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지리산

산행기>지리산산행기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비탄과 고통의 벽은 허물어질 수 없는가?(오봉리)


엄천교를 건너 동강리 평촌마을을 빠져나오면 자혜리 상촌마을 앞에서 엄천강과 합류하는 방곡천을 만나게 된다. 예서 방곡마을까지는 번듯한 2차선 포장도로 이지만 길은 왠지 모를 무거운 정적이 흐른다. 그 이유는 방곡마을입구에 조성되어있는「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에 이르러서야 풀린다.

이 추모공원은 거창양민학살사건과 함께 지리산언저리에서 일어난 민족상잔의 비극 중 가장 아픈 역사의 흔적을 새겨놓은 곳이다.



[산청 함양사건추모공원의 일주문인 회양문, 양지에서 만나자는 상생의 의미가 있는 문이다]



산청· 함양사건 희생자 유족회가 편찬한「산청, 함양사건의 전말과 명예회복」에 기록된 사건의 전말을 추략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6.25발발후 유엔군의 참전과 중공군의 개입으로 삼팔선을 중심으로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되던 다음해 겨울, 남한에 고립되어 후방 교란작전을 펴고 있던 파르티잔 잔당들의 소탕이 시작되는데 그 임무를 맡은 부대가 육군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이었다. 명령을 하달 받은 제11사단 9연대(연대장 오익경) 3대대(대대장 한동석)가 2개 중대를 이끌고 들어와 1951년 2월7일(음 1워2일) 산청군 금서면, 함양군 휴천면과 유림면 일원 9개 마을에서 705명의 양민을 학살한다.

학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틀 후 거창군 신원면에서도 719명이 학살되는 등 총 1424명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는 당시 사단장이었던 최덕신의 지시에 의한 ‘견벽청야堅壁淸野’라는 작전이었다. '견벽청야'란 중국군이 즐겨쓰던 작전으로 중국군 장교출신이던 최덕신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의미로는 반드시 확보해야 할 전략 거점은 견고한 벽을 쌓듯이 지키고, 부득이 포기해야할 지역은 빈 들판만 넘겨준다는 뜻으로 아군에게 필요한 인력과 물자는 모두 철수시킨 뒤 적이 이용 가능한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 작전이다. 당시 자행되었던 양민학살과 마을을 모두 불태워 없애버린 것도 바로 '빈 들판'을 위한 작전이었던 것이다.


당시를 헤아려보면 기가 막히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먼저 날짜가 음력 정월 초이틀, 즉 설명절 다음날 이른 아침이었다. 조상을 모시고 덕담을 나누며 이웃간 정을 나눠야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학살의 명분 또한 공비에게 협조한 사람들의 발본색원이었지만 색출은 고사하고 영문도 모르고 나온 사람들, 심지어는 어린애를 업고 있는 부녀자까지 무자비한 학살에 확인 사살, 그리고 수류탄투척으로 마무리 하였다니 슬픈 역사로만 치부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잔악한 비극이다. 더군다나 적이 아닌 국군이었다니...

차후 연대장이었던 오익경은 무기징역, 대대장 한동석은 징역10년, 계엄민사부장 김종원은 징역3년형이 처해졌지만 당시 국방부장관(신성모)이나 사단장(최덕신)은 무혐의 처리되었다.

추모공원을 살펴보면 입구에 세워진 일주문 이름은 '회양문廻陽門이다. 시대의 비극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에게 이제는 어두운 과거를 넘어 함께하는 양지, 더불어 사는 지리산으로 나와 회한의 역사를 되돌아보자는 의미이다.

이 문을 통과하면 좌측에 명예를 회복한다는 복예관復譽館이 있고, 전면 계단을 오르면 거대한 탑이 나타나는데 바로 원혼소생상寃魂甦生像이란 위령탑이 희생자의상, 비탄의벽, 고통의벽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묘역 제일 상단엔 영령들의 위패를 모시는 위패봉안각位牌奉安閣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거대한 추모 사업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들의 원혼은 구천을 떠돌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외양은 갖추어 졌으되 내양은 아직도 정지척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하에 어떤 값어치가 이 억울한 죽음과 비길 수 있단 말인가? 강희근님의 추모시 “흙 파고 씨 뿌린 일 죄가 되는가”라는 의미가 시린 가슴에 와 닿는다.


(계속)


[원혼소생상이란 위령탑, 그러나 원혼의 소생은 당분간 어려울 듯하다.
  좌우로 서있는 조형물은 희생자의탑, 비탄의벽, 통곡의벽 이다.]


  • ?
    산이조아 2006.03.31 14:00
    고인들의 명복을 빔니다.
    최덕신, ***********************(욕)
    얼마나 원통할까요.
  • ?
    2006.03.31 14:17
    늘 지나치던 곳이지만 담엔 들러서 혼령들을 위로하는
    묵념이라도 올려드리고 싶습니다.
  • ?
    섬호정 2006.03.31 19:10
    “흙 파고 씨 뿌린 일 죄가 되는가” 강희근님의 추모시를 읽는 후손은,
    비탄 과 통곡의 벽을 허무는 사명감으로 역사에 희생된 영혼이 상생하는 명복을 빌어야겠지요...
  • ?
    오 해 봉 2006.04.01 11:13
    머리숙여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이제라도 위령탑을 세워드린게 다행입니다,
    그자는 당시 독립운동하던 명문가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독립군도하고 해방후 한국군에서 승승장구하여
    중장까지 달았고 대사와 외무장관까지 하였드랍니다,
    그후 북한에가서 극진한 대우를받고 살다 죽었다는데
    아이러니 한것은 그의묘가 북한 국립묘지에 있다고 합니다.
  • ?
    김용규 2006.04.01 15:54
    산청, 함양 양민 학살 사건에 대해서 그동안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습니다. 유족회에서만 몸부림을 쳤으며, 정부에서는 위령탑만 건립을 한게 전부이지요. 사건이 발생한지 수십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미 해결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당시에 학살 현장에서 구사 일생으로 살아 남은 분이 현재 유족회 회장으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1. No Image notice by 운영자 2002/05/22 by 운영자
    Views 10005 

    지리산 산행기, 느낌글, 답사글을 올려주세요. 0

  2. 봄, 그리고 지리산 8

  3. 잃어버린 30분 - 2 5

  4. 잃어버린 30분 - 1 1

  5. 이곳은 지리산 맞다 2

  6. 잊어버린 길을 따라 잃어버린 마음 찾아 - 마지막 6 file

  7. 잊어버린 길을 따라 잃어버린 마음 찾아 - (3) 1 file

  8. 잊어버린 길을 따라 잃어버린 마음찾아 - (2) 2 file

  9. 잊어버린 길을 따라 잃어버린 마음 찾아 - (1) 2

  10. 비탄과 고통의 벽은 허물어질 수 없는가? - 2 1

  11. 비탄과 고통의 벽은 허물어질 수 없는가? - 1 5

  12. 봄이 오는 길목에서 - 2 (싸리골과 빗기재골) 4

  13. 봄이 오는 길목에서 - 1 (싸리골과 빗기재골) 1

  14. 돌려주고 싶지 않은 이름 선유동 - 3(내원골) 4

  15. 돌려주고 싶지 않은 이름 선유동 - 2(선유동) 1

  16. 돌려주고싶지 않은 이름 선유동 - 1 2

  17. 박달내와 삼신산 - 2 3

  18. 박달내와 삼신산 - 1 1

  19. 역사는 잊혀질 수는 있어도 없어지지는 않는다 - 3 (단천지능) 8

  20. 역사는 잊혀질 수는 있었도 없어지지는 않는다 - 2 (수곡골) 6

  21. 역사는 잊혀질 수는 있어도 없어지지는 않는다 - 1 1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Next
/ 4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