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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잊혀질 수는 있어도 없어지지는 않는다 - 2


수곡골 들머리는 대성마을이다. 대성마을까지는 차량의 종점이자 자연부락인 의신에서 시작해도 되지만, 대성야영장에서 지능선을 잡고 직접 올라도 된다.

아침 일찍 새벽공기를 가르며 산기운을 마시는 일은 그 거친 숨 가쁨에도 힘겨움보다는 상쾌함이 더 느껴진다.

의신 삼거리를 만나 잠시 숨을 들인 후 대성골로 빠르게 나아간다. 어차피 오늘 같은 산행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아니라면 사람을 만난다는 자체가 불편한 관계인지라 서둘러 수곡골 입구를 찾아 나서는 일이 먼저이다.

대성마을 민가를 만나기 바로 전 낮은 곳에서 대성골 본류로 내려서 계곡을 건너니 산비탈을 넘나들던 흔적이 보인다. 수곡골은 바로 그 건너에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더니 우리의 방문을 알기라도 했다는 듯  바람을 일으켜 나뭇가지를 흔든다. 이리로 오라는 듯...  

입구를 들어서면 폐사된 표고목이 보이고, 조그만 폭포 위쪽을 지나 계곡을 건너면 길다운 길이 제법 또렷하다. 이후 이 길은 양진암을 만나기 전까지 계곡을 한번도 건너지 않고 좌측 산비탈을 걷는다.

수곡폭포를 만나는 건 불과 5분여, 너른 반석 위를 흘러내리는 위용이 느껴지기는 하나 오늘 같이 겨울가뭄이 심한 날은 그저 폭포임을 알리는 처연한 물소리만이 벽을 타고 흐를 뿐이다.

인적은 뚜렷하나 두터운 낙엽이 덮고 있는 산길은 가끔씩 발걸음을 미끄러뜨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적막함 속에 그런 장난이라도 없으면 쓸데없는 고독이 밀려오기 딱 좋은 날이다. 계곡도, 산도, 바람도, 하늘도 모두 조용하니 속절없는 사람이 괜한 호기심으로 들어와 눌러 살기에는 그 적요를 이길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가끔씩 산은 이런 식이다. 언제든 하나 가득 풍요를 주기도하고, 한 없이 너른 가슴으로 안아주기도 하지만 때론 앙탈을 부리며 저 위 바위보다도 더 큰 고독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래서 산은 늘 같은 모습이면서도 매일 다르다.

어차피 고독은 내겐 극복해야할 대상이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그 지독한 고독과 싸워왔던가? 사람이 있건 없건, 산에 들건 들지 않건, 젊은 날 그 고독은 언제나 내 주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때론 방황하고, 사람을 멀리하고, 이 세상 모든 짊을 짊어진 사람처럼 처진 어깨로 살아온 날들이 있었다. 지금도 그 짊을 다 내려놓은 건 아니지만, 내 삶이 나답기 위해서는 결단코 풀어내야할, 아니 이겨내야만 하는 존재가 고독이다.

낙엽을 일러내는 바람소리에 마음을 맡긴다. 깊은 낙엽이 발목을 붙들고, 발길에 부러지는 부목腐木이 괴성을 질러도 머릿속 가득한 긴장감과 뒤섞여 일렁이는 신선한 기운만은 놓치지 않으려 애를 쓴다.

계곡은 오밀조밀하다. 때론 반석위로 아담하게 소를 만들며 흐르기도 하고, 때론 크고 작은 바위들이 뒤엉켜 깊은 산중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인적이 완연한 너른 분지를 만난다. 적요만이 가득한 묵정밭은 이미 사람 손길 준지가 오래이고, 비탈을 애두른 철망이 방목하는 염소들의 보금자리임을 짐작케 한다. 계곡의 모양새와 마찬가지로 길은 평이하게 이어지지만, 때론 제법 험한 비탈을 비켜가기도 한다.

양진암.
사실 이 곳은 이 골짜기에 유일하게 사람이 기거하고 있는 곳인지라 오르기 전부터도 궁금하긴 하였지만 지리산 수행처가 그렇듯 어느 산비탈 양지쪽 깎아지른 절벽 아래 아슬아슬 걸려있을 암자의 모습을 상상하며 조심조심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계곡 쪽으로 거대한 바위가 보이고, 주변을 상당히 정교하게 쌓아올린 석축이 보인다. 조심스레 다가가 안쪽을 살펴보니 짙은 숲으로 쩔어 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모퉁이를 돌아 가지런한 산길을 올라서자 홀연히 붉은 지붕의 건물 하나가 나타난다. 양진암이었다. 조금 전 생각과는 전혀 다른...

산을 오르면서 매 번 느끼는 것이지만 내 틀 안의 고정관념은 언제나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저 산은 그대로인데 미리 내 짐작에 맞추어 그곳을 그려내고 있었으니 어느 순간 나타난 모습에 적응이 되지 않아 내가 더 황당해지는 우를 범하기도 하는 것이다.

골짜기 한가운데, 그것도 이 계곡 가장 거대한 바위 위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완벽한 조화를 이룬 암자가 있었다. 마치 숙련된 예공이 만들어놓은 미니어처를 인위적으로 옮겨 놓은 듯한 모습이다. 아련한 골짜기가 가지런한 능선사이를 줄달음쳐 내려가고, 하늘금엔 주능선이 뚜렷하다.

뒷면은 낙남정맥의 삼신주능이 남해로 흐르고, 좌측엔 인간이 범접하지도 못할 듯한 바위능선이 한가롭게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글쎄 이런 곳이라면 우리 같은 범인이 보기에도 굳이 수행이라는 목적을 가지지 않아도 풀리지 않는 화두에 괴로워하지는 않을 것 같다. 들어 있는 자체가 수양이요. 모여 있는 기운이 번뇌를 싯어주니 안거의 의미가 필요 있을까?

산길은 암자 뒤를 돌아 우측으로 이어진다. 곧 길이 갈리지만 계곡보다는 멀리 보이는 우측 지능을 찬다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나아가게 된다. 조릿대 숲을 가로질러 작은 지류를 건너면 더덜지대가 혼재된 길을 걷는다.

너덜속의 물소리가 사람이 다니는 곳이 아니라는 듯 키득거리고, 바위지대가 보이면서 경사가 급해진다. 그러나 남부능이 해발 1,200이니 오름길도 그리 길지는 않다. 고빗사위와 같은 경사를 갈지자로 올라서면 산죽이 무성한 단천지능 삼거리를 만난다.

삼거리 바위 위를 올라 조망을 살펴보니 주능선이 광활하다.

노고단을 시작으로 반야봉이 근엄하고, 화개재를 내달으면 토끼봉이 귀를 쫑긋 세운다.

신선들의 놀이터 명선봉이 햇살을 읽고, 다정스런 형제봉 모퉁이를 돌아나가면 벽소령산장이 앙칼스럽게 들어차 있다.

덕스러운 덕평봉이 포근하게 앉자있고, 일곱신선 칠선봉은 겨루는 듯 날카롭다.

신령스런 영신봉이 기운을 모으면 건너편 촛대봉이 불 밝히듯 기운차고, 그 가운데 말안장 같은 세석이 옹골차게 들어차 있다.

아쉬운 것은 시샘하듯 남부능선이 커튼을 드리워 그 뒷모습은 가리워져 있고 지리의 왕주 천왕봉이 살짝 머리를 내밀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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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증 2006.01.05 19:31
    좋은데 갔다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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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들마을 2006.01.09 10:14
    혹 댓글이 무심하여 구름모자님의 좋은 식견을 뵐 수 없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무심코 듭니다. 물론 그러시지는 않겠지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 ?
    구름모자 2006.01.09 13:20
    본인증님, 좋은 곳입니다. 한 번 다녀오십시요

    버들마을님, 다른분들의 글에 비하여 제 글이 지루하고 재미 없는 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글 쓰는 것을 놓지 않는 한 이 홈에는 계속 머무를 예정입니다.
    하해님과의 약속도 있지만 이 곳엔 지리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계시기 때문이죠
  • ?
    섬호정 2006.01.25 18:49
    구름모자님의 글에서 고향이여기를 더 자세히 알게되어 더욱
    고맙습니다 화게동천, 의신 골짝...드나들어도 더 깊은 내력에
    새삼 반가운 지식입니다.
    하동송림에서도 유익하게 읽도록~ 옮겨도 될런지요?
    Annapolis에서 하동송림지기 합장
  • ?
    섬호정 2006.01.25 18:52
    님의 글, ~말안장 같은 세석이 옹골차게 들앉은~
    그 평전이 못내 그립기만 합니다
    Annapolis 에서....
  • ?
    구름모자 2006.01.31 11:12
    섬호정님 1.25~30까지 훈련산행이 있어서 답글이 늦었습니다
    제 글을 하동송림까지 옮겨 주신다니 저로선 영광이지요
    부족하지 않도록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1. No Image notice by 운영자 2002/05/22 by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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