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재를 넘으면서

by 김용규 posted Feb 0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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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재 길이 완공되고 나서 함양의 병원에 물리 치료를 하러 가시는 어머니를 태우고서 일부러 오도재 길로 차를 몰았다. 아름다운 경치 구경도 시켜 드릴 겸 어머니께서 항상 그리워 하셨던 친정 부근의 분위기와 추억을 되살려 드릴려고 하는 속내가 있었다.

어머니께서 살아 계셨을때의 이야기이다.

" 아이구. 요새 사람들은 참 기술도 좋지. 이런 산중까지 길을 내다니!"

붉으레 하게 단풍으로 물이 든 지리산의 운치를 그 누구보다도 더 감탄해 하셨던것 같다.

어머니께서는 항상 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가난했던 시절의 이야기가 어머니의 주 메뉴였고 ' 내 이야기는 책으로 한권 써도 모자란다' 라는 용어가 단골 메뉴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 옛날에 운봉에 있는 너거 이모집에 갈 때마다 잘 살지도 못하는 이 동생이 불쌍타고 참깨, 찹쌀, 콩등을 싸 줄때는 어떻게나 좋던지 그것이 무거운 줄도 모르고 그 먼 길을 이고 들고 집에까지 오던 길이었는데 세상 참 많이 좋아졌지!"

그 먼길! 그 먼길에 대해서 상황적인 분석을 해 본다면 전북 남원시 운봉에서 인월로, 당시에는 요즘처럼 도로가 전혀 없었으니까(1940년대 말 무렵) 산길 지름길로 주로 다녔던 길이니까 인월에서 삼봉산 오도재의 사잇길로 해서 법화산 중턱길 그러니까 휴천면 문정 마을 뒤 산길로 해서 엄천골까지 무거운 짐을 이고 오셨다는 말이 된다.

약 100리쯤 되는 길이다. 그것도 구불구불한 산 길이며 오르막 내리막이 장애물이 되어 무척 힘이 드는 그런 험한 길이 된다. 요즘 사람들의 태극종주 정도 하는 그런 거리의 험한 길이 된다.

그런 산길로 당시 어린 형님과 누나를 데리고 그 먼길을 다니셨단 말을 난 자주 들으면서 자랐다.
외갓집이 팔령 부근이었지만 어머니께서는 한번도 그곳에 가 보시지 못하셨다. 외갓집이 디른 곳으로 이사를 간 탓이기도 했거니와 고개 하나를 넘으면 존재하는 친정 곳이었어도 버스를 탈려고 하면 두번이나 갈아 타야 하는 곳이었고 빙 둘러서 가야만 했던 그런 먼곳이었으며 항상 바쁜 일상 생활 때문에 여가 문화는 전혀 없으셨던, 그런 생활에 찌들었던 탓이기도 했다.




(오도재의 구불구불한 길)


그런 어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어 왔기 때문에 일부러 오도재 고갯길을 택하여 나는 차를 몰았던 것이다. 벌써 옛날의 이야기이다.

평범한 길이지만 어머니께서는말끔하고 깨끗하게 포장이 된 길을 아주 감탄해 하셨고 눈에서는 눈물이 괴어 있다는 것을 난 쉽게 감지할 수가 있었다.
과거에 대한 회환의 감정과 그 무거운 짐을 이고 가도 가도 끝이 없어 보였던 그 먼길을 오고 가셨던 삶의 무게에 대한 대조적인 느낌 때문이셨으리라.

난 평범한 감정으로만 그 길을 다녔었는데 어머니께서는 구불구불한 오도재길이 나와는 전혀 다르게 느껴지셨던 모양이다.
세상에 대한 감사와 감동, 아름다운 변화에 대한 기쁨의 감정을 항상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셨던 기억이 아련해 온다.

난 드라이브를 참 좋아 한다. 길이 나 있는 곳이면 구석구석까지 차를 몰고 다니기를 좋아한다. 어렸을 때에 나 자신도 차비를 아낄거라는 생각에 먼길을 걸어 다녔던 기억을 되살려 보면 차를 몰고 여행을 하면 기분이 무척 좋아진다. 어머니의 젊었을 때 고생한 이야기와 맞물려 어머니의 감정 이입이 많이 된 탓이기도 했던것 같다.

길을 만들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땀을 흘려야 했을까?
얼굴도 모르는 그 예쁜길을 만들어 놓은 사람들에게 내가 아름다운 마음으로 길을 이용하는 그 만큼이나 감사해 질 때가 참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