쪽엔 이미 장정 허벅지 굵기의 나무 두어 그루가 하늘로 치솟아 있다. 승자도 패자도 없었던 그 지긋지긋한 전쟁을 저 나무는 알고 있었다는 듯 묵묵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마지막이다 싶은 와폭을 하나 올라서면 물줄기가 급격히 약해지고 멀리 하늘금이 보인다. 실같은 계곡을 우측에 두고 듬성듬성 길이 이어지고, 기름진 토양 위에는 취와 참나물이 지천이다.

예서 주능까지는 불과 20여분, 여느 계곡의 하이라이트처럼 꼭두선 급경사가 아니라 포근함을 느낄만치 완만한 오름길이다. 올라서는 주능은 덕평봉과 칠선봉의 중간정도.


곧은재능선을 찾아 칠선봉으로 나아갔다. 조망이 터지는 정점에 이르러 능선을 확인하였지만 정확한 시작점을 처음부터 밟아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 한 듯 보여 너른 등줄기 한곳을 택해 능선을 밟았다.

그러나 그것은 곧 만용임을 알았다. 지리의 작은 줄기라 하더라도 인적이 끊긴 곳을 여느 산처럼 판단해서 내려선다는 자체가 실수였다. 불과 5분여 만에 인적은 사라지고, 원시림과 너덜강이 뒤섞인 어느 한 사면을 내려섰다. 조망이 조금이라도 터지는 곳이면 양 안의 오공능선과 바른재능선을 확인하며 수정을 하였지만 좀처럼 인적은 확인할 수 없었다.

어줍잖은 느낌으로 세 번의 수정과 횡단을 하였지만 길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불안정한 사면과 갑자기 나타나는 절벽, 제멋대로 쓰러져 길을 방해하는 고사목과 함정을 덮어놓은 듯 두터운 이끼와 낙엽을 쓰고 있는 너덜강 속에서 헤매기를 1시간 반, 문득 마음을 다스려 지리의 여신에게 잘못되었음을 아뢰고는 가장 가까운 계곡으로 차고 내려갔다.

내 오랜 습관을 털어내듯 이물질을 털어내며 찾아든 계곡, 그런데 이곳이 어디란 말인가?

분명 오전에 올라왔던 골짜기였어야 하는데 기억나는 게 없다. 다행이 이른 시간에 시작하여 시간이 지천이었으니 목적지에 내려섬까지야 이상이 없겠지만 내 머릿속의 답답함은 손바닥만큼의 정보도 끄집어내지 못하였다.

와폭위로 올라앉자 늦은 점심을 들으면서도 혼란은 여전했다.

이곳이 지금 오전에 오른 곳이 맞긴 한 것인가? 아직 지계곡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인가? 이 산속에서 내 존재는 어느 만큼인가?, 어느 한 계절이라도 내 사고가 알아낼 수 있는 범위는 얼마 만큼인가?

어느 결엔가 하늘은 태양을 가리고 구름을 모으고 있었다. 여유를 즐기며 마무리를 생각해야 할 상황에 마음만 심란해져 나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즐겨야할 여유 공간엔 심각함만이 가득하여 동행자의 눈을 속이며 하산을 시작한지 1시간여, 심마니 모덤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에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그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천둥과 번개가 하늘을 울리더니 우박이 쏟아졌다. 빈철이를 데리고 장난을 치듯 콩알만한 얼음덩이로 온 몸을 마구 두둘겨 댔다. 황급히 배낭카바를 덮어 쓰고 오버트라우저를 입었지만 그것은 마치 양동이를 뒤집어 쓴 머리통에 개구쟁이들의 장난질을 속절없이 당하는 기분이어서 정신이 멍한 상태로 하산을 재촉했다.

처음과 같은 자리, 그 폭포 앞을 돌아 나와 한숨을 돌리니 어디선지 모르게 푸하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움찔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비는 이미 그쳐있고 아침과 같은 그 모양의 그 폭포가 무심히 물을 쏟으며 나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넌 멀었다. 넌 아직 한참 멀었다라는 표정으로......


- 구름모자 -

  • ?
    김상진 2005.08.05 00:13
    잘보고 갑니다...마지막까지 잘 가셨으면 한번 님의 뒤를 따라가보려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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