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람록에 나타나는 옛 엄천골문화

by 김용규 posted Oct 2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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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유람록에 나타나는 지리산 엄천골문화
- 지리산 엄천강부근을 중심으로-

지리산은 3개도 5개 시군을 아우르는 광활한 면적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여가 문화의 발달로 최근에는 지리산을 찾는 등산 매니아들이 부쩍 늘어나서 사시사철 지리산은 산악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인터넷 문화의 발달로 지리산을 주제로 하는 홈페이지가 전국의 유명 산 홈페이지 중 가장 많은 카페나 블로그, 홈페이지가 있기도 한다.
최근에 와서는 그동안 꼭꼭 숨어 있었거나 세인들의 관심 밖에서 묻혀 있었던 지리산 관련된 여러 정보들이나 자료들이 새롭게 발굴되어지고 있고, 새로운 것들이 계속해서 발견되어 지기도 한다.
전국에 있는 유명산 중 유독 이 지리산이 화려하고 빼어난 다른 산보다도 산악 매니아들로부터 사랑을 더욱 많이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짐작해 보건대 지리산은 그 광활한 면적만큼이나 다양함과 어머니의 품같은 포근한 산세의 지형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우리의 삶을 함께 한 지리산의 잠재된 역사성과 혼이 배인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1967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지정된 국립공원 1호. 전북 남원시, 전남 구례군, 경남 산청군, 하동군, 함양군의 3도 5개 시군과 15개 면을 접하고 있는 거대한 산군이며 1억 3천만 평의 규모를 자랑하고 둘레의 길이가 800 리에 이르는 그야말로 방대함에 기가 눌릴 정도이다.

지리산이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 규모나 생태계, 자연경관뿐만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함께해온 민족의 영산이란 점이다. 단군왕검 이래 5천년 세월을 이어오는 동안 좌절과 굴곡의 역사에서, 우리는 지리산 능선에 기대어 통곡도하고, 지리산을 통해 새로운 삶과 희망을 기약하며, 때로는 지리산 자락을 부여잡고 발버둥치고, 피를 흘렸던 사실이 있었다.

지리산은 예로부터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신선이 살았다는 전설속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방장산’(方丈山)이라 일컬어 왔다.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은 ‘두류산’(頭流山)으로 불리어 지기도 한데 고려왕조를 무너뜨린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려 할 때 전국의 명산에 기도를 올리며 역성혁명의 창업의 뜻을 물었는데 유독 지리산만이 응하지 않고 소지가 오르지 않아 ‘반역산’(反逆山), ‘불복산’(不伏山)으로도 불리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여순 반란에서 6·25민족전쟁을 거치는 동안 빨치산 활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고 이웃에서 살던 사람들이 이데올로기 자체의 개념도 모른채 좌와 우의 소용돌이에 말려 숱한 고초를 겪은곳도 지리산이요, 가장 최근까지도 혼돈의 역사를 함께 한 산이다.
구비구비 골짜기를 형성하여 있고 그 골짜기의 수만큼 아기자기한 전설 또한 빼 놓지 못할 고귀한 지리산의 혼의 덩이이기도 하다.

지리산에는 세세한 전설만큼이나 산줄기마다 사연도 많아 내딛는 발자국마다 역사의 향기가 묻어나며 애잔한 전설 한 자락씩 품고 있다. 지리산은 마한의 피난도성, 가락국의 멸망,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국경의 변방으로 늘 싸움터의 중심이 되었다. 고려 때는 왜구의 침입과 민란으로,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왜란, 동학란으로, 해방공간에는 여순 반란과 민족전쟁으로서의 싸움터였던 것이다.

우리 민족의 주요 고비마다 호흡을 같이 해온 지리산. 그 넓이나 높이만큼 우리에게 큰 산. 그 곳에는 조상들의 삶의 흔적인 수많은 문화재가 널려있으며, 죽음과 생성의 역사가 있다. 지배와 저항의 역사가 있기에, 지배문화와 민중의 문화가 뒤섞여 살아 숨쉬고 있다. 또한 지리산은 높고 크기에, 보는 방향에 따라서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때로는 장엄, 험악한 아버지의 형상으로, 따뜻하고 포근한 어머니의 품속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느껴져 왔기에 세월과 함께 더더욱 사랑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리산 유람록과 엄천강 주변의 문화 분석)

조선시대 중엽부터 말기까지 선인들이 남긴 지리산 유람록 중 함양쪽의 지리산을 등정하면서 기록해 놓은 여러편 중 돋보이는 몇 편에 대하여 시대별로 대략적인 코스를 정리 해 본다면

⑴ 김종직 유두류록(1472년) :

함양읍-팥치재-당두재- 휴천면 남호리 절터- 동강(화암)-구실악재-한쟁이골-감태박골-노장대(지장사)-환희대-선열암-신열암-고열암(함양독바위-지리산으로 기행함

⑵ 김일손의 두류기행록(1489년 성종20 4월14일-4월28일) :
함양읍-제한역(팔령인근)-오도재-등구-금대암-용유담-문정-휴천면 남호리 절터-사근역(수동)-산청-단성-단속사-묵계-법계사- 천왕봉 등정

⑶ 양대박의 두류산 기행록(1586년 선조 19년 9월 2일-9월 12일) :
청계-운봉-인월-백장사-실상사-마천-용유담- 천왕봉갔다 오면서 용유담- 문정-휴천면 남호리 절터-당두재를 넘어 목현이모댁 1박- 팔령재-안신원-귀가

⑷ 박여량의 두류산일록(1610년 광해2년 9월 2일-9월 8일) :
함양수동인으로 병곡 도천-목현-휴천면 문정-용유담-마천 군자사-백무동-하동바위-천왕봉-상류암-쑥밭재-산청군 금서면 오봉-산청군 금서면 방곡-벼리-모실-목현-함양

⑸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1611년) :
남원-운봉-인월-마천의 영원사 및 인근 기행후-의탄-용유담-엄천강을 건너 마적-청이당-영랑대-소년대-천왕봉 등정을 함

⑹ 박장원 유두류산기(1643년) :
안의 - 수동- 유림 국계- 유림- 유림면 모실-함허정-엄천강을 계속 따라 올라가며 문정-용유담- 마천- 지리산 등정

⑺ 정시한의 산중일기(1686년)
1기) 4월14일-4월18일 ; 삼봉산 자락 암자들과 군자사 및 서암 등 임천강변 암자
2기) 4월19일-윤4월16일 ; 견성골 및 상무주암 부근 암자
윤4월17일-윤4월18일 ; 칠불암
3기) 윤4월19일-8월15일 ; 피아골 주변 암자
3-1) 윤4월19일-7월12일 ; 금류동암
3-2) 7월13일-7월26일 ; 금강대암
3-3) 7월27일-8월14일 ; 길상대암
3-4) 8월15일 ; 법왕대
4기) 8월16일-9월6일 ; 쌍계사, 화엄사, 실상사, 상무주암 및 금대암


⑻ 이동항 방장유록(1790년) :
함양- 유림면 함허정- 휴천면 절터 엄천사에서 1박 후-문정- 용유담- 마천-백무동- 지리산등정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중 함양 주변을 가장 잘 묘사해 놓은 것을 뽑아 본다고 하면 김종직의 유두류록(1472년)과 김일손의 속두류록( 1489년)이라 할 수 있겠다. 김종직의 유두류록 코스중 함양 영역의 지리산 코스는 함양관아→엄천→화암→지장사→선열암→신열암→고열암(1박)→ 청이당→영랑재→해유령→중봉→천왕봉→성모사(2박)이다.

김종직은 유두류록에서 요즘의 지리산 매니아들로부터 많이 불려지는 지리산 동북부 자락에 대해서 당시의 지리산 부근의 지명을 많이 언급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거나 뚜렷한 흔적들이 존재한 것이 없는데 유일하게 유두류록에서 언급되어 있는 함양쪽의 주요 지명들이 최근에야 유두류록 탐구 산행팀에 의해 속속 밝혀지기도 했다.
유 두류록에 기록된 주요 지명중 현재까지 주민들이 부르는 명칭이 남아 있는 것은 엄천이다. 마천을 거쳐 휴천을 지나고 산청군과 경계를 이루며 유림을 지나는 엄천강이 바로 그것이며 마천 아래의 거대한 협곡을 이루고 있는 곳을 휴천계곡 또는 엄천계곡이라 하지 않던가! 1912년에 휴지면과 엄천면이 병합되어져 지금의 휴천면이 되기 전에 엄연히 엄천면이라는 행정구역까지 존재한 것을 보면 신라 때 왕명을 받아 국가 사찰로 건립되어진 엄천사의 존재가 있었던 것을 유추해 본다면 김종직 선생이 기록해 놓은 엄천이라는 명칭은 참 오래도록 사용되어진 것 같다. 지장사, 환희대,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독녀암, 향로봉, 미타암등의 옛 지명도 지리산 탐구 산행팀에 의해 지명의 위치와 함께 옛 지명을 되살리려는 분위기가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급격하게 확산되어지고 있기도 하다.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에서 언급되어진 향로봉은 지금의 상내봉으로 구개음화 된 것을 그대로 지명화되어 지리산 지도에는 상내봉, 상내봉 삼거리로 표기되어지기도 했다.

김종직 선생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으면서 17년후인 1489년에 김일손 선생도 지리산 기행을 하게 된다. 그가 지리산 기행을 하면서 남긴 속두류록 또한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중 수작으로 꼽히는데 함양관아에서 출발한 그는 지금의 오도재를 넘어 금대암을 지나 마천쪽의 지리산 그러니까 지금의 백무동 코스를 밟으려 했으나 불행히도 마천 앞으로 흐르는 임천의 물이 불어나 강을 건너지 못하고 용유담을 거쳐 지금의 엄천강을 하류로 내려와 산청의 단성으로 지리산 등정을 하게 되었다. 불어난 물 때문에 엄청 길을 두른 셈이다.
하지만 그런 연유로 500년 전의 엄천강 주변의 인문 문화적인 상황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더 없이 당시의 분위기나 엄천강 주변의 문화를 유추해 볼 수 있는 고귀한 자료를 남기게 되었다.


‘못을 경유하여 동으로 나가니, 길이 몹시 험악하여 아래로 천척(千尺)의 절벽에 다달아 몸이 으슥하며 떨어질 것 같으므로, 인마(人馬)가 숨을 죽이고, 거의 30리를 지나와서 기슭을 앞에 두고 두류산 동록(東麓)을 바라보니 창등(蒼藤) 고목 사이에 선열(先涅) ㆍ 고열(古涅) 등의 절이 있는데, 그밖에도 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약수(弱水) 하나가 가로막아서 아무리 한걸음을 뛰어서 오르고자 해도 될 수 없었다. 길이 차츰 나직해지자 산도 차츰 평탄하고 물도 차츰 편안히 흐르며, 산이 북쪽에서 우뚝 솟아 세 봉이 피었는데, 그 아래 수십 호의 민가가 있어 마을 이름은 탄촌(炭村)인데, 앞으로 큰 내를 임해 있다. 백욱은, “여기가 살만한 곳이다.” 하므로, “나는 문필봉(文筆峯)이 앞에 있어 더욱 좋다.” 하였다.
앞으로 5 ㆍ 6리를 가니 대숲 속에 옛 절이 있는데, 이름은 암천사(巖川寺)이며 토지가 평평하고 광활하여 집짓고 살만하며 절을 경유하여 동으로 1마장을 가니 천 길의 적벽(赤壁)이 있는데, 사람들이 비스듬한 길을 벽 사이로 파 놓고 다닌다.’

김일손의 속두류록에서 언급한 엄천강 주변의 세세한 묘사이다. 지금의 휴천면과 마천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용유담에서 엄천강 하류로 내려가면서 기록해 놓은 것이다. 당시엔 가파른 산길이었을 용유담과 문정마을 사이의 길에 대한 묘사와 지금의 문정 마을을 당시엔 탄촌이라는 고유명사를 사용했다는 것도 이채롭거니와 문정을 사람이 살만한 곳이라 하여 감탄한 것도 돋보이는 대목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상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마을을 다른 이름으로 절터라고 부른다. 무슨 이유인가는 몰라도 그 부근 사람들은 남호라는 명사보다 절터라는 이름에 더 익숙해져 있다. 향토 사학자에 의해 그곳은 신라 때 왕의 명에 의해 창건되어진 옛 엄천사의 절터를 말하는 것이라고 최근에 밝혀 놓았으며,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엄천사의 존재가 김일손 선생의 속두류록에서 그 엄천사의 존재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폐교된 옛 화남초등학교와 휴천면의 남호리 사이의 지방도가 있는데 유림면 모실마을에서 마천방향으로 조금만 가다 보면 바위산을 깎아 만든 도로가 나타난다. 바로 벼리고개라는 곳이다. 500년전 김일손 선생이 그곳을 지나면서 ‘천길의 벽 사이로 비스듬한 길을 파서 다닌다.’라고 묘사해 놓았다. 당시에도 사람들의 왕래를 위해 인위적으로 벼리 돌산을 깎아 길을 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속두류록에 기록되어 있는 오도재 부근의 등구사의 존재와 등구폭포의 존재, 당 시대의 금대암의 규모등을 쉽게 유추 해 볼 수 있는 자료이며 문학적 가치도 있거니와 인문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고찰이 용이한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선인들의 유람록속에 등장하는 마천의 군자사)

양대박 선생이 쓴 두류산 기행록(1586년)에서 당시의 함양 변방의 문화를 기록해 놓은 것이 눈에 띄인다. 선인들의 옛 기록에 마천의 군자사를 참 많이 언급해 놓았는데 양대박 선생의 기록에도 예외는 아닌데 1586년 당시의 문화 를 일을 수 있는 대목이 많이 눈에 띄이고,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딱 4년 전이 되는 당시의 마천 군자사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해 놓고 있다.

‘음산한 행랑채는 반쯤 무너졌고 불전은 적막하여 예전의 군자사가 전혀 아니었다. 내가 괴이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승려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기를 “유람객들이 연이어 찾아오고 관청의 부역이 산더미처럼 많으니, 중들이 어찌 줄어들지 않을 것이며, 절이 어찌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서, 손가락을 꼽아가며 관청에서 시키는 부역을 헤아리며 그 까닭을 낱낱이 말하였다. 오춘간이 말하기를 “그대는 이 일이 괴로운가? 내가 수령에게 고하여 그대들의 부역을 줄여주면 되겠는가?”라고 하니, 승려가 수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아! 가혹한 정치의 폐단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가? 산 속에서 걸식하는 승려들도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부역에 시달리니, 살을 깎는듯한 고통은 금수(禽獸)라도 면치 못할 것이다. 한참을 탄식한 후 법당에 모여 저녁을 먹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4년전의 군자사를 언급한 대목인데 당시에 부역으로 인한 민초들의 폐해가 심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박여량 선생이 두류산일록을 쓴 다음해에 코스는 다르지만 유몽인 선생의 유두류산록(1611년)에서 1년전에 박여량 선생이 다녀갔던 군자사를 들리면서 다음과 같은 묘사를 한 것이 특이하다.

‘저물녘에 군자사로 들어가 묵었다. 이 절은 들판에 있는 사찰인지라 흙먼지가 마루에 가득하였다. 선방(禪房) 앞에 모란꽃이 한창 탐스럽게 피어 있어 구경할 만하였다. 절 앞에 옛날 영정(靈井)이 있어 영정사(靈井寺)라 불렀다. 지금은 이름을 바꿔 군자사라 하는데, 무슨 뜻을 취한 것인지 모르겠다.’

앞서서 군자사를 두고 박여량선생은 행랑채가 반쯤 무너져 있다고 하였으나 1년뒤에 들린 유몽인 선생은 마천의 군자사를 모란꽃이 핀 것을 감동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봐서 서로간의 관점이 달랐거나 아니면 군자사의 스님들이 무너진 행랑채를 보수하였을 것으로 짐작이 되기도 한다.
박여량선생이 두류산일록에서 군자사를 기록한 33년 후인 1643년엔 박장원선생이 또 지리산 유람을 해서 기록한 유두류산기에서 또 군자사를 묘사한 것이 이채롭기도 한데 그는 또 다른 관점에서 군자사를 묘사해 놓고 있다.

‘저녁 때 군자사(君子寺, 현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에 이르렀다.
이 사찰의 본래 이름은 영정사(靈井寺)였었는데, 신라 진평왕이 이곳에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사찰 이름을 군자사로 고쳤다고 한다.’
사찰 건물들이 모두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서쪽에 있는 삼영당(三影堂)은 새로 지은 건물인데, 노란 빛과 푸른 빛을 곱게 발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청허·사명·청매 세 대산의 초상화가 있었다. 촛불을 들어 비추어보니 부드러운 음성이 들리는 듯하였다.
그 중 사명대사는 머리를 깎지 않았는데, 머리가 길고 아름다웠다. 정말로 잘 생긴 남자였다.’

30년이란 시간과 함께 군자사는 삼영당이라는 새 건물이 들어 섰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군자사를 본 관점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 군자사를 새로 정비를 한 것으로도 짐작이 되는 대목이다. 임진왜란이 1592년에 시작되어 7년 전쟁이 끝난 시점이 1590년대 말이었으며 그로부터 10년 후에 군자사를 보고서 표현한 부분과 30년이 지난 후에 군자사를 묘사한 것이 매우 대조적임을 알 수 있기도 하다.

1686년에 정시한 선생이 기록해 놓은 산중일기에서도 군자사의 존재가 묘사되고 있다. 산중일기의 특징은 지금은 사라진 마천 주변 지리산의 여러 암자들이 등장을 하고 있는데 두타암, 무량굴, 묘적암, 천인암, 상고대암, 견성암, 도솔암, 지자대, 서동고암등의 암자 이름이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1686년 당시 마천 주변에 수없이 많은 암자가 존재했음을 알 수가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정시한 선생의 산중일기 속에서 마천 군자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오후에 군자사에 이르니 승려가 꿀물과 곶감을 대접하였다. 저녁 식사를 하고 향로당 전이의 방에서 유숙하였다. 법당과 13개의 불전을 두루 보았다.’

산중일기에서는 13개의 불전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천면 군자리에는 군자사의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김일손 선생의 속두류록에서도 ‘날이 정오가 되자 옛길을 경유하여 돌아와 석간수를 내려다보니 갑자기 창일하여 호수와 같으므로 멀리서 상무주(上無住) 군자사(君子寺)를 가리키며 가보고 싶었으나 걸어갈 수가 없었다.’라고 표현한 것으로 봐서 당신의 선인들에게 군자사의 존재는 매우 잘 알려진 유명 사찰로 통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박장원 선생이 군자사를 다녀간 147년 후에도 이동항 선생이 또 군자사를 들러서 자신이 본 군자사를 방장유록에 기록해 놓았는데

‘군자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왕비의 원당이었다. 왕비가 이 절에 머물 때 태자를 낳았다. 그래서 절 이름을 군자사라 하였다고 한다. 듣자니, 이 산 속에 사는 사람들은 수십 년 전부터 벌꿀과 각종 공물을 바치는데, 그 액수가 매년 증가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절반이 넘게 도망쳤다.’

(선인들의 유람록속에 등장하는 마천 백무동)

또 하나 지금의 지리산 천왕봉으로 오르는 주 길목인 마천의 백무동 주변에 대한 당시의 환경을 잘 묘사해 놓았는데 기록으로 짐작을 해 보노라면 군자사에서 백무동까지 가기 전의 지금의 강청마을 부근으로 짐작이 되는 대목인데

‘마을 위아래에는 감나무가 대자리처럼 빼곡히 서 있었다. 잎은 다 떨어지고 감만 주렁주렁 달렸는데, 골짜기 가득 붉게 빛나고 있었다. 이 또한 하나의 기이한 볼거리였다.
험준한 벼랑이 다투듯 서 있고, 수석(水石)이 웅장하고 아름다워 어제 본 것과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라고 묘사 했다.

당시에도 마천 주변엔 감나무가 참 많았던 모양이다. 요즘도 마천 주변엔 감나무가 많기도 하여 마천 곶감의 명성이 자자하지만 당시에도 마천의 곶감이 유명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는 백무동에 대하여 또 자세한 표현을 해 놓았다.

‘다시 산길 10여 리를 가서 백문당(白門堂: 혹 백무당(百巫堂)이라고도한다)에 도착하였다. 이 집은 길가 숲 속에 있는데, 잡신들이 모셔져 있고 무당들이 모이는 곳이다. 밤낮없이 장구를 치고 사시사철 부채를 들고 춤을 춘다. 사당 안에는 초상이 걸려 있었는데 이루 말할 수 없이 희한하고 괴이하였다. 이곳은 얼른 떠나야지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곳이었다. 밥을 재촉해 먹고 얼른 신을 신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함양의 지명 책자에 의하면 백무동은 100여명의 무당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박여량 선생은 지리산의 문화에 익숙치 않아 백무동에서 굿을 하는 광경을 목격했고 그런 모습들을 이루 말할 수 없이 괴이하고 희한하다고 표현하여 놓았다. 지리산 부근엔 수없이 많은 사찰이 존재했었어도 당시엔 토속 신앙이 민초들 사이에 파고들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구절이다.
백무동은 대전- 통영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는 등산길의 초입 지점으로 지금은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나 조선시대 때에도 백무동이 언급되어진 것으로 봐서 지리산 등정의 초입 지점으로 통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백문당, 백무당이란 지명은 판소리 6째 마당인 변강쇠전에서는 백모촌으로도 언급되어지고 있으며 그 곳은 지금의 마천면 백무동의 옛 이름이기도 한 것이다.
1790년 이동항 선생이 쓴 방장유록에서도 백무동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당시의 백무동의 규모나 당시의 민초들의 의식구조나 문화를 대략 짐작을 할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나무판으로 지붕을 만든 백무당에는 그 안에 돌로 만든 부인상을 모셔 놓았고, 8, 9호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지리산이 전국에서 존경받는 것은 신령스런 응보가 있기 때문이다. 삼남의 무당들이 봄과 가을이면 반드시 산에 들어와서, 먼저 용유담의 사당에서 기도를 올리고 그 다음에 백무당과 제석당에서 차례로 기도하였다.
그 때문에 천왕봉 당집까지 올라가 산신령께 치성을 드리고 물건을 바리바리 싣고 와 마치 시장바닥처럼 북적대었다. 당주(堂主)는 그 쌀과 돈과 포백들을 거두어서 관아에 늘 바쳐 왔다. 그럼에도 언제나 여유 있게 쓰고도 남음이 있어, 이곳 사람들은 궁벽한 깊은 산골에 살면서도 어려움이 없었다.
그렇지만 10여 년 전부터는 지리산을 찾는 무당들이 전과 같지 않았다.
관아에 바칠 것과 자신들이 써야 할 것 외에 산에서 나는 오미자·잣·바가지·녹용 등과 같은 전에 없던 공물을 매년 바쳐야만 하였다. 그 때문에 당주들이 편히 살 수 없고 당집 역시 무너지고 지저분해져만 갔다.’

(엄천강 주변에 대한 선인들의 다양한 묘사)

박여량 선생은 용유담을 건너서 지금의 송대 마을위로 해서 오르는 지리산 등산 코스를 택했다. 용유담이 있는 지방도로에서 지리산 쪽으로 건너다보면 옛날의 마적사 터가 있고 용유담과 마적도사의 전설이 있는 곳이기도 한 곳이며 마적사 터로 오르는 산길을 세세하게 표현하여 놓았는데

‘드디어 언덕을 따라가다가 길을 잃어 숲 속으로 들어갔다. 젖은 풀섶이 옷을 적시고 등나무 가지가 얼굴을 질렀다. 밀고 당기며 가시덤불을 헤치고 산허리를 비스듬히 돌며 올라갔다. 허리를 구부리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데, 죽순을 꺾고 고사리를 뜯느라 발걸음이 더뎠다. 동쪽으로 마적암(馬跡庵)을 지났다.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넝쿨을 잡아당기며 오르니 옛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산비탈을 기어오르다 보니, 열 걸음에 아홉 번은 넘어졌다. 힘들게 오르내리다 보니 얼굴이 땀에 뒤범벅이 되었고 다리는 시큰거리고 발은 부르텄다.’
박여량 선생의 기록으로 봐서 1611년 당시에 마적사의 존재는 없었고 터만 존재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은 그 주변에 새마을 도로가 나 있고 시멘트 포장까지 되어 있어서 송대 마을까지 진입이 가능하나 당시엔 길이 전혀 나 있지 않았다는 표현으로 봐서 송대 마을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

또 하나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중 관심을 끄는 두 편의 유람록이 있는데 박장원선생의 유두류산기(1643년)와 이동항선생의 방장유록(1790년)이다. 이 두 유람록의 공통점은 엄천강을 거슬러 오르면서 지리산 유람을 하였다는 것이다. 두 분이 147년이란 시차를 두고 꼭 같은 코스를 지나면서 엄천강 주변 묘사를 해 놓은 것 또한 당시의 주변 문화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우리 네 사람은 집 앞에 있는 시냇가를 건넜다. 고개 몇 개를 넘어 20리 정도를 걸었다. 큰 시냇가 옆에는 한 정자가 있었는데, 함허정(涵虛亭, 현 경남 함양군 유림면 손곡리)이었다. 1597년에 진주성이 함락될 때 순절한 의병장 최한후가 세운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정자는 노래와 춤을 즐기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모두 퇴락해 있었다.
그러나 푸근한 산 사이로 시냇물이 꼬불꼬불 흐르고 마을마다 노랗게 익은 감과 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꼭 한 폭의 그림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정자 옆에는 조팽수라는 서자 출신의 한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부잣집이면서도 인색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들을 위하여 정자 위에 음식상을 차려 놓았다. 진수성찬이었다.
우리들은 마음껏 술을 마시면서 환담을 나누었다. 그러는 사이 해가 지는 것도 몰랐다.
드디어 초가집에 들어가 잤다. 초가집의 대들보와 서까래는 마치 우산과 같은 모양이었고 지붕은 흰 띠로 이었으며 벽은 흰 흙으로 발라 놓았다. 집 벽과 창문이 매우 정감 있어 보였다.’

2006년 현재 353년전의 유림면 모실 마을에 대한 기록물이다. 민초들의 주거 형태와 삶의 모습이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여기서 흰 흙이라 함은 모실 마을의 주변에 흔하게 존재하는 고령토의 흰흙을 말하는 것일게다. 손님에게 정성을 다하여 접대를 하는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데 당시의 함허정이 퇴락해 간다는 것, 2006년도에 함양군청에서 유적물 복원 사업의 하나로 함허정이 재 건립이 되었으며 그 사이 최근까지 함허정이 존재해 왔다는 것은 그 이후에 또 재 건립을 했다는 사실 파악이 된다.

이동항 선생의 방장유록에서 지금까지도 존재하고 있는 유림면 손곡리 함허정 주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해 놓고 있다.

‘10리를 가서 뇌계를 건너 엄천창을 지났다. 그곳에서 작은 고개를 넘어 최씨네 함허정 옛 터에 올랐다. 우리는 엄천사에 들어가 잤다. 엄천사는 원래 큰 절이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져 있었다.’

지금까지도 휴천면 남호리를 절터마을이라 부르고 있는데 일찍이 김종직 선생이 절터 마을인 옛 엄천사 주변에서 관영 차밭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김종직 선생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김일손 선생의 속두류록에서도 이미 엄천사의 존재를 기록해 놓았는데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 이동항 선생은 많이 허물어진 엄천사를 본 것이다. 이것으로 봐서 1700년대 말기까지 엄천사는 분명히 존립을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엄천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엄천사 흥폐사적문에 잘 나타나 있는데 신라때 왕명에 의해 국가 사찰로 건립된 이래 조선 숙종16년(1690)에 중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8동 100칸의 규모였으니 당시엔 거대한 사찰의 하나였다는 것과 선인들의 유람록에서 그 경과 과정이 여과없이 계속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이동항 선생의 방장유록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1790년 당시의 엄천골짜기에 대해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내용의 엄천골짜기를 자세하고 묘사해 놓은 부분이다.
마천에서 엄천강을 따라 아래로 내려 오면서 주변의 상황을 묘사 해 놓은 기록은 1489년의 김일손 선생의 속두류록에서다. 그는 지금의 휴천면 문정을 당시엔 탄촌이라 불렀고 큰 마을로 기록함과 동시에 휴천면 남호리 엄천사의 존재만 기록해 놓은 것으로 봐서 당시의 엄천골 주변엔 형성된 마을이 매우 적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으나 이로부터 300년이 지난 1790년의 엄천골짜기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유입되어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귀절을 소개해 본다.

‘아! 엄천과 마천은 예로부터 살기 좋은 낙토로 알려진 곳이다.
60리에 걸쳐 있는 큰 골짜기의 논과 보리밭은 한 조각의 땅도 놀리는 일이 없고, 뽕나무, 삼나무, 닥나무, 옻남, 살대, 나무그릇, 감나무, 밤나무 등의 이익은 도내에서 최고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빽빽이 모여 사는 마을이 이어져 있으며 주민 모두 즐겁게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처럼 선인들이 남긴 지리산 유람록을 통해 막연한 유람이 아닌 세세한 기록으로 통하여 후세까지 무엇인가 전하고자 하는 강한 메시지를 감지할 수 있는 기록물이기도 하며 아울러 지리산 산행기라는 문학적인 감성을 함께 느껴 불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김일손선생의 기록에서는 문정마을과 엄천사만 언급을 해 놓았는데 엄천골짜기에 많은 사람들이 유입되어 농토를 개간하고 많은 마을이 그 사이에 형성되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를 더해 준다.

(용유담의 절경에 감탄한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지리산을 끼고 있으면서 임천과 엄천의 주 경계를 이루며 또한 마천면과 휴천면의 경계지점이기도 하며 자연이 빚어 낸 천혜의 절경을 이루어 예로부터 문학작품의 소재로 등장된 용유담에 대해서 선인들 역시 용유담을 그냥 버려두지는 않았다. 오랜 세월동안 물의 힘으로 깎여지고 닳은 바위가 주변의 경관과 잘 어울어져 지금도 관광객들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고 있기도 한데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에서도 어김없이 세세히 자신의 눈으로 본 용유담을 정밀 묘사해 두고 있으며 마치 그곳을 관광의 목표인듯하게 묘사를 해 놓고 있다. 지리산 유람을 위해 스쳐 지나가는 길목이지만 그곳을 지나 간 선인들 모두가 용유담의 존재를 빠트리지 않고 자세하게 묘사 한것이 이채롭기까지 하다.



*김일손(1464 ~ 1498)의 두류기행록(1489년 4월 14일 ~ 4월 28일)
시내를 따라 북쪽 기슭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용유담(龍遊潭)에 이르니,
못의 남북이 유심(幽深)하고 기절하여 진속(塵俗)이 천리나 가로막힌 것 같다.
정숙(貞叔)은 먼저 못가 반석 위에 와서 식사를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으므로, 점심을 먹고 드디어 출발하였다. 때마침 비가 개어 물이 양편 기슭에 넘실거리니 못의 기묘한 형상은 얻어 불 수 없었다.
정숙이 말하기를, “이곳은 점필공(佔畢公)이 군수로 계실 적에 비를 빌고 재숙(齋宿)하던 곳이라.” 한다.
못가의 돌이 새로 갈아놓은 밭골과 같이 완연히 뻗어간 흔적이 있고, 또 돌이 항아리도 같고, 가마솥도 같은 것이 있어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백성들은 이것을 쉽게 사용하는 기명(器皿)이라고만 하며 자못 산골물의 물살이 급해서 물과 돌이 굴러가면서 서로 부딪기를 오래하여 이 모양을 이룬 줄을 알지 못하니,
세민(細民)이 사리를 생각하지 못하고 허황한 말만 좋아하는 것이 너무도 심하다.


*양대박(1543 ~ 1592)의 두류산기행록은 1586년(선조19년) 9월 2일에서 9월 12일까지의 지리산 유람을 기록한 것이 청계집에 실려있다.
느지막이 거문고 타고 노래하고 피리 부는 기생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한 노승이 길 안내를 자청하여 그와 함께 갔다. 마침내 문을 나서 시내를 따라 10여 리르 가니 물은 더욱 맑고 바위는 더욱 길쭉길쭉하였다. 언덕엔 서리 맞은 나무가 서 있고, 기가엔 소나무∙홰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나귀타고 길 가는 우리의 모습이 완연히 그림 속의 풍경 같았다. 고삐를 잡고 천천히 가니, 더딘 것도 그다지 싫지 않았다.
용유담 가에 도착해 내가 먼저 말에서 내렸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이곳은 가까이서 구경하기보다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더 좋다. 오춘간이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위대하고나, 조물주가 이 경관을 만들어냄이여. 비록 한창려(韓昌黎)나 이적선(李謫仙)이 이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수수방관하며 한 마디도 못했을 것인데, 하물며 우리들이 어쩌겠소. 차라리 시를 읊기보다는 우선 여기서 술이나 한 잔 마시는 것이 더 좋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게 하여, 무수히 술잔을 주고받으며 한껏 즐기다가 파하였다. 오춘간이 못내 재주를 발휘하고 싶어 시 한수를 지었다. 그중에서 “신령들의 천 년 묵은 자취, 푸른 벼랑에 남은 흔적 있네”라는 구절은 옛 사람들일지라도 표현하기 어려운 시구니, 어찌 잘 형용한 것이 아니겠는가?

*박여량(1554 ~ 1611)의 두류산일록(1610년 9월 2일 ~ 9월 8일)
우리는 바위에 오르기도 하고, 냇물을 굽어보기도 하고, 서성이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앉아서 휘파람을 불기도 하였다. 동쪽으로 보나 서쪽으로 보나 그 장엄한 경관이 빼어났고 수석도 기괴하였다. 내가 둘러앉아 신군이 가져온 술을 마시자고 하였다. 좌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곳은 용이 놀던 곳이라서 이런 기이한 자취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천지가 개벽한 뒤에 물과 돌이 서로 부딪치고 깎여 돌출되거나 구멍이 뚫리거나 우뚝 솟거나 움푹 패여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대꾸하기를 “다만 세상에서 전하는 대로 보는 것이 옳지, 굳이 다른 의견을 낼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
용유담에서 동남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용왕당(龍王堂)이 있었는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외나무다리를 설치해 왕래하는데, 박여승과 그의 사위는 그 다리를 건너 가장 높은 바위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발을 뗄 수 없을 만큼 정신이 아찔하였다. 또 따라가는 종들에게 위험한 곳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주의를 시켰다. 나는 늘그막에 이르러 지세가 험한 곳에 이르면 천천히 지나도 두려운 마음이 항상 마음속에 가득하다. 그러나 박여승은 40세의 한창 때인지라 기운이 왕성하고 의지가 강해 나갈 줄만 알고 두려워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바위 위로 올라간 것이다.

* 유몽인(1559 ~ 1623)의 유두류산록(1611년 3월 29일 ~ 4월 8일)
용유담(龍游潭)에 이르렀다. 층층의 봉우리가 겹겹이 둘러 있는데 모두 흙이 적고 바위가 많았다. 푸른 삼(杉) 나무와 붉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서 있고, 칡넝쿨과 담쟁이넝쿨이 이리저리 뻗어 있었다. 일(一)자로 뻗은 거대한 바위가 양쪽 언덕으로 갈라져 큰 협곡을 만들고 모여든 강물이 그 안으로 흘러드는데, 세차게 쏟아져 흰 물결이 튀어오른다. 돌이 사나운 물결에 깎여 움푹 패이기도 하고, 불쑥 솟구치기도 하고, 우뚝우뚝 솟아 틈이 벌어지기도 하고, 평탄하여 마당처럼 되기도 하였다. 높고 낮고 일어나고 엎드린 것이 수백 보나 펼쳐져 있어 형상이 천만 가지로 다르니, 다 형용할 수 없었다.

승려들이 허탄한 말을 숭상하여, 돌이 떨어져나간 곳을 가리키며 용이 할퀸 곳이라 하고, 돌이 둥글게 패인 곳을 용이 서리고 있던 곳이라 하고, 바위 속이 갈라져 뻥 뚫린 곳을 용이 뚫고 나간 곳이라 한다. 무지한 민간인이 모두 이런 말을 믿어, 이곳에 와서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땅에 대로 절을 한다. 사인(士人)들도 “용이 이 바위가 아니면 변화를 부릴 수 없게 된다”고 한다. 나도 놀랄 만하고 경악할 만한 형상을 보고서, 신령스런 동물이 이곳에 살고 있을 것이라 상상해보았다. 이 어찌 항아(姮娥)나 거대한 신령이 도기로 쪼개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시험삼아 시로써 증험해보기로 하고, 절구 한 수를 서서 연못에 던져 희롱해보았다. 얼마 뒤 절벽의 굴 속에서 연기 같지만 연기가 아닌 이상한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층층의 푸른 봉우리 사이로 우레 가은 소리와 번쩍번쩍 번갯불 같은 빛이 잠시 일어나더니 곧 그쳤다. 동행한 사람들이 옷깃을 거머쥐고 곧바로 외나무다리를 건너 허물어진 사당 안으로 뛰어들어가 기다렸다. 잠시 후 은실 같은 빗줄기가 떨어지더니, 새알만큼 큰 우박이 쏟아지고 일시에 소나기가 퍼부었다. 좌중의 젊은이들은 거의 숟가락을 떨어뜨릴 정도로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박장원(1612 ~ 1672)의 지리산기(1643년)
오후에 용유담에 도착하여 말 안장을 풀고 쉬었다. 용유담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었고 그 위에는 모두 흰 돌이 깔려 있었다. 물에 잠긴 돌빛이 깊고 맑았다. 높고 낮은 돌 위에는 수백 명도 족히 앉을 수 있었다. 우리 네 사람은 돌위에 앉아 술 몇 잔을 주고받았다.
악사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하였는데, 그 소리가 돌을 쪼개고 구름을 뚫어 마치 깊은 물 속의 용이 신음하는 소리와도 같았다.

*정시한(1625~1707)의 산중일기(1686년)

나귀에서 내려 좌려암과 삼성대를 보고 용유당에 이르니, 하얀 돌이 한 골짜기 수 백리 사이에 어지럽게 솟아 있었다. 물소리가 땅을 흔들어 우레 소리처럼 은은하게 들리고 냇물은 검푸른 빛으로 깊어서 모래톱이 없었다. 겁이 나서 가까이 가지를 못했다. 좌우에 붉은 꽃이 가득 피어 있고 바위의 상하에는 신룡이 감고 뒹군 흔적이 있었다. 특이한 모습이었다.

*이동항(1736~1804)의 방장유록(1790년)
용유담에는 활 모양으로 큰 돌들이 계곡에 쌓여 있었다. 그 돌들은 지붕마루 같은 것, 평평한 자리 같은 것, 둥근 북 같은 것, 큰 항아리 같은 것, 큰 북 같은 것, 성난 호랑이 같은 것, 질주하는 용 같은 것, 서 있는 것, 엎드려 있는 것, 기대어 있는 것, 쭈그리고 있는 것들이 여기저기에 그득히 널려 있었다. 그밖에도 기이한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 형상을 이루 다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계곡 가운데로는 큰 돌이 나 있는 홈통으로 물길이 나 있었는데, 세찬 물줄기가 요란스럽게 소용돌이치고 요동치면서 흘러내려 드넓은 못을 만들고 있었다.
못은 수리에 곧게 걸쳐 있었고, 양쪽의 골짜기에는 묶어세운 듯한 소나무 수만 그루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어둡고 컴컴하였다.
용유담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정신과 기분이 싸늘해지는 것이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못의 서쪽 비탈에는 옛날 사당이 있었는데, 무당들이 신령스러운 용에게 기도하던 곳이었다. 나무를 엮어 만든 다리로 건너다녔는데, 여울 바람이 불면 현기증이 나 물에 떨어져 죽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선인들의 유람록속에 나타난 지리산 부근의 문화)

지리산은 그 넓이 만큼이나 세련되고 다듬어진 외래 문화로부터의 유입이 적은 곳이었다. 산간 오지였던 탓에 인적 물적 교류가 적었고 그만큼 문화의 소통도 다른 곳보다는 훨씬 적었다. 기록화 되고 공인화 된 기존 역사의 세계에서도 항상 열외의 곳이 되기도 했고, 어떤 사실들이 민초들의 입에서 입으로 내려 오는 동안 살이 덧붙여지고 약간씩 변형되어 전설로서만 남은것이 참 많기도 하다. 이름 난 바위에 남긴 선인들의 각자를 통해서 남긴 것으로 어떤 사실을 추론해 가는 것이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으나 최근에 와서는 선인들이 남긴 지리산 유람록의 번역작업이 왕성해지고 인터넷의 발달로 서로간의 정보 공유가 원활해진 덕분에 지리산 부근의 옛 문화에 대해서 더 세세하게 살펴볼 수 있게 한 것이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과 인터넷 자료이다.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은 문학적인 가치와 함께 당시의 인문 문화적 접근이 용이한 자료로서의 가치도 더해준다. 자료가 아주 빈약한 지리산 부근의 묻혀진 역사의 향기와도 조금씩 접해질 수 있는 것 외에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지 않고 고고하게 살다가신 선인들의 혼도 함께 읽을 수 있는 자료이다.

위의 글은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최석기)과 http://jiri99.com/( 지리99 홈페이지)의 옛 산행기에서 중요 자료를 발췌하여 정리를 했음을 밝혀 둔다.