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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마을>귀거래사

2006.01.15 09:13

野言

조회 수 2274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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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으로 이렇게 섬세한 글이 있었나 싶었다.
선비의 운치를  이렇게 아름답게 나타낸 글이 있었나 싶었다.
신흠의 야언(野言) 몇대목을 옮긴다.

전원 생활을 해 온 세월이 오래 흐르다 보니 이제는 세상 밖의 사람이 다 되었다. 어느 날 예전에 지었던 글들을 펼쳐 보다가 마음속으로 부합되는 것이 있기에, 자그마한 책자로 엮어 그 속에 나의 뜻을 곁들이고 야언이라고 이름하였다.

모든 병을 고칠 수 있으나 속기(俗氣)만은 치유할 수 없다. 속기를 치유하는 것은 오직 책밖에 없다.

의기(義氣)가 드높은 친구를 만나면 속물 근성을 떨어버릴 수가 있고, 두루 통달한 친구를 만나면 부분에 치우친 성벽(性癖)을 깨뜨릴 수가 있고, 학문에 박식한 친구를 만나면 고루함을 계몽받을 수 있고, 높이 광달(曠達)한 친구를 만나면 타락한 속기(俗氣)를 떨쳐 버릴 수가 있고, 차분하게 안정된 친구를 만나면 성급하고 경망스런 성격을 제어할 수 있고, 담담하게 유유자적하는 친구를 만나면 화사한 쪽으로 치달리려는 마음을 해소시킬 수가 있다.

독서는 이로움만 있고 해로움은 없으며, 시내와 산을 사랑하는 것은 이로움만 있고 해로움은 없으며, 꽃ㆍ대나무ㆍ바람ㆍ달을 완상(玩賞)하는 것은 이로움만 있고 해로움은 없으며, 단정히 앉아 고요히 입을 다무는 것은 이로움만 있고 해로움은 없다.

차가 끓고 청향(淸香)이 감도는데 문 앞에 손님이 찾아오는 것도 기뻐할 일이지만, 새가 울고 꽃이 지는데 찾아 오는 사람 없어도 그 자체로 유연(悠然)할 뿐. 진원(眞源)은 맛이 없고 진수(眞水)는 향취가 없다.

표현하고 싶은 생각을 말하고 그치는 것은 천하의 지언(至言)이다. 그러나 표현하고 싶은 생각을 다 말하지 않고 그치는 것은 더욱 지언이라 할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하루에 착한 말을 한 가지라도 듣거나 착한 행동을 한 가지라도 보거나 착한 일을 한 가지라도 행한다면, 그날이야말로 헛되게 살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시(詩)는 자신의 성향(性向)에 맞게 할 따름이니 이를 벗어나면 각박하고 고달프게만 되고, 술은 정서를 부드럽게 푸는 정도로 그쳐야 할 것이니 이를 지나치면 뒤집혀 질탕(佚蕩)하게 되고 만다.
아무리 만족스럽게 풍류(風流)를 즐겨도 그 시간이 한번 지나고 나면 문득 비애의 감정이 솟구치는데, 적막하면서도 맑고 참된 경지에서 노닐게 되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의미(意味)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너무 화려한 꽃은 향기가 부족하고 향기가 진한 꽃은 색깔이 화려하지가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귀의 자태를 한껏 뽐내는 자들은 맑게 우러나오는 향기가 부족하고 그윽한 향기를 마음껏 내뿜는 자들은 낙막(落莫)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군자는 차라리 백세(百世)에 향기를 전할지언정 한 시대의 아리따운 모습으로 남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한 시대의 사람들이 모두 애호하게 할 목적 의식을 갖고 지은 문장은 지극한 문장이 아니고, 한 시대의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게끔 다듬어진 인물이라면 바른 인물이 아니다.

산중 생활이 수승(殊勝)한 것이기는 하지만 조금이라도 얽매여 연연하는 마음이 있으면 또한 시조(市朝=사람이 북적대는 시장이나 조정)와 같고, 서화(書畵)가 아취(雅趣) 있는 일이긴 하지만 한 생각이라도 이를 탐(貪)하게 되면 또한 장사꾼과 같게 되고, 한 잔 술 드는 것이 즐거운 일이긴 하지만 한 생각이라도 남의 흥취에 따라가는 것이 있게 되면 또한 감옥처럼 답답하기 그지없게 되고, 객(客)을 좋아하는 것이 화통(和通)한 일이긴 하지만 조금이라도 속된 흐름에 떨어진다면 또한 고해(苦海)라 할 것이다.

재기가 뛰어난 사람은 공근(恭謹)함을 배워야 하고, 총명한 사람은 침후(沈厚)함을 배워야 한다.

인후하게 하느냐 각박하게 하느냐의 여부가 장(長)과 단(短)의 관건이 되고, 겸손하게 자신을 제어하느냐 교만을 부리느냐의 여부가 화와 복을 초래하는 관건이 되고, 검소하게 하느냐 사치하게 하느냐의 여부가 가난과 부귀를 결정짓는 관건이 되고, 몸을 보호하여 양생(養生)을 하느냐 욕심대로 방자하게 행동하느냐의 여부가 죽음과 삶의 관건이 된다.

손님은 가고 문은 닫혔는데 바람은 선들 불고 해가 떨어진다. 술동이 잠깐 기울임에 시구가 막 이루어지니, 이것이야말로 산인(山人)이 희열을 맛보는 경계라 하겠다.

긴 행랑 넓은 정자 굽이쳐 흐르는 물에 돌아드는 오솔길, 떨기 진 꽃 울창한 대숲 산새들과 강 갈매기, 질그릇에 향 피우고 설경(雪景) 속에 선(禪) 이야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경계인 동시에 담박한 생활이라고 하겠다.

해야 할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는 것, 이것은 세간법(世間法)이고, 할 일도 없고 해서는 안 될 일도 없는 것, 이것이 출세간법(出世間法)이다. 옳은 것이 있고 그른 것이 있는 것, 이것은 세간법이고, 옳은 것도 없고 옳지 않은 것도 없는 것, 이것은 출세간법이다.

군자는 사람들이 감당해내지 못한다고 모욕을 가하지 않고, 무식하다고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는다. 때문에 원망이 적은 것이다.

봄철도 저물어가는데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니 오솔길이 아슴프레하게 뚫리고 소나무와 대나무가 서로 비치는가 하면 들꽃은 향기를 내뿜고 산새는 목소리를 자랑한다. 거문고를 안고 바위 위에 올라 앉아 두서너 곡조를 탄주(彈奏)하니 몸도 두둥실 마치 동천(洞天)의 신선인 듯 그림 속의 사람인 듯하였다.

뽕나무 숲과 일렁이는 보리밭, 위와 아래에서 경치를 뽐내는데, 따스한 봄날 꿩은 서로를 부르고, 비오는 아침 뻐꾸기 소리 들리네. 이것이야말로 농촌 생활의 참다운 경물(景物)이라 할 것이다.

납자(衲子 선승(禪僧))와 소나무 숲 바위 위에 앉아 인과(因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공안(公案=우주와 인생의 궁극적 질문.화두(話頭)))을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흘러 어느새 소나무 가지 끝에 달이 걸렸기에 나무 그림자를 밟고 돌아왔다.

마음에 맞는 친구와 산에 올라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내키는 대로 이야기하다가 이야기하기도 지쳐 바위 끝에 반듯이 드러 누웠더니,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둥실 날아와 반공중(半空中)을 휘감았는데, 그 모습을 접하면서 문득 흔연해지며 자적(自適)한 경지를 맛보게 된다.

찬 서리 내려 낙엽 질 때 성긴 숲 속에 들어가 나무 등걸 위에 앉으니, 바람에 나부껴 누런 단풍잎 옷소매 위에 떨어지고 산새 나무 끝에서 날아와 나의 모습을 살핀다. 황량한 대지가 청명하고 초연한 경지로 바뀌어지는 순간이었다.

문을 닫고 마음에 맞는 책을 읽는 것, 문을 열고 마음에 맞는 손님을 맞이하는 것, 문을 나서서 마음에 맞는 경계를 찾아가는 것, 이 세 가지야말로 인간의 세 가지 즐거움이다.

거문고는 오동나무 가지에 바람이 일고 시냇물 소리가 화답하는 곳에서 연주해야 마땅하니, 자연의 음향이야말로 이것과 제대로 응하기 때문이다.

살구꽃에 성긴 비 내리고 버드나무 가지에 바람이 건듯 불 때 흥이 나면 혼자서 흔연히 나서 본다.
일 많은 세상 밖에서 한가로움을 맛보고 세월이 부족해도 족함을 아는 것은 은둔 생활의 정(情)이요, 봄철에 잔설(殘雪)을 치워 꽃씨를 뿌리고 밤에 향을 피우며 도록(圖錄)을 보는 것은 은둔 생활의 흥(興)이요, 연전(硏田=문필 생활)은 흉년을 모르고 주곡(酒谷)에 언제나 봄 기운이 감도는 것은 은둔 생활의 맛[味]이다.

어느 쾌적한 밤 편안히 앉아 등불 빛을 은은히 하고 콩을 구워 먹는다. 만물은 적요한데 시냇물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릴 뿐, 이부자리도 펴지 않은 채 책을 잠깐씩 보기도 한다. 이것이 첫째 즐거움이다. 사방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문을 닫고 소제한 뒤 책들을 앞에 펼쳐놓고 흥이 나는 대로 뽑아서 검토해 보는데, 왕래하는 사람의 발자욱 소리 끊어져 온 천지 그윽하고 실내 또한 정적 속에 묻힌 상태, 이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텅 빈 산에 이 해도 저무는데 분가루 흩뿌리듯 소리없이 내리는 눈, 마른 나무가지 바람에 흔들리고 추위에 떠는 산새 들에서 우짖는데, 방 속에 앉아 화로 끼고 차 달이며 술 익히는 것, 이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짧은 돛에 가벼운 노를 장치한 작은 배 한 척을 마련하여 그 속에 도서(圖書)며 솥이며 술과 음료수며 차[茶]며 마른 포(脯) 등속을 싣고는 바람이 순조롭고 길이 편하면 친구들을 방문하기도 하고 명찰(名刹)을 탐방하기도 한다. 그리고 노래 잘하는 미인 한 명과 피리 부는 동자 한 명과 거문고 타는 한 사내와 이이를 태우고는 안개 감도는 물결을 헤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왕래하면서 적막하고 고요한 심회를 푼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기막힌 운치라 할 것이다.

초여름 원림(園林) 속에 들어가 뜻 가는 대로 아무 바위나 골라잡아 이끼를 털어내고 그 위에 앉으니, 대나무 그늘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고 오동나무 그림자가 뭉실 구름 모양을 이룬다. 얼마 뒤에 산속에서 구름이 건듯 일어 가는 비를 흩뿌리니 청량감(淸凉感)이 다시 없다. 탑상(榻床)에 기대어 오수(午睡)에 빠졌는데, 꿈속의 흥취 역시 이때와 같았다.

대나무 안석(案席)을 창가로 옮긴 뒤 부들 자리를 땅에 폈다. 높은 봉우리는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시내는 바닥까지 보일 정도로 맑기만 하다. 울타리 옆에 국화 심고 집 뒤에는 원추리를 가꾼다. 둑을 높여야 하겠는데 꽃이 다치겠고 문을 옮기자니 버들이 아깝다. 구비진 오솔길 안개에 묻혔는데 그 길을 따라가면 주막이 나타나고, 맑게 갠 강 해가 저무는데 고깃배들 어촌에 정박한다.

산중 생활을 위해서는 여러 경적(經籍)과 제자(諸子)사책(史冊)을 갖추어둠은 물론 약재(藥材)와 방서(方書)도 구비해야 한다. 그리고 좋은 붓과 이름있는 화선지도 여유있게 비치하고 맑은 술과 나물 등속을 저장해두는 한편 고서(古書)와 명화(名畵)도 비축해두면 좋다. 그리고는 버들가지로 베개를 만들고 갈대꽃을 모아 이불을 만들면 노년 생활을 보내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깊이 산중에서 고아(高雅)하게 지내려면 화로에 향 피우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데, 벼슬길에서 떠나온 지도 이미 오래되고 보니 품질이 괜찮은 것들이 모두 떨어지고 없다. 그래서 늙은 소나무와 잣나무의 뿌리며 가지며 잎이며 열매를 한데 모아 짓찧은 뒤 단풍나무 진을 찍어 발라 혼합해서 만들어 보았는데, 한 알씩 사를 때마다 또한 청고(淸苦)한 분위기를 조성하기에 충분하였다.


  • ?
    2007.05.21 16:32
    두 번 읽어 그 깊은 뜻을 조금 알았습니다.
    '野言' 잘 읽고 갑니다.
    거사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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