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지리산

사랑방>삶의추억

2004.12.31 19:36

옛동산에 올라

조회 수 2050 댓글 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두물머리 해오름

 
친구 찾아 50 년~ 

                 - 도명의 추억장을 뒤진다-
 

새까맣게 잊혀질듯 했던 전장 속 끝 무렵, 폐허의 땅 의정부에서 
학구열에 불타던 어린 모습들이 있었다. 너나없이 손에는 사전이 
들려있고 노 트와 교과서가 가슴에 안겨 있었다. 

심지어 무언가를 잘잘 못해서 교실 바닥에 꿇어 앉았던 무릎앞과 
옆 자리엔 구겨진 책과 노 트, 그들의 애장품 콘사이스가 함께 
꿇어 앉아 벌을 받곤 했다.


 볏짚단으로 둘러친 전장후 최선의 건축재료인 흙벽돌로
 조립된 막사같은 교실엔  120 여명의 남녀학생이  청운의 꿈을 
키우느라 눈빛만이 빛나던 형설의 장이 었었다.
 그들의 대부분 학생들 숙소는 일반 가정이 아니었고, 시가지 
인근의 미군부대 안이 었었다. 운이 좋아 미군 군용트럭에 얻어
타고 등교하는가 하면 3 ,4십리길을 마라토너로 책보따리 옆에 
끼고 달리는 땀 투성이의 낡은 교복들을  등교길에 만나면 괜히 
미안스럽기 까지 했던 몇몇 안되는 편한 아이들 속에 나도 끼어 
있었다.  

 학교 규칙이 엄해서 여학생은 치마를 입을 수 없었고, 화장실도 
교사와 함께 사용했었던것 같다. 그 런 속에서도 음악시간엔 
교과서의 외국 민요와 가곡을 원어로 열창하였고, 자주 군 부대
 위문 행사가 많아  군악대의 후원으로 학교에는 브라스밴드가 
있어 낭만의 캠퍼스 분위기를 만들어도 주었다. 

지뢰가 즐비한 인근 산야로 봄 소풍을 가야 했고 그 조심스런 
 터전 야외 무대에서 교내 작은 음악회는 인기리에 진행되었다. 
아마도 친한 내 짝이던 <이상우>는 '한 떨기 장미꽃'  
나는 '옛동산에 올라"를 열창했던것 같다 .이상우는 전쟁 중에
 어머니를 잃은 4남매의 맞이로 늘 교복엔 아기 콧물이엉켜있어~
짝인 내게 마져 부끄러워 하고 또한 수줍음이 많았다. 
상우와 나는 가장  나이 어린 동급생으로 동갑이었는데~ 
그 후로 가곡 '옛동산에 올라'는 나의 애창곡이 되었고, 
이상우는 쉬운 느낌으로 '한떨기'란 별 명이 붙게 되어 
수줍은 그애가 고역을 치루기도 했다.

둘이서 자주 가게 되는 학교 옆 둥근 연못 안으로 점심시간엔 
들어가서, 점심도시락이 부실했던 우리는 둘이서 그 연못 안의 
소나무 아래에 건너가서 오붓이 점심을 먹으며 가끔은 까르르 
웃기도, 어느때는 상우의 젊은 계모의 서룸주는 집안 이바구
(이야기 )를 들었다.  그때마다 난 언니처럼 그 서러운 상우의 
어깨를 안고 다독일 뿐이었다. 공무원인 아버지를 빼어 닮았던 
이상우는 하얀 얼굴의 곱슬 머리 귀여운 여학생. 

 김래성의 <쌍무지개 뜨는 언덕>이란 청소년 동화가 학원지를 
휩쓸던 시절,부산에서 그 책을 일찌기 읽어왔던 나는 그 이야기를 
읽지 못한 수복지구 (서울 도강 이북 지역) 에서 살아온 상우에게 
한 무더기씩 등하교 길에 이야기를 해주며 함께 이마를 맞대고 
울기도 했다. 
 
감성이 싹트던 사춘기로 들어가며 책속의 이야기에서 대리 만족을 
하기도, 또한 슬픈 주인공이기도 하던 시절 , 가을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2 학기에 들어서 갑자기 교실이 썰렁하니 자리가 비어 
갔다.  이상우가 서울의 수도여중으로 전학을 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후로 서로 재잘거릴 친구가 없어져 말없는 날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음악성이 있고 수판을 잘 두던 상우였는데~ 상우를 따라 나도
 그때 부족했던 수판을 열심히 노력해 곧잘 상우를 따랐었다. 
도시락과 함께 수판은 가방 속에 필수품으로 넣어다녔을 정도로~
빨리 잘 두는 선수들이 되었다. 

상우도 찬혜도 병숙이도 수도로, 무학으로, 영천 여상으로, 
가까운 친구들이 차례로 전학 가고 없는 교실엔 심지어 
회암리의 언년이, 주내면 정숙이, 포천의 순애 , 영어교사 
처제였던 안경잡이 애 까지~ 모두 모두 서울로 떠난 자리~
 오직 남은 두 사람 나와 별내면 김순애뿐이었다.  

 가을 낙엽이 붉게 물드는 도봉산으로 회룡사로 가을 소풍을 
다녀온 것이 마지막 추억이 되었다.지금도 그 때의 사진을보면  
수많은 남학생 맨 앞 줄에 둘이 오롯이 앉아 하얀칼라의 검은 
교복 차림에 손을 서로 꼬옥 잡고 찍은 사진을 보면 가슴이 
서늘해 진다.  그 이후 어찌 되었을고....
 나보다 나이 많았던 순애는 내게 언니처럼 보살펴 주었었다.   
 
그곳에서 나는 많은 애처로운 또래들의 아픔과 서러움과 외로움을 
다독이는 구세주 처럼 그들에게 기대를 모아았었던 것 같다. 
순애 역시 자기 보다 두살 위의 새엄마와 살며  살림을 도맡아야 
했고 교복엔 늘 불 지핀 짚 불 냄새가 흠뻑 배여 있었다. 
난 어쩐지 그 냄새가 참 구수하다 느껴졌었다. 그런 내게 순애는 
정색을 하며 나무라고 ~소리치면서 웃저고리를 벗어 휘이 휘둘러 
먼 발치에 휘리릭 집어 던져 버린다. 
새까만 그 얼굴, 남자애들이 숫돼지라 불러서 학교 오기 싫다고~ 
투정하며 나한테  의지가 되어 학교에 온다며 글썽이던 큰 눈물 
방울이 잊혀지지 않는  친구이다. 서울의 청계천에 있는 큰집 
식당에 가고 싶어도 어린 남동생이 가여워서 함께 고생한다던 친구, .. 

 할머니가 돌아 가시면 동생과 집을 떠날 거라해서 나는 화를 내며 
애써 말리기도 했었던것 같다.  

그 동생 또래의 한 아이가 부산에서 고아로 올라와 미군부대의 
한 장교에게서 보호받으며 1학년으로 제법 편하게 귀족처럼 
지프차로 등교는 하지만, 늘 우물가에서 우리와 만나게 되면 
말을 건넨다.
' 누나도 부산에서 왔다며, 난 和一이야, 文화일~ 부산에서 왔거든'
하며 모자를 푹 눌러~쓰던 그 여려보이고 하얀 얼굴의 화일이를 
들먹이며  만류해 주었었다.고아가 뭐 별거냐구~ 부모와 헤어져 
살면 고아와 다름없다고~ 

내가 고향으로 오게 될지음 셋이서 사진관엘 갔다 우리는 교복에 
화일이는 반 사복차림이다.
사진사가 시키는 대로 즐겁게 찍은 그 사진을 지금도 꺼내어 보면 
가슴이 아리다 . 슬퍼진다 . 
그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  

 훌쩍 나만 혼자 떠나와 버린 그 곳, 추운 새 둥지에서 처럼 
외로히 남아 있었을 그들의 생활이 아련히 서려와 덧없이 이마를 
만져 얼굴을 쓸어내린 적이 수 없었다. 아마 영원히 내 이마에 
그들의 추억이 서려 있을것만 같다.  

 고향으로 가정 사정상 부모님과 귀향하기 까지, 여행 같은 떠남이,
 타향을 벗어나 고향으로 떠난다는 것이, 알지 못한 성취감에 나는 
들 떠 있었지만 홀로 남는 친구 김순애는 며칠을 울면서 눈이 부어서 
등교 했고 화일이도 미군 아빠 따라 미국에 가겠다고 울먹이던 말이 
가슴에 쿵 하니 울리었다. 

고향에서 상급학교를 다니며 가끔씩 편지를 주고 받던 친구들이 언제 
부터인가 하나 둘씩 소식이 끊어져 버렸다. 의정부에서도, 서울에서도,  
그 후로 가슴엔 늘 멍든 것처럼 추억의 아린 앙금이 마음 속에 가라
앉은 채로 나의 학창 시절도 젊음도 지나갔지만, 결혼 이후 의정부에 
자원하여  그 곳 학교에서 근무하며 김순애를 찾아 ~ 의정부 시가지와  
별로 멀지 않은 별내면으로 무작정 찾아갔지만 누구도 그들을 기억해 
주지도 않았다. 

허탈하게 보내던 어느 해,  더운 여름날,  동두천을 가던 길에 '주내면 
삼거리에서  사이다를 사러 들린 가게에서 이정숙이를 만났었다.
 공부 벌레처럼 책만 끼고 다니던 그가 시골에서 결혼 하여서 구멍가게 
주인으로 살고 있었다.  자기네 친정 집이란다.... 

 누구는 어느 대학을  갔고 ,누구는 결혼하여 어찌 살고..듣기엔 대강 
삼십대 초반을 잘 들 지내고 있는듯 했다. 그래도 내가 궁금하던 
외로웠던 친구들 소식은 만나질 못하고 아쉽게 헤어졌다.  
그 당시 가까이 살고 있는 친구는 오직'주내 삼거리'의 정숙이 뿐이었다.
 
그렇게 한 세월이 흘러 50년이 지난 어느날,  

 여의도 국회의원 회관에 일이 있어 들린 김에 그 당시 정치권으로 
지상에서와 TV 세미나 지상파로 얼굴도 대강 기억이 나고 이름도 
기억나는 국회의원실로 찾아갔다. 그는 학창시절 당시 추월을 불허한 
실력파로 학급반장을 했으니 졸업당시의 기억을 해 주리라 여겼다.  
찾아간 그날은 마침 그 학교  동창회에 가고 없어서 비서진에게 
연락처를 남기고 왔다. 

뒷날, 곧 바로 오랜 낯익은 목소리로 기억을 찾는 전화를 받고 
뛸듯이 기뻐 김순애를 외쳤지만,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것 같았다. 
그후 50년 간 그들은 훌륭한 나라의 간성이 되어 학계로 정치계로 
사업으로 외국으로 화려하게 살아온 것 같았다. 

어째서 넌,초등 교사로 살게 되었냐고 되려 문책하듯 해 조금은 
씁쓸했지만 .. 
다행히 동네입구에 살고 있어 날마다 등하교길 동무로 친히 지내던 
언니 같은 친구 박찬혜의 소식을 알게 되어  큰 기쁨이었다.  
박찬혜의 추억 속엔  예술제 때 <'춘향이 '극무>를 만들어 준 나를  
오직 기억해 주었을 뿐 역시 김순애를 기억해 내지 못했었다.. 

그 후로 여러 사람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그 묻어버린 곳의 
동창회엘 나가게 되어 50년이 흐른 노년의 모습들을 보며, 
누구는 당요로 고생~ 누구는 삼선의 고배를 ~ 
누구는 정년후의 학자로~ 사업가로, 현재 서울 시내 일류 고등학교 
여교장으로~ 참 화려한 일생을 살고 왔음을 보았다. 
열심히 살아온 흔적을 고맙게 기쁜 마음으로 보았다.
 
그 당시 학급의 주체들이 모였건만, 내가 애타게 찾는 김순애의 
이름은 튀어 나오질 않으니, 실망으로 허탈해 질 뿐이었다.

 심지어 'TV는 사랑을 싣고' 방송 프로그램 이용도 생각해 보았지만..
 자신과 용기가 없어 나의 쇠잔해진 정신력을 느낄 뿐이다. 
그리곤 나 역시 바쁘게 졸작을 정리하여 시집을 출간하고, 서둘러 
미국행을 하게 되었다. 체류 삼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 
아마도 미국땅에서 성장해 살고 있을'문화일~ 문화일'을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 아이 성격상 잘 적응 하였으리라는 기대감으로, 
그 보다  50 년이란 너무 긴 시간을 인정하고  단념하였다. 

어느 겨울에 '서울 역사박물관' 자원봉사자를 신청하는 인터넷을 
검색하는 중에 박물관 당시 관장님인 동창 이름에 ~아뿔사, 
컴의 자판을 덮고 쉽게 포기 했다. 
하지만 내 주변의 하동송림카페의 자운영님 이하 몇분이 그곳에서 
오래도록 신임을 얻고 열심히 일하여 '도우미 대상' 까지 받으며 
큰 역할을 하고 있으니 여전히 관심이 깊어지고  더 따순 후원을 
해 주고 싶을 뿐이다.
 
가끔씩은 관장실에 들려 보고 (寶庫)같은 서적도 구경하고, 그윽한 
차맛도 즐기는 일이 오히려 편안하고 조촐한 동창의 훈짐을 느낀다. 
그 기쁜 일들 속에 또 하나 
<정완호 총장님의 문예비젼의 수필 등단>

소식이라니, 축하와 함께 자랑스러움이다.  
교보에 갈 일이 또 하나 더 생겨 문향의 울타리가 더 넓게 펴진다.  

모두 함께 기쁨 속에 건강하시길 바란다. 
김순애는 생전에 꼭 찾고 싶은 친구이어서 오래 살아 주었으면 좋겠다.
김순애 ! 너 어디있니???

2004.12. 그믐날- 오영희 합장

한국가곡: 옛동산에 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