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팔 세르파

by 오해봉 posted Oct 1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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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정상에 올랐지만.. 이름없는 그들, 셰르파

 

히말라야 등반 도중 사망한 한국원정대원 등 희생자들의 시신을 실은 헬기가지난

14일(현지시간)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 있는 네팔국립대학병원에 도착한가운데

이번 사고로 함께 숨진 네팔인 가이드의 유가족이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히말라야 구르자히말을 전에 없던 방식으로 오르고자 했던 김창호 대장과

그 과정을 기록하고자 나섰던 임일진 감독, 그리고 유영직, 정준모, 이재훈

산악인 영결식이 19일 엄수됐습니다.

울림과 아쉬움을 남기고 떠난 이들의 명복을 빕니다.

수많은 산악인들이 히말라야에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셰르파들이 등반을 돕다 생을 마감했습니다.

지난 12일 세상을 떠난 김창호 대장과 5명의 한국인 곁에도

네 명의 네팔인 셰르파가 있었습니다.

8000m를 넘는 14좌 가운데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를 오르다가

숨진 사람 셋 중 하나는 이들 셰르파입니다.

 

19일 오후 서울시립대에서 열린 ‘2018 코리안웨이 구르자히말 원정대’합동영결식에서

참자가들이 추도를 하고 있다. /정지윤기자

 

■ 셰르파는 누구인가

‘셰르파’는 티베트어로 ‘동쪽(셰르)에서 온 사람(파)’이라는 뜻입니다.

16세기 티베트에서 네팔로 이주한 히말라야 고산 민족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들의 후손 중에는 성이 아예 셰르파인 사람도 많습니다.

지금 셰르파는 ‘일로서 등반을 돕는 사람’이라는 말로 널리 쓰입니다.

이들은 대개 히말라야 산자락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등산 안내인으로 활동합니다.

초창기에 외국 원정대의 짐을 운반하는 단순한 일만 했지만 최근에는

등반 기술을 익혀 사실상 대원 역할까지 수행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직업으로서 셰르파의 기원은 1900년대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920년대에 서구 강대국들이 히말라야 탐사를 국가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영국에서 첫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나섰는데, 정찰과 시험 등반에

짐꾼과 막일꾼이 필요했습니다.

‘셰르파족’이 높은 고도에 잘 적응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각국 원정대가 이들을 정식으로 고용했습니다.

처음에 단순히 짐을 운반하는 일만 하던 셰르파는 최근에는

등반 기술을 익힌 대원 역할까지 수행합니다.

이외에 짐꾼(포터)과 조리사(쿡) 등 지원인력으로 나서는 사람도 많습니다.

 

■ 유명한 셰르파들

전문가로서 셰르파의 존재를 널리 알린 사람은 단연 텐징 노르가이입니다.

노르가이는 1953년 에베레스트 최정상에 세계 최초로 오른 뉴질랜드 등반가

에드먼드 힐러리와 바로 그 현장에 같이 있던 사람입니다.

노르가이가 먼저 정상에 올랐지만 힐러리를 위해 최후 한 발을 남겨두고

양보했다는 설도 전해집니다.

힐러리는 노르가이의 공을 인정해 1960년 히말라야트러스트라는 단체를

설립해 네팔에 학교를 세우고 셰르파를 위한 복지제도를 마련했습니다.

 

에베레스트 등정 당시 복장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에드먼드 힐러리(왼쪽)와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 AP·연합뉴스

 

노르가이는 1914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아버지가 진 빚을

갚기 위해 야크와 소떼를 몰았습니다.

키우던 야크들이 병으로 죽어 생계가 어려워지자 네팔로 옮겨와

하인 생활을 합니다. 이곳에서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원정대를 접한 그는

1935년 21살 나이에 에릭 십턴이 이끄는 영국 원정대에 처음으로 참여했습니다.

이후 여러 차례 등반해 이름을 알리고 영국 9차 원정대에 셰르파

우두머리이자 대원으로 참여합니다.

힐러리와 등반에 성공한 이후 그는 다시는 에베레스트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그저 가난을 벗기 위한 호구지책으로 여겨진 일이었지만,

텐징이 정상에 서자 셰르파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히말라야 14좌 완등 기록을 세운 셰르파 아파. AP·연합뉴스

2011년에는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셰르파도 나왔습니다.

그 주인공인 아파 셰르파도 역시 12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포터로 일을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에베레스트를 가장 많이 오른 셰르파는 키미 리타 셰르파(48)입니다.

그는 스물 네 살이던 1994년 처음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고,

K2, 초오유, 안나푸르나 등 해발고도 8000m가 넘는 산을 연이어 올랐습니다.

그는 아직도 등반을 중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이 깨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리타에 앞서 두 명의 셰르파가 21번씩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는데 지금은 모두 은퇴했습니다.

여성도 셰르파 일을 합니다. 올해는 히말라야 14좌를 한 시즌 25일 내에

모두 오르는 기록을 세운 여성 셰르파도 나왔습니다.

니마 장무 셰르파(28)가 그 주인공입니다.

네팔 관광청에 따르면 그는 네팔 여성 가운데서는 최초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세 개 봉우리를 오른 사람이기도 합니다.

셰르파와 함께 산에 오르는 것은 올해부터 의무사항입니다.

네팔 정부는 지난해 12월 외국인 등반객의 단독 등반을 금지하는

조항을 안전규정에 포함시켰습니다.

안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자국민 일자리도 늘리고자 한 것입니다.

 

■ 셰르파의 죽음과 ‘47만원’

2014년 4월 에베레스트 눈사태로 네팔인 셰르파 16명이 한꺼번에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셰르파들은 숨지거나 실종된 동료를 기려 등반을 거부했습니다.

이면에는 셰르파 처우 문제가 있었습니다.

정부 측이 사망자 유족 당 단 415달러(현재 환율로 약 47만원)를

보상하겠다고 하자 셰르파들은 크게 반발했습니다.

이때 임금과 보험료를 올리고 셰르파의 인권을 개선하자는

여론이 국제적으로 일었습니다.

2015년에는 네팔에서 규모 7.8의 대지진이 났습니다.

지진으로 8000여명이 사망했고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만

산악인 19명이 숨졌습니다.

4월18일 대지진 이후로 중단됐던 등반을 셰르파들이 다시 시작합니다.

네팔 산악연맹 소속 셰르파 9명이 그해 5월11일 에베레스트 산

정상 등반에 성공했습니다.

 

 

2015년 12월 지진으로 폐허가 된 네팔의 셰르파족 마을. 로이터·연합뉴스

에베레스트 등반객을 안내하려면 짐을 대신 지고 베이스캠프까지

스무 번을 넘게 왕복해야 합니다.

고되고 위험이 큰 일입니다.

‘엘리트 셰르파’가 한 시즌 약 두달 간 등반객을 안내하고 버는 돈은

5000달러 가량인데, 네팔 1인당 국민소득 750달러의 몇 배나 됩니다.

이들이 생계를 위해 산을 오르는 배경입니다.

1990년대부터 일반인도 돈을 내면 셰르파와 전문 산악인 도움을 받아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상업 등반’이 활성화됐습니다.

초기에는 에베레스트 입산에 제한을 두던 네팔 정부도 막대한

관광수입 때문에 입산 제한을 계속 풀어왔습니다.

2006년에 네팔 내전이 끝나면서 히말라야 등반이 급증하자

셰르파 수입도 늘어났습니다.

자녀를 미국 등지로 유학 보내고 법률가, 사업가, 의사 등으로

전업하는 사례도 일부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위험하다는 것은 여전히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웃도어 전문매체 <아웃사이드>는 2014년, 셰르파라는 직업이

이라크 전쟁에 미군으로 참전하는 것 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결론을 냅니다.

미국 노동통계국 통계에서 사용하는 직업 사망률(풀타임 십만명 당 사망자 수)에

셰르파 사망률을 빗대본 것이었습니다.

셰르파가 매 시즌 하는 노동을 ‘풀타임’ 직업으로 간주하기는 쉽지 않지만

산악 전문가와 셰르파들과 상의해 파악한 수치를 사용했다고

<아웃사이드>는 밝히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사망률을 비교하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미국 광부(2000~2010년) : 25명

미국 어부(2000~2010년) : 124명

알래스카 지역 비행기 조종사 ‘부시 파일럿’(1990~2009년) : 287명

이라크전 참전 미군(2003~2007년) : 335명

에베레스트 셰르파(2004~2014년) : 4053명

19일 현재 위키피디아의 8000m급 14좌 사망자 명단에는 총 981명이 올라 있습니다.

이 가운데 네팔 국적자는 207명, 전체의 21%입니다.

에베레스트만 따로 떼어 보면 사망자 297명 중 114명이 네팔 사람이었습니다.

세 명 가운데 한 명 꼴입니다.

 

■ 죽음을 끼고 걷는 길

 

산악인 엄홍길. 이상훈 선임기자

 

 

엄홍길 대장은 2011년 10월 경향신문 기고에서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으로 ‘셰르파 도르지의 죽음’을 꼽았습니다.

그 내용을 발췌해 전합니다.

정상을 오르는 길이 옆구리에 죽음을 끼고 걷는 길이라는 걸
그 전까지는 미처 몰랐다.
그러다 첫 사고가 발생했다.
바위처럼 단단했던 의지가 진흙처럼 물러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캠프3에서 캠프4로 가는 길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해발 7500쯤에서 설벽을 타던 셰르파 술딤 도르지가 추락했다.
공처럼 몸이 통통 튀더니 산 아래로 굴렀다.
1000m가량을 그렇게 굴렀다.
서둘러 도르지를 찾으러 달려갔다.
찢어진 배낭, 피묻은 옷자락만 바위에 끼어 있었다.
처참한 죽음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그의 시신은 없었다.
처음으로 목격한 죽음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팡보체라는 셰르파 마을에서 그의 어머니와
부인 히파디기를 만났다.
가족들은 나를 원망했다.
셰르파 도르지의 나이는 당시 열여덟.
결혼한 지 넉 달밖에 안된 신혼이었다.
울먹이면서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내가 먼저 앞서가야 했어.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어…’ 고통으로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한 사람을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고 나니
히말라야에 다시 오르고 싶지 않았다. 두렵고 무서웠다.』
그러나 “자석처럼 마음을 이끄는 힘”이 히말라야에는 있어
그는 등반을 계속합니다.
1985년부터 22년 동안 38번을 도전해 아시는 바와 같이 2008년까지
14좌를 완등했고 이에 속하지 않지만 8000m를 넘는 2개 봉우리를
더 올라 2008년 ‘16좌 완등’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 대신 히말라야에서 나는 산악인 6명, 셰르파 4명 등
모두 10명의 소중한 친구들을 잃었다.
” 엄 대장은 “나는 지금 그들을 위해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한 번 12일 히말라야에서 숨진 아홉 분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