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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사랑방>삶의추억

2004.10.25 14:26

밤안개

조회 수 1542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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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lonesome old town

현미의 '밤안개' 원곡 가사는 처음에 'It's lonesome old town,When you're not alone'인데 뒤는 생각나지 않는다.

20년 전 나는 진주의 한 목로주점의 어떤 여인과 단둘이 앉아있었다.시간은 자정을 넘었고 위치는 진주 YMCA 앞인 것은 기억나는데,그 집이 골목 안이었는지,좁은 2차선 한길이었는지 희미하다.

어쨌던 차를 집 앞에 세우고,불문곡직 나는 불꺼진 주점 문을 녹크해서 잠든 여주인을 깨워서 만났다.정란이는 백열전등 스위치를 켜고 파자마 바람인채 주점 안에 서 있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나는 서글픈 타향살이 멜랑코리에 훔뻑 젖은 20년만에 고향 온김에 밤늦게 초등학교 여자친구를 찾은 것이다.

정란이와 나는 과거에 무슨 연분 있던 사이는 아니고,아득한 초등학교 시절,남녀 육상선수로서 여름 방학에 교정에 나와서 둘이 학교 대표로 육상연습을 받은 일 밖에 없다.
그러나 정란이는 여고 다닐 때 대대장을 하며 '맥아더'라는 거창한 별명으로 진주남학생들이 다 알만치 유명했고,근육 하나 제대로 없는 꼬맹이 남학생들,(이런 남학생이 시근방은 먼저 떨지만)이 괜히 남자라고 치근덕거리면 오히려 혼쭐을 내주는 그런 여걸이면서도 나에게는 유독 여자티를 내며 수줍음을 떨곤했던 그런 정도의 사이였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나는 63년에 서울로 온 후 고향에 못간 고독과 서글품에 잔뜩 찌든 초라한 중년이 되고말았고,정란이는 첫번째 결혼이 파탄나고,그뒤 진주 모 검사와 이상한 소문만 잔뜩 남긴 정사 끝에 술집을 차리자 얌전한 주부들인 진주여고 후배들이 기피하는 그런 요주의 인물이 되어있었다.

세월 속에 두 사람 다 인생의 애수를 알만한 나이로 변해있었다.

이렇게 만나 그녀 침실에 개다리 소반 술상 하나 놓고 마주 앉았다. 서로 잔이 비면 채워 주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모처럼 찾은 고향은 타향 같다는 것,친구들 소식은 전혀 모르고 고향이 너무 허전해서 정란씨가 여기 산다는 소식 듣고 반가웠고,내일 새벽 5시에 함양으로 떠나야 할 형편이라 시간이 없어 한밤에 잠시 얼굴이나 보고갈려고 찾아왔다는 것을 이야기 했고,정란이는 내가 졸업 후 K대에 진학한 것,나와 가장 친하던 철수 자살 후 자원입대해서 월남에 갔다는 소문,서울서 기자 한다는 소문은 알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정란이 소문을 알기에 그가 왜 진주를 떠나 차라리 타향에 가서 살지않느냐고 물었고,정란이는 그래도 자기는 고향땅을 떠나기는 싫었다는 쓸쓸한 대답을 해서 심금을 더 울렸다.

'이번 다녀가면 10년 20년 뒤에 언제 또다시 올지 모르겠네요?'
정란이가 물었고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정란이는 옆 방에서 휴가차 온 군인아들을 깨워 데려왔다.
'엄마 초등학교 동창이신 김선생님께 인사 올려라.'
아들은 엎드려 나에게 큰 절 올리고 물러갔다.

이렇게 정란이와 만나고 헤어진 것이 20년 전이다.
골목 길엔 밤안개가 가득했다.
'정란씨가 먼저 들어가세요'
'아닙니다.먼저 떠나세요.'
차는 떠났고 뒤를 도라보니 정란이는 안개 속에 떠나가는 차가 보이지않을 때까지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그 후 정란이가 죽었다는 소문만 어렴픗이 들었다.


작은 이영진
  애처러운 만남과 헤어짐이네요   200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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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옹
  '고난한 친구를 위하여 눈물로 적은 회상기'라고 해야 하나요....
안개속이었지만 더욱 또렷이 기억되는 추억이겠습니다.   200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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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호정
  아무런 관계도 아니지만, 초등 친구들은 평생동안 안개같은 연민을 품고 사나봅니다 여걸답다 인정 할 만큼 자신의 비참해진 현실을 안고 꿋꿋이 고향에 머물 수있다는 건, 애향심보다 더 맥아더 같다는 그 여인의 집념이었겠지요 이해하고 슬퍼하고도 싶은 이야입니다
晉州 ! 그리운 추억의 곳입니다   2004/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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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호정
  김현거사님께!
이 글, 진주! 정란님 이야기를 추억의 방으로 옮겨 느긋하게 읽고 싶으네요 사랑방에는 글들이 조르르 뒤따라 오르니 쉬 다락속으로 내려가버려서요...꼬리글들도 따라가겠지요...   2004/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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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거사
  자리를 잘못 잡은 모양이군요.추억이 더 적절하겠읍니다.   2004/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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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허허바다 2004.10.26 15:43
    밤안개 속에서 못 박힌 듯 서 계섰던 그 순간 그 광경...
    아!... 그리곤 결국 가슴을 울리게 만드시는군요...
    저도 세월이란 같은 길 가겠죠? 그렇죠?
    무섭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거사님...
  • ?
    솔메 2004.10.26 16:21
    심금이 마냥 울려옵니다.
    '밤안개'는
    정녕코 잊지못할 추억의 옷자락이라고나 해야 할지요....
  • ?
    오 해 봉 2004.10.26 22:11
    가슴이 찡 하네요,
    순정소설 한권을 읽은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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