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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사랑방>삶의추억

2005.02.02 13:36

설악에 얽힌 추억

조회 수 1766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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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여름 - 친구 2명과 설악에 가기로 했는데, 이 녀석들 굳이 여자를 하나씩 데리고 가잔다. 난 같이 갈 여자가 없으니 반대했지만 중과부적이라 어쩔 수 없이 지고 말았다.
각자의 준비물을 할당하면서 아무리 여름이라도 산 속에서는 무척 춥다는 걸 강조하며, 여자들도 자기가 덮을 담요 2장씩은 꼭 가지고 오라고 했다.
아침 일찍 서울을 떠난 버스는 점심 때가 지나 용대리에 도착했고 이어서 왁작지껄 수다 속에 백담사를 지나 계곡 옆 풀밭에 텐트 2개를 나란히 쳤다.

** 이때의 모습을 담은 마땅한 사진이 없어 글로 대신 설명합니다.
ㅇ 배낭 - 한 겹의 데님 천으로 만든 원통형 자루, 양 옆에 커다란 포켓이 달린 키슬링 타입. 양 옆의 포켓에는  휘발유(버너용 연료)통, 소주 1.8리터 유리병(통칭 막소주 됫병), 손도끼(방범용), 텐트 폴대 등을 넣는다. 패킹은 맨 밑에 텐트나 담요를 넣고 등받침 부분에 옷가지를 수직으로 세워 넣은 다음, 나머지 공간에 취사도구와 먹거리들을 넣는다.(꺼내 쓰는 순서를 고려하고, 프레임이 없어서 등이 배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
ㅇ 텐트 - 군용(軍用) "A텐트". 2인용. 일단 무지 무겁다. 바닥이 없으므로 판초 우의를 깔면 그 틈 사이로 바람과 물의 출입이 자유롭다.
ㅇ 담요 - 국방색 군용 담요. 역시 무겁다.

***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취침시간. 당연히 텐트 하나는 여자용, 다른 하나는 남자용(3명)이다. 그런데, 배낭을 풀어 보니 이 여자들 담요라고 가져온 게 가슴에서 발끝 정도에 이르는 타월- 그것도 한 장씩이다. 아니, 산에 간다고 했지 누가 해수욕장에 간다고 했나? 40리터쯤 되는 배낭엔 몽땅 옷가지(여름용)와 엄청난 양의 화장품만이 들어있었다.(이후로 나는 산에 화장품 갖고 오는 여자를 무지하게 싫어한다)
할 수 없이 남자들이 가져온 담요 6장을 각기 3장씩 나누어 한 장은 깔고 두 장은 덮고 자기로 했다. 피로에 약간의 술기운이 겹쳐서 쉽게 잠은 들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은 듯 한데 온몸이 싸늘하다는 느낌이 들면서 잠이 깨었다. 분명히 배를 덮고 있어야 할 담요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 놈들이 추우니까 담요를 둘둘 말고 돌아 누웠겠지.'
옆 자리를 더듬어 봤으나 어느 쪽에도 담요는 없다.
'아차, 말로만 듣던 텐트 도둑이 왔다 간 모양이구나!'
나는 일단 도끼를 찾아 들고 나머지 녀석들을 깨웠다. 후다닥 텐트 밖으로 튀어나온 나는 다른 물건들이 없어진 건 없는지 후렛쉬로 재빠르게 살펴보고는 얘기했다.
"야, 텐트하고 다른 건 다 있는 거 같은데, 담요만 없어졌다. 여자들 텐트는 어떤지 물어 봐라."
아직도 잠이 덜 깬 한 녀석(예의 그 청량산에 같이 갔던 녀석이다) 왈,
"으응, 그거? 아까 여자들이 춥다고 그래서 내가 줬다."
아, 이럴 수가! 이 녀석은 여자 때문에 친구를 팔아먹는 놈이로구나! 이런 배신감은 일찍이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추워서 잠은 더 이상 잘 수가 없고 동이 틀 때까지 우리 둘은 배신자를 절반쯤 죽여놨다.

***
봉정암에서 이틀째를 따뜻하게 보낸 다음 우리는 대청봉을 지나 천불동계곡으로 하산하고 있었다.
천당폭포라는 곳에서 사진을 찍고서는 "찍사"인 그 친구(배신자)가 카메라 삼각대를 거두어 챙기느라 조금 지체하는 사이에 우리는 무심코 앞서 나갔다. 그 지점은 암벽에 인공으로 다리처럼 안전시설물을 만들어 붙인 곳이라 좁아서 사진 찍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멈춰 서도록 양해를 구해야 했기 때문에 일행이라고 기다렸다가 뭉쳐서 갈 수가 없었다.
다리를 벗어나 한참 갔는데도 이 "찍사"가 오질 않길래 우리는 기다리기 지루해서 계속 가다가 노점상 같은 데에서 한 잔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
30분 이상은 족히 지나서 나타난 녀석의 얼굴은 어제 새벽에 담요 때문에 분노했던 내 얼굴보다 아마도 열 배는 더 치를 떨고 있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 당시 세상에 존재하던 욕이란 욕은 몽땅 등장했던 것 같다. 침을 튀겨가며 뱉어놓는 얘기를 정리해 보니까 카메라를 정리하면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비켜주다가 난간 너머 계곡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하필이면 천당폭포에서!) 높이도 꽤 됐는데 배낭이 원체 무거워서 그랬는지 착지하는 순간 배낭이 먼저 닿아서 다행히도 몸에는 그다지 큰 충격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천당으로 갈 뻔 했는데 네 놈들은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냐? 이 죽일 놈들아!"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여자 때문에 친구 담요를 훔쳐 간 놈하고 친구 떨어져 죽을 뻔 했는데 히히덕거리며 술 마신 놈하고 누가 더 나쁜 놈인가 하는 문제로 핏대를 세웠다.
30년이 지난 요즘에도 가끔 이 얘기를 하면서 서로 네가 더 나쁜 놈이라고 싸우곤 하는데, 그 친구의 부인이 그 때의 여자가 아니라는 점은 내가 그 친구에게 큰소리칠 수 있는 아주 좋은 무기가 되고 있다.


     <그 당시의 봉정암과 일행들>


     <최근의 봉정암 전경(한상철님 사진)>
  • ?
    부도옹 2005.02.02 20:42
    항상 왼편에 서서(바라볼 때) 사진에 찍히십니다. ^^
    함께 간 여성들이 미인이시라
    담요를 건네 준 친구의 마음을 이해합니다만
    담요는 곧 자일과 같을진데.... ^^*
  • ?
    섬호정 2005.02.04 17:36
    친구와 핏대올린 상황? 재미있고 궁금...
    오브넷의 도덕선생님, 김수훈님께선
    어찌 결론내리셨는지요??? 하~
  • ?
    오 해 봉 2005.02.05 00:56
    참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 이네요,
    천당폭포에서 떨어졌는데도 자기발로 걸어왔다니 그양반은
    천당에 다녀왔네요,
    그당시 봉정암사진 보물이네요,
    지금 봉정암은 저사진에 안보이는 건물이 몇동더있고 계속 공사를
    하고 있답니다.
  • ?
    김현거사 2005.02.08 20:40
    판정=담요 빌려준 자가 잘못임.여자에게 담요 빌려주면서 제 혼자 엉큼하게 인심 쓴 것.동료에게 상의 안한 것.
    판정=술 마신 것은 전혀 잘못 없음.천당폭포에 떨어질 것을 사전에 전혀 안 것이 아니므로.
  • ?
    박용희 2005.03.13 07:43
    ^^
    김현거사님 말씀에 동감입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김선생님의 유머스러움이 가득하네요.
    30년이 지난 지금도 티격태격(표현이 좀 거시기 하지만^^)
    싸우시는 모습에 진한 우정이 느껴져 또한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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