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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사랑방>삶의추억

2005.01.17 21:39

청량산의 추억

조회 수 1931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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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에 박용희님 한테서 청량산 사진을 선물받고 나니 불현듯 예전에 청량산을 찾았던 일이 생각납니다.

1969년인가, 70년이던가? 겨울방학이었는데, 친구와 고등학생인 내 동생- 셋이서 겨울여행을 떠났다.
영주 부석사를 거쳐서 청량산의 들머리 봉화군 남면(南面)인가 하는 곳에서 버스를 내린 시각이 오후 5시경.
하루종일 내린 눈이 온 세상을 덮었고, 짧은 겨울 해는 어느새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어서 우리는 어디서 하룻밤을 신세질까(물론 공짜로) 하고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웬 아주머니 두 분이 아주 낭패인 듯한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저기 산(청량산) 속에 있는 절(청량사)에 가야 하는데 길은 미끄럽고 짐이 무거워서 큰일났네."
"아주머니들, 길은 잘 아시나요? 거기 가면 잠도 재워 주나요?"
"그럼, 우리가 그 절 신자들인데."
"그러면 우리가 그 짐을 들어드릴 테니까(젊으니까 힘 밖에 없다), 앞장 서서 길만 안내하세요."
그래서 우리 다섯 사람은 종아리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에 첫발자국을 찍으며 산으로 접어들었다.
복장은 청바지에 일반 점퍼를 입었고, 신발은 군화 아니면 통일화(군화처럼 생겼는데, 헝겊으로 만들어서 쉽게 젖고 어렵게 마른다)에 겨울산행의 장비라고는 오로지 군용 후렛쉬("ㄱ"자 타입) 하나가 전부이고, 아이젠이나 스패츠 같은 건 이름도 못 들어본 상황이었다.
날은 금방 어두워지고, 하늘엔 별이 초롱초롱한 속에 바람은 점차 매섭게 몰아쳤다.
절까지의 소요시간은 아마도 2시간 정도였을 텐데, 춥고 신발이 다 젖어 발도 시려 오는데 아주머니들은 다 왔다는 소리를 안 한다. 얼마나 남았느냐고 물어 보니 길을 잃었단다. 눈이 많이 와서 사람 다닌 흔적을 못 찾는 데다가 주위 사물이 달라 보이는 때문이었다.
지도? 나침반? 당연히 그런 건 없었다. 그냥 나무들 사이로 공간이 넓고 평탄한 것 같은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바람소리, 이름 모를 짐승소리.
추위와 배고픔과 지친 다리도 문제지만, 이제는 서서히 겁이 나기 시작하는 게 더욱 큰 문제였다.
이러다가 여기서 얼어죽는 건 아닌가? 이 아주머니들- 혹시 구미호 아냐?
4시간이 지나고 5시간이 지나자, 말은 안 했지만 우리들 머리 속에는 모두 "조난"이라는 단어들을 떠올리고 있었다.(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는 절과 계곡과의 중간 쯤으로 같은 구간을 계속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돌고 있었다)
자정 무렵이 되어서 드디어 공제선(하늘과 산 능선과의 경계선) 부근에서 절집의 등불로 추정되는 불빛을 하나 발견했다. 불빛은 워낙 희미해서 그 크기나 거리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겠다. 모두들 입을 모아 "여보세요-" 하고 소리쳤지만 바람소리에 묻혀 못 들었는지 어쩐지 아무 반응이 없다.
등불이 아니고 별빛이었나? 아무도 자신있게 얘기하는 사람이 없다.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다. 더 이상 걸을 기운도 없고, 무엇보다도 눈에 젖은 신발은 곧 동상에 걸릴 것이라고 경고를 주고 있었다.
저 불빛에 희망을 걸고 마지막 도박이다.
주변에서 가랑잎이 몇 개 달린 나뭇가지들을 눈 위에 모아 놓고 배낭 속에 있던 휘발유(당시 유행하던 버너는 미군이 2차대전에 이어 6.25 때 쓰던 중고품 휘발유 버너로 화이트 가솔린이 아닌 일반 휘발유도 사용했다) 4리터 정도를 몽땅 쏟아 붓고는 불을 질렀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은 4∼5 미터를 넘게 타오르며 주변을 밝혔고 우리 다섯 명은 동시에 목이 터져라 다시 외쳤다. "여보세요-"
불안한 마음으로 어둠 속을 바라보고 있기를 얼마였던가. 불길이 다 사그라지고 날 즈음에 드디어 그 불빛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등불이었다! 우리의 도박은 성공한 것이었다.
등불을 들고 온 스님의 안내로 절까지 가는 길은 어이없게도 100미터도 채 안 되는 것 같았다.
여신도들을 모시고(?) 간 덕분인지 저녁밥에 담배까지 얻어 피우고 난 뒤의 행복감이라니- 절에서 스님한테 담배 얻어 피운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지옥의 문턱까지 갔다가 뜨끈한 온돌방에서 자고 난 뒤, 아침에 문밖에 나서서 활짝 기지개를 켜는 순간, 눈 앞에 펼쳐져 보이는 설경(雪景)이란, 아-
퇴계는 이 풍광을 무릉도원에 빗대어 이렇게 노래했다.

     청량산 육육봉(六六峯)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날 속이랴마는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물 따라 가지 마라 어부가 알까 하노라.

30년도 더 지난 재작년에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청량산에 요즘은 안내산악회에서도 많이들 가고 그러니 다시 한 번 가보자고.
그래, 겨울이 아니고 초여름이라서 설경은 못 보겠지만 그 산세가 어디 가겠냐 싶어서 안내산악회를 따라서 갔다. 그 때는 엄청난 산골오지였던 동네가 이제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길도 잘 닦여져 있고 찾는 사람도 엄청나게 많았다.
그러나 그 날, 우리는 "청량산 육육봉"은 보지 못했다. 그냥 "도립공원 청량산"을 보았을 뿐이었다.

   <사진 설명>
    그 때 아침에 청량사 스님과 찍은 흑백 사진과 최근에 박용희님이 찍은 칼라 사진
  • ?
    허허바다 2005.01.17 23:10
    ㅎㅎ 그 치떨리던 기억도 시간이란 녀석 즐거운 추억으로 돌려 놓죠..
    에구구... 30년 뒤의 추억찾기... 격세지감이셨겠습니다.
    근데 어느 분이 김수훈님이신가?... 오호
  • ?
    부도옹 2005.01.17 23:18
    ㅎㅎ 스님 우측에 짝대기 짚고 짝다리로 서 계신분이 김수훈님?? ^^*
    이제껏 사진으로 보아왔던 폼으로 보면 맞는데
    설명을 해주지 않으셔서 잘 모르겠습니다. ^^






  • ?
    솔메 2005.01.19 11:08
    대단한 ,
    추억의 한 장면입니다.
  • ?
    섬호정 2005.01.20 12:52
    부도옹님 말대로 작대기짚은 김수훈님!
    그 작대기 시작이 신화처럼 쓰구냥산 정상도 오르신겐가요!!!
    !
    청년시절의 볼이 통통하니?! 구여웁습니다ㅎㅎㅎ
    옛모습이 곧 살아나실테지만~
  • ?
    강미성 2005.08.26 09:02
    그 산사에서 가을이 깊어가면 산사음악회를 하지요.
    뒷산 바위에 비추이는 조명과 노래가 어우러져 멋진 날 된답니다.
    글도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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